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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짓는 공사장에서 막일 엿새째다. 근육통으로 온몸이 알싸하다. 나쁘지 않다. 살아있다는 증거다. 잡일에 불과한 일들을 하고 있지만 보람차다. 마치 중차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집을 짓는 일 아닌가. 내 집을 짓든 남의 집을 짓든지 간에.

 

사람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삶의 터전, 가족과 더불어 사는 공간. 부의 상징이고 소망을 이루었다는 상징. 그러나 누군가에겐 이루기 요원한 꿈의 상징이고 결핍의 상징일 것이다.

 

중학교 때 한동안 도면 그리기를 즐겼었다. 도화지에다 자를 대고 연필로 가로 세로 줄그어 칸 나누기. 칸마다 구실 정하기. , 서재, 부엌 위에 다락, 대청마루, 마당…. 훗날 내 집의 설계도였다. 달콤한 꿈이었다. 일자, 기역자, 디귿자, 그 모양과 크기가 매일 바뀌었다. 한옥이라는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지만.

 

집 설계도 그리던 아이, 한옥집 고치기에 나서다

 


꿈을 이룬 건가. 나는 지금 한옥에서 살고 있다. 고작 네 칸짜리 단순한 일자형 농가지만. 50여년 된 집이다. 대지 150평의 이 집을 2년 전, 서울에선 변두리에 있는 전셋집 얻기도 턱없을 적은 돈으로 샀다. 집도 사람과의 인연처럼, '실존적 존재'가 되어 서로 인연이 닿아야 만난다는데.

 

나는 살면서 한 번도 크고 화려하고 비싼 집에 끌린 적이 없다. '삐가뻔쩍'한 집에 가보면 아무런 감동이 일지 않는다. 유행 따라 천편일률적인 구조와 자재로 지어진 집들도 마찬가지. 나는 집을 부의 가치나 실용성이나 유행으로 따져보지 않는다. 이미지로만 본다. 소박한 멋스러움과 시간과 삶의 더께가 느껴지는 집이 내 정서에 맞다. 지금 이 집이 그렇다. 물론 이 집도 이사 와서 집 안팎으로 여기저기 손은 좀 봤다. 한동안 집고치는 일에 몰두했었다.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담을 공간으로.

 

당진의 내 고향집이 한옥이었다. 도화지 위에 집을 지었다 고쳤다 부셨다, 고심했던 그 시절 살던 집. 부모님은 십수 년 셋방살이 전전 끝에 집을 지으셨다. 당진의 번화가에서 좀 떨어진 언덕 위에. 대청마루와 다락이 넓은 빨간 기와집. 세입자를 들일 목적으로 지은 큰 기역자집이었다(몇 년 전 그 지역이 아파트촌으로 개발되며 헐렸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우리 식구 여덟 명 그리고 셋방식구들과. 다섯 가구가 한 집에서 살았다. 수돗가엔 어린아이, 학생, 노인,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들이 섞여 늘 떠들썩했다. 볕 좋은 날에는 마당가 빨랫줄에 빨래가 가득 널렸다. 나는 그렇게 북적북적한 우리 집이 좋았다.

 

올 여름, 내 집이 그렇게 북적였다. 나는 손님 치르며 여름 다 보냈다. 그 통에 공사장엔 세 번이나 나갔나. 일 나오라 여전히 연락이 왔지만, 그건 뒷전이었다. 드디어 손님이 끊기고, 엿새 전 마천 현장에 다시 나갔다. 당분간은 거르는 날 없이 일하기로 약속했다. 여름내 실컷 놀고, '빡세게' 일하니 살맛난다.

 

막일 엿새째 현장, 주인 여자 감탄사에 우쭐했다가...

 

마천 현장은 집 여섯 채가 동시에 지어지고 있는 곳이다. 건축주가 셋이다. 한 가구에 본채, 별채 두 채씩. , 나무, 기와 같은 한옥 건축자재를 쓰고 있지만 집 구조가 한옥이 아니다. 그 점이 좀 아쉽다. 그거야 내 취향이고. 골격 위에 기와가 덮이고 벽이 섰다. 내부공사가 시작된 참이었다.


나는 흙벽돌로 쌓은 바람벽 안에 단열보안공사를 하고 있다
. 내장목수들이 천장을 만드는 동안 나는 중현씨랑 한 조로 움직였다. 중현씨는 중국 교포이다. 길림성에 아내와 딸이 산단다. 4년째 한국에서 '노가다' 중이란다. 그는 빡빡머리에 키가 작다. 나이 오십이라는데 위 앞니가 두 개 빠졌다. 그걸 다 드러내며 자주 웃는다. 그 모습이 소탈하니 천연덕스럽다. 난 그가 단번에 좋아졌다. 첫날부터 우리는 손발이 척척 맞았다.

 

흙벽돌로 쌓은 바람벽 안쪽에 틀을 짜 붙이는 작업. 벽에 은박매트와 부직포를 덮고 강목을 대고, 가로 촘촘히 대나무 쪼가리를 붙인다. 황토를 덧붙일 틀이다. 호되게 힘쓰는 일이 아니다. 난이도도 높지 않다. 망치질, 톱질, 자르고 붙이고 그 정도야 뭐…. 타카까지 팡팡 쏘게 됐다.

 


처음 잡아보는 연장들이 신기했다. 나는 양손잡이라 연장 다루기가 편했다. 그때그때 번갈아 오른손 왼손으로 바꿔 쥐며 썼다. 일에 속도가 붙었다. 머리도 몸도 빠릿빠릿 움직였다. 폭염은 한풀 꺾였지만 늦여름 더위가 푹푹 쪘다. 땀으로 작업복이 다 젖었다. 아무튼 폼은 기술자 다 됐다.

 

이틀 전, 윗집의 건축주 부부가 작업 중인 아랫집으로 구경을 왔었다.

 

"어쩌면 이런 곳에서도 섬세한 일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잘할 수 있겠네요. 그쵸?"

 

인상이 선하고 참한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남자만 일하는 동네에 여자 하나 끼여 있는 상황을 어떡하든 이해하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내 대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여자라고, 또 남자라고 해서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하던 톱질을 계속하며 내가 대답했다. 쪽 대나무를 자르는 중이었다. 대나무가 들어갈 창문 옆 벽에 맞춰 짧게.

 

"어머, 세상에 정말 톱질을 잘 하네요! 어디다 대지도 않고, 그냥 들고 서서 어떻게 자를 수 있죠? 세상에…."

 

여자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공사판 일꾼으로서의 자격을 갖췄다고 마침내 나를 인정하는 건가. 어머, 어머…. 연신 감탄하며 내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나는 더 날래게 손을 놀려 대나무 일곱 개를 뚝뚝 끊어놓았다. 대단한 기술이라도 보여주듯 우쭐해져서.

 

다 자른 대나무를 들고 벽으로 다가갔다. 톱을 내려놓고 타카를 들었다. 부부의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도편수인 이 목수까지 나타나 나를 지켜봤다. 이젠 팡팡 타카를 쏘아 대나무를 벽에 붙일 것이다. 나의 능숙한 동작을 보고나면, 그녀도 결국 나를 신뢰하게 되겠지. 남자일꾼 못지 않다고.

 


대나무를 벽에 갔다 댔다. 이런, 짧다! 그것도 반 뼘 정도나. 낭패다! 애초 내가 길이를 잘못 잰 거였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지켜보던 사람들까지 난처해졌다. 그들은 말없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 완전 쪽팔려….' 나는 확확 달아오른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바람 한 점 없다. 창문 아래 메밀꽃이 하얗게 피었다.

 

도편수인 이 목수에게 물은 적이 있다. 목수가 갖춰야 할 자질이 있다면 뭐냐고.

 

"우선 몸이 건강해야죠. 힘이 세다면 더 좋고. 일의 요령을 알게 되면, 힘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그리고 수치 감각이 있어야 해요. 또 미적 감각이 뛰어나야 하고요. 그리고…."

"에이, 그럼 나는 안 되겠네요. 수치에 완전 젬병인데."

 

수치에 약한 게 나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그 때문에 가끔 황당한 실수를 한다. 그 면에서 난 허당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절묘한 시점에 그 허점을 드러내다니.

 

집 짓는 일 못지 않은 집 고치는 일

 

때맞춰 오후 새참 시간이 됐다. 내장목수들이 일손을 놓고 막걸리를 따랐다. 창가에서 물러나 나도 거기에 끼었다. 막걸리 한 잔 냉큼 받아마셨다. 나는 좀 전의 실수를 머릿속에서 떨쳐낼 양, 목수들에게 집짓는 일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집 한 채 짓는데, 이만저만한 품과 공이 드는 게 아닌 것 같다. 물론 시간과 돈도. 그러니 보통사람들에겐 자기 집 한 채 짓는 일이 일생일대의 중차대한 일이다.

 

집을 고치는 일도 집 짓는 일 못지않다. 시간, , 품… 나는 '집과 여자는 꾸미기 나름' 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틈틈이 내 집을 손봤었다. 그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한동안 만사 제쳐놓고 그 일에 푹 빠졌었다.

 


이사 와서 제일 먼저 손댄 건, 방문 앞 툇마루에서 알루미늄 섀시를 떼어낸 거였다. 알루미늄은 한옥과 어울리지 않는 재질이다. 또 마루는 집의 안이면서 바깥 아닌가. 툇마루든 대청마루든 누마루든, 한옥에서 남방문화의 주거형식을 보여주는 게 마루다. 그러니 지리산 겨울 추위에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툇마루를 개방시키고 싶었다.

 

불편함이 때론 낭만이다. 정동향인 툇마루에 앉아 일출을 보고, 마당의 꽃을 바라보고, 지리산 자락의 풍광을 감상하는 게 얼마나 근사한데. 대신 외풍을 막기 위해 방 안쪽 벽에 단열재를 붙였다. 창호문 안으로 미닫이 단열유리문과 방충망을 설치했다.


그리고 나만의 방을 꾸몄다. 방은 넓었다. 안방과 윗방 벽을 터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우선 책장을 벽에 설치하고 앉은뱅이책상을 놓았다. 좌식생활이 온돌방에 어울린다. 윗방 뒤쪽 문 밖으로 작은 화장실을 만들었다. 벽장에 이부자리를 챙겨 넣었다. 다른 가구는 일체 방에 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서재 겸 침실 겸, 나만의 이야기 공간으로 빠진 게 없게 됐다.

 

나는 창호문에 어른거리는 새벽녘 나무 그림자를 사랑한다. 툇마루를 건너 창호문으로 비치는 부드러운 아침햇살에 감동한다. 방바닥에 어룽지는 부드럽고 은근한 빛의 변화. 루이스 칸(빛의 건축가)의 건축물들의 빛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다(손님이 오면 그 안방을 침실로 내주고 나는 부엌 옆방을 쓴다. 한꺼번에 손님이 많이 오면, 두 방을 다 내준다. 나는 혼자 사는 옆집 할머니네 빈방에 가서 잔다).

 


작은 방 하나가 현대식 주방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손 댈 곳은 안방 옆의 재래식 부엌이었다. 거기서 온돌방인 안방 불을 땐다. 북방문화 주거형태인 온돌은 한옥의 대표적인 특색이다. 거기다가 이 집은 겨울에 불 때고 살아야 하는 집이다. 부엌이 중요한 공간이다. 굴뚝도 손 보고, 무너져 내린 부뚜막도 해체하고 다시 만들었다. 그 위에 무쇠가마솥과 양은솥을 얹혔다.

 

새카맣게 그을린 벽에 회칠도 했다. 장식용으로 벽에 선반을 걸고 막그릇들을 엎어놓았다. 그만해도 옛날 부엌 분위기가 살아났다. 겨울 손님이 오면 같이 부엌바닥에 앉아 아궁이에 불을 들이며 고구마와 밤을 구웠다. 장작불을 때며 고기도 굽고 술도 마셨다. 부엌문 앞 소복이 쌓인 눈 속에 술병을 박아놓고. 겨울밤의 그 짜릿한 운치와 낭만은 젖어본 사람만 안다.

 


수돗가 옆 헛간을 개조해 정자를 만들었다. 정자가 여름손님에겐 인기다. 풀밭이었던 앞뜰엔 꽃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어 화단을 만들었다. 텃밭도 만들었다. 손톱 밑에 낀 흙이 빠질 날이 없었다. 그러고도 부서진 문짝이며 차양이며, 집 곳곳 보수가 필요한 곳이 많았다(화장실과 정자를 만드는데 든 공사비는 농가주택수리지원비를 남원시에 신청해 받아썼다. 다방면 손재주가 좋은 H가 여기저기 많이 손봐주었고, 부엌 부뚜막은 엄마가 오셔서 고쳤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이종사촌 오빠와 사촌동생이 들려 이것저것 집수리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했다).

 


 
살림집이자, 사색의 공간이며 세상과 소통하는 내 작은 집


이 작은 집이 지금 내 살림의 공간이고 사색과 고독의 공간이다. 지인들을 불러들여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이다. 모두 좋다 하고, 작고 아늑하니 나도 좋다. 역사 속에서 한국의 건축가로 이황, 조식, 송시열 등을 꼽는다. 그들은 평생 많은 집을 짓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마지막에 지은 집은 세 칸이나 네 칸짜리 작은 집이었단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정신적인 풍요로움과 단순한 생활을 즐기다가 인생을 마무리했다는데.

 

사람들은 어떤 집을 짓고 싶어 할까. 소박한 집, 거창한 집, 즐거운 집, 건강한 집, 닫힌 집, 열린 집…. 집을 직접 지으려고 현장에 나와 배우는 중이냐, 내게 묻는 인부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정작 내 집을 짓고 싶은 마음이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짬짬이 더 수리하는 일이라면 모를까집을 지을 역량이 된다면, 그것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천지다. 더 의미 있는 일들이 널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중학교 때 너무 많은 집을 지었다.

 

오늘 현장에선 목수와 인부들이 스무 명 넘게 일했다. 쿵쿵, 딱딱, 쒸이익, 팡팡…. 뭔가 만들어지고 있는 소리들이 쉼 없이 울렸다. 노동의 기운이 활기찼다. 그곳에서 나는 오늘 정강이와 무릎에 빛나는 훈장을 달았다. 부딪히고 긁혀 생긴 상처와 멍들. 호오, 아퍼….

 

내일도 일찍 나간다. 이레째 막일이다.


태그:#한옥, #집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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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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