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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촌동을 지키는 은행나무와 기쁜 마음의 궁전 <딜쿠샤>를 같이 그렸다. ⓒ 오창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야말로 가을의 상징이다. 은행나무 가로수도 많은데, 평소에는 무심코 지내다가 가을이 오면서 잎이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면 '아, 여기 예쁜 곳이었지' 하고 감탄하게 된다.

우리 갤러리 앞 삼청동 은행나무 단풍도 참 예쁜데, 요즘 어반스케치 전시를 해서인지, 관람 온 스케쳐가 필수적으로 거리의 은행나무를 그리고 간다. 은행나무 단풍이 들었을 때 이 거리는 늘 축제다.

삼청동도 좋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은행나무는 행촌동을 지키고 있는 나무다. 행촌동은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당시 은행나무골 혹은 은행동(銀杏洞)과 신촌동(新村洞)이 합쳐지면서 지명이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점은 두 지명이 합쳐진 행촌동(杏村洞)도 결국 은행나무 마을이라는 뜻이니 이 동네와 은행나무의 질긴 연을 알 수 있다.

행촌동 은행나무가 1976년도에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수령이 약 420년이니까 지금은 약 466년 된 고목이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 도원수의 집터가 있었고, 장군님께서 손수 이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져 온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나무에 매료된 사람이 또 있었으니,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와서 살았던 테일러 부부였다.

1875년 미국에서 출생한 앨버트 테일러는 광산 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왔다. 그는 한국에서 광산업과 무역상을 하였다. 1919년에는 연합통신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고종 국장과 3.1 운동, 제암리 학살 사건, 독립운동가의 재판 등을 취재하였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추방당한 후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으나 1948년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메리 린리 테일러는 1889년 영국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험을 좋아하고 독립심이 강했던 그녀는 신부수업을 받는 학교에 가는 대신, 연극배우가 된다. 그녀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순회공연을 하던 중에 일본에서 앨버트를 만났다.

둘은 1917년에 결혼해 한국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메리는 한국의 풍경과 한국 사람을 그린 그림을 많이 남겼다. 1942년 남편과 함께 추방당한 메리는 1948년 남편의 유해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메리는 1982년 캘리포니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왼쪽 사진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 테일러 가족묘다. 그중 오른편에 보이는 큰 비석이 앨버트의 아버지 비석이고, 왼편의 작은 비석이 앨버트 테일러의 비석이다. 여름에 방문했을 때 사진을 짝어 두었다. 오른쪽 은 메리 테일러의 그림에 나오는 그녀의 서명이다. 자신의 이름 Mary Linley Taylor를 도장처럼 그려 놓았다. 집 모양은 분명 딜쿠샤를 생각하고 그렸을 것이다. 나는 이 서명에서 그녀의 감각과 타 문화에 대한 존중을 보았다, ⓒ 오창환
 
메리 테일러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자서전으로 남겼는데 2014년에 <호박 목걸이: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그녀의 흥미진진한 삶과 이방인의 눈으로 본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책을 손에 넣자마자 단박에 읽었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는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 사람과 풍습을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메리 테일러의 자서전은 키스의 작품에 비견될 만하다. 마침 이 책을 번역한 송영달 선생님은 엘리자베스 키스를 우리나라에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하신 분이다. 이 책에는 메리 테일러가 그 은행나무를 처음으로 보는 장면이 나온다.
 
옛 성벽을 따라 내려가다가 키가 30미터나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나로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기한 나무였다.(중략) "이게 무슨 나무예요?" 내가 브루스에게 물었다. "미국에서는 공작고사리 나무라고 부르는데 원래 이름은 깅코예요(중략)" "나는 '우리 나무'라고 부를 거예요. 정말로 이 나무를 갖고 싶어요. 게다가 여기는 집을 짓기에 딱 좋은 곳이네요!" - <호박 목걸이>154쪽~155쪽

부동산 격언에 '땅은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테일러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이 땅을 사서 1923년 당시로는 보기 힘든 서양식 건물을 이 언덕 위에 짓는다. 메리는 연극배우로 인도에서 공연을 하던 중,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 속의 궁전 '딜쿠샤'를 방문하는데 딜쿠샤가 힌디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말을 듣고 언젠가 집이 생긴다면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이겠다고 마음먹는다. 이제 그 꿈이 실현된 것이다(호박 목걸이 102쪽 참조).

그후로 이 집은 테일러 부부의 보금자리이자 당시 한국에 머물던 외국인들은 사교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미국, 영국인 부부도 전쟁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남편 앨버트는 구금되었고 메리는 가택연금을 당한다. 그 후 그들은 미국으로 추방된다. 앨버트는 꿈에 그리던 한국에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고 메리도 남편의 장례식 때 한국에 잠깐 들렀을 뿐 평생 그리워하던 딜쿠샤에 와서 살지는 못했다.
 
왼쪽은 은행나무 쪽에서 본 딜쿠샤고 오른 쪽은 딜쿠샤쪽에서 본 은행나무다. ⓒ 오창환
 

나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딜쿠샤>가 함께 있는 이곳을 꼭 그려보고 싶었다. 그것도 은행나무 단풍이 절정일 때. 그런데 단풍이 한창일 때는 경주에 내려가 있었고 이런저런 바쁜 일에 시간을 못 내다가 드디어 지난 15일에 그림을 그리러 갔다. 독립문역 3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걸어가면 사직 터널이 나오는데 사직터널 바로 앞에서 왼편으로 올려다보면 딜쿠샤와 은행나무가 보인다.

먼저 새롭게 단장된 딜쿠샤 내부를 둘러봤다. 전에는 관리가 제대로 안돼서 건물이 많이 손상되었다고 하는데 고증을 거쳐 깔끔하게 복원되어 있고 자료도 잘 정리되어 있다. 오히려 너무 깨끗하고 가구도 별로 없어, 이 부부가 처음 집을 지어 집들이를 할 때가 이 상태였을 것 같다. 우리는 그 집들이에 초대된 친구라고 해야 하나.

마당 한 구석에 앉으니 은행나무와 딜쿠샤가 같이 보인다. 전날 비바람이 쳐서 혹시 은행 잎이 다 떨어지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가지 끝의 잎은 다 떨어졌지만 다행히 나무 중간의 이파리는 제법 풍성하게 있었다. 그런 것을 표현해야 한다. 근대 건축물인 딜쿠샤는 오밀조밀한 벽돌 건축물이라 각을 맞춰서 그리기가 어려웠다. 

마당 한쪽에 추위를 피하는 비닐 천막이 있는데  전기 온열 의자까지 있어 갑자기 오는 비와 추위를 피해서 채색을 할 수 있었다. 내년이면 딜쿠샤가 만들어진지 백년이 되는 해이고 은행나무는 수령 오백년을 향해 가고 있다. 이 둘의 조화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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