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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로마제국의 기틀을 만든 사람이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 지중해를 '우리들의 바다'로 만들어 버리고 제국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바다는 자신들의 바다로 만들었지만 광대한 유럽대륙과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이 단숨에 로마의 영토가 된 것은 아니다. 이들 땅들이 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데는 로마군단을 이끈 많은 로마의 영웅들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카이사르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업적 중 하나는 갈리아 원정을 포함해 수많은 전투를 통한 로마의 영토확장이었다. 그의 손을 거쳐 알프스 이북의 땅 중 현재 독일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서유럽 땅이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도버해협을 넘어 영국(브리타니아)까지 침공해 들어가 현재의 영국 대부분이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는 데도 초석을 쌓았다.

유럽의 창시자 카이사르, 역시 대단해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카이사르 원정 후 알프스 이북 갈리아는 로마의 속주가 된다. 갈리아 원정 중 최대의 전투는 기원전 52년 갈리아의 영웅 베르킨게토릭스와 사운 알레시아 전투다. 카이사르는 이 전투에서 신출귀몰하는 공성전을 벌려 승리한다. 사진은 리오넬 로이어가 그린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카이사르 원정 후 알프스 이북 갈리아는 로마의 속주가 된다. 갈리아 원정 중 최대의 전투는 기원전 52년 갈리아의 영웅 베르킨게토릭스와 사운 알레시아 전투다. 카이사르는 이 전투에서 신출귀몰하는 공성전을 벌려 승리한다. 사진은 리오넬 로이어가 그린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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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장군으로서의 카이사르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 세계 전사(戰史)에 빛나는 전투 하나만 소개해 보자. 그것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알레시아 공성전(기원전 52년)이다. 이 전투는 갈리아의 부족 연합이 그들의 영웅 베르킨게토릭스의 지휘 아래 모여 로마군단과 일합을 겨룬 것이다. 이 싸움에서 카이사르가 지면 로마는 갈리아를 포기할 판이었다. 그러기에 카이사르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한 판이었다.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 연합군이 알레시아 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공략에 나선다. 상대는 로마군단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대군이다. 더군다나 다른 한 편에서는 수십만의 또 다른 갈리아 연합군이 카이사르의 군단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자칫하면 카이사르군은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아 전멸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 상황에서 알레시아 성을 에워싸는 높이 4미터의 성벽을 세웠다. 단 3주 만에 18킬로미터의 대공사를 완성시킨 것이었다. 이것으로 성안의 갈리아 연합군은 독 안의 든 쥐가 되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갈리아 연합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첫 번째 성벽에서 4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첫 번째 성벽을 둘러싸는 두 번째 성벽을 세웠다. 30여 킬로미터의 방벽이었다.

이로써 카이사르군은 알레시아 성을 에워싼 공격자이기도 했고, 동시에 갈리아 연합군과의 싸움에서는 농성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갈리아군은 카이사르군을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군을 패퇴시켰다. 그들이 두 개의 성벽 사이에 배치된 로마군단을 물리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후 일주일 후 갈리아 원군이 병참부족과 규율부족으로 혼란에 빠져 해체된 채 도주하고 베르킨게토릭스가 지키고 있는 알레시아 성채는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마침내 베르킨게토릭스는 성문을 열고 항복하고 카이사르의 포로가 되었다. 세계 전사에서 전무후무한 신기의 작전이 가져다준 승리였다. 이로써 갈리아 땅은 최종적으로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넘어 내전을 일으킨 이후 폼페이우스 등에 의해 다져진 동방의 땅과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 땅들도 손에 넣음으로써 로마가 대 제국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러한 제국화가 바로 유럽이라는 영토적 개념의 시작이다. 많은 사가들은 만일 카이사르가 없었다면 오늘날 같은 동질성 있는 유럽이 가능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카이사르는 로마제국의 토대를 만들었고, 로마제국은 바로 유럽의 시작이니 현재 유럽은 카이사르에 빚을 졌다는 이야기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동지이자 최대 정적이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을 때 카이사르를 국가 반란자로 규정하고 그와 맞섰으나 결국 그리스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했다. 이집트로 도주해 그곳에서 권토중래하고자 하였으나 도착 즉시 살해되었다. 사진은 코펜하겐 칼스버그 미술관에 있는 그의 흉상,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동지이자 최대 정적이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을 때 카이사르를 국가 반란자로 규정하고 그와 맞섰으나 결국 그리스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했다. 이집트로 도주해 그곳에서 권토중래하고자 하였으나 도착 즉시 살해되었다. 사진은 코펜하겐 칼스버그 미술관에 있는 그의 흉상,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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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에서 승리한 다음 카이사르는 이른 시간 내에 여러 가지 변혁 조치를 취한다. 원로원을 개편하여(의석수를 600석에서 900석으로 늘림) 속주화된 제국의 사람들도 로마의 원로원 의원으로 받아들여 제국의 결속을 다졌다. 대규모 건축사업을 벌여 로마를 제국의 수도답게 전면적인 도시계획을 단행한다. 살아생전에 율리우스 공회당, 율리우스 포럼을 건설했고, 침체한 경제를 살리기 위한 각종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단행한다. 이에 시민들은 환호한다.

뿐만인가, 카이사르는 달력을 개혁해 로마인을 넘어 지난 2천년 동안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정확한 역법을 선물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365일 양력 체계는 카이사르가 단행한 율리우스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16세기 그레고리우스 13세 교황에 의해 소소한 수정이 가해졌지만 그 원형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그가 암살되었다. 왜일까? 민중으로부터 그리도 칭송 받고 그것을 토대로 절대권력을 행사해 가던 그가 왜 갑자기 자신이 사면한 반대파(카이사르를 암살한 카시우스와 부르투스는 모두 폼페이우스파로 내전 중에 적대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내전이 끝나고 이들을 모두 사면하고 원로원 의원으로 복귀하는 것을 허용한다)로부터 칼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암살로 막을 내린 영웅의 최후... 황제정의 역사를 막지 못해

카이사르의 암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로마 공화정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로마는 기원 전 753년 나라를 세운 다음 약 200년 동안 왕정을 경험하고 기원전 6세기에 들어서 공화정으로 정체를 바꾼다. 더 이상 1인 군주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화정을 500년간 유지해 왔다.

로마 공화정의 본질은 한 마디로 말하면 권력분립이다. 로마의 평상시 정치권력은 집정관(콘술)을 중심으로 행정권과 이를 견제하는 원로원의 권력으로 양분되어 행사되었다. 특히 원로원은 돈줄을 완전히 쥐고 있었다. 로마 공화정에서 재정권은 원로원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로마 정치에서 그 자체로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평민회라는 존재가 더해진다. 평민들은 평민회(이것은 단일한 기구가 아니었다. 구역별 평민회인 쿠리아 민회, 로마군단 중심의 켄투리아 민회와 부족별 평민회인 트리부스 민회가 있었다)를 통해 집정관을 포함한 정무관(켄투리아 민회 선출)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호민관(트리부스 민회 선출)을 뽑았다. 호민관은 집정관이나 원로원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호민관은 이들 권력이 결정한 법령 등에 대하여 그것이 평민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판단하면 거부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기원전에 500년 간 이런 권력분립형 공화정을 유지해 왔다. 그런 이유로 로마인들에게는 어느 한 사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해 왔고 그런 시도를 여지없이 거부해 왔다. 그들에겐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왕이라는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내전을 일으킨 다음 그 전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자 로마의 모든 권력이 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0년 기한의 독재관이 되더니만 그가 죽는 해(기원전 44년)에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법률을 발의하고 집행했으며 감찰관으로서 원로원의 의원을 임명하거나 면직시킬 수 있었다. 원로원은 이제 완전히 그의 통제권으로 들어와 꼭두각시에 불과한 국가기관이 되었다.

물론 카이사르에게도 변명은 있다. 카이사르가 이런 새로운 정체를 만든 것은 로마제국의 내일을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이다. 당시 로마의 공화정은 부정부패로 병들었고, 수없는 정변이 일어나 드넓은 제국을 통치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공화파는 로마제국의 속주를 단지 로마의 식민지로만 인식하고 그에 맞게 지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카이사르는 속주의 로마화를 통해 지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에겐 로마제국 어디라도 로마와 다르지 않은 또 다른 로마이길 바랐다. 그는 로마 공화정을 완전히 해체하지 않으면 로마제국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니 두 세력은 필연적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19세기 칼 폰 필로티가 그린 카이사르의 최후
 19세기 칼 폰 필로티가 그린 카이사르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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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에게 운명의 날이 왔다. 하지만 그는 이날이 그에게 마지막 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점쟁이 스푸린나는 그 날이 있기 얼마 전에 원로원으로 가는 카이사르에게 귓속말로 "3월 15일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 말을 듣고 그냥 웃어넘겼다. 이날 카이사르는 원로원으로 가는 도중 다시 그 점쟁이를 만났다. 카이사르는 미소를 지으면서, 3월 15일이 왔으며 만사가 순탄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3월 15일이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았습니다"라고 그가 대답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 극장 앞에서는 원로원 회기를 알리는 제물이 바쳐지고 있었다. 이때 그날의 음모를 알리는 두루마리가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그 날 부르투스 일파의 암살 모의를 알고 있었던 아르테미도로스라는 사람이 그 음모를 적어 카이사르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그런 두루마리를 받는 족족 시종에게 넘기는 것을 보고 그에게 바짝 다가가 "카이사르여, 이것을 직접 읽으시되 빨리 읽으셔야 합니다. 중대하고도 그대와 직접 관계되는 내용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사람을 면담하는 바람에 읽을 수가 없었다. 죽음이란 운명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한 것이었기에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카이사르는 실제 내용에서는 황제라고 할 수 있는 '종신 독재관'의 자리에 오른 지 두 달 만에 부르투스 일파에 의해 원로원 의사당의 폼페이우스 조각상 아래에서 암살된다. 그러나 부르투스 일파는 카이사르를 찔러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세운 체제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하여 아무런 대책과 해결책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카이사르만 죽으면 공화정은 복구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태그:#세계문명기행, #카이사르, #로마문명이야기, #카이사르 이야기,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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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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