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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천여명의 희생된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분터골 암매장지의 한 전경
ⓒ 오마이뉴스 심규상
▲ 27일 오후 충북대책위가 충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치단체 차원의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한국전쟁 당시 충북지역 최대 민간인 학살지로 추정되고 있는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대한 첫 현장설명회가 열렸다. 그동안 충북 일원에서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사건이 신고됐지만 '분터골'에 대한 공식 문제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번 현장설명회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최근 이곳에 대한 유해발굴을 추진하겠다고 밝힌데 따른 것이여서 유가족 및 지역주민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 대책위원회는 27일 오후 분터골 암매장지 현장(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 3구)에서 현장 설명회를 갖고 자치단체 차원의 진실규명과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충북대책위원회는 "피해 유족 및 목격자 증언 등을 종합한 결과 분터골 암매장지는 1950년 7월 초부터 약 1주일 동안 약 1000명 정도의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충북지역 최대 학살지로 추정된다"며 "일부 남아 있는 암매장지의 경우 훼손정도가 심하지 않아 유골이 그대로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대책위에 따르면 당시 청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서 및 지서를 통해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킬 테니 모이라'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 집결했다가 변을 당했다.

▲ 목격자 박정길 씨. "군인들이 손을 뒤로 묶은 사람들을 끌고 와 8일간 총살했시유"
ⓒ 오마이뉴스 심규상
이들은 분터골은 물론 같은 면 쌍수리, 고은 3구, 가덕 공원묘지, 피반령 고개, 도장골, 미원 추정고개,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등 골짜기에서 각각 총살됐다. 이중 분터골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대표지역이라는 것.

이중 분터골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청주형무소, 남일초등학교에 각각 임시 수용됐던 보도연맹원과 청주경찰서에서 직접 끌려간 사람들로 추정된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박정길(67, 청주시 상당구, 당시 11세)씨는 "군인들이 손을 뒤로 묶은 사람들을 하루 여덟 대의 트럭에 싣고 와 8일 동안 분터골에서 총살했다"며 "총살 후 시체를 찾으러 온 사람들이 많았고 이중에는 끌려갔다 살아남은 생존자도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목격자인 임태길(72)씨는 "처음 3일간은 푸른색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을 끌고와 총살했고 이후에는 사복을 입은 일반인들을 죽였다"며 "총살이 있은 뒤 2년 동안은 시체 썩는 냄새가 마을에 진동하고 핏물이 흘러 누구도 이곳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충북대책위원회는 "사실이 이런데도 충북도지사는 물론 청주시장, 청원군수 등이 진상규명에 나서지 않고 있다"며 "읍면동 사무소에 피해자 접수창구를 개설하고 실태조사 및 시민인권교육 등 총체적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충북대책위원회는 향후 오는 8월 중 진실화해위와 공동 조사에 착수한 후 청주시장과 청원군수를 각각 면담해 민관협력 체계를 제안할 예정이다.

한편 충북대책위는 음성군 대소면 100명, 영동읍 양강면 300명(석쟁이재), 청원 북이면 옥녀봉 199명, 오창면 양곡창고 200명, 강내면 탑연리 야산 68명, 문의면 화당리 100명 등 충북도내에서 30여건의 크고 작은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이 제기돼 있다.

"아버지 잃고 27번 이사..거지처럼 살았다"
분터골 희생자 유가족 이성열씨

▲ 이성열씨(64)
27일 분터골 암매장지 현장에서는 한 유가족이 설움에 겨워 흐느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이성열(64. 청원군 남이면 석신리)씨.
그는 이곳 분터골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작은 아버지 등에 따르면 당시 이씨의 부친은 농사일외에 사상이나 이념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보도연맹 가입 도장을 찍은게 화근이 돼 경찰서로 끌려간 후 분터골에서 총살됐다.

당시 작은 아버지가 분터골로 시신을 찾으러 왔지만 시체가 모두 부패돼 빈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는 것.

삼형제 중 장남인 이씨는 "아버지가 총살된 후 살집이 없어 27번이나 이사를 했고 20여년 동안을 거지처럼 살았다"고 오열했다.

이씨는 이어 "나 뿐만 아니라 형제 모두가 취직때마다 신원조회에 걸려 번번히 고배를 마시는 등 불이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난 1980년 승려생활을 시작한 후 매년 부친을 비롯 이곳에서 숨진 억울한 원혼을 달래기 위한 천도제를 지내오고 있다고 밝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친이 숨진 분터골을 찾았다는 이씨는 "지금이라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나서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혀 명에를 회복해 주길 바란다"며 눈물을 훔쳤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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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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