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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9월 18일 콜센터 노동자 노동인권보장을 위한 공동캠페인 출범기자회견이 서울 광화문 KT사옥 앞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전화기를 내려놓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지난 2012년 9월 18일 콜센터 노동자 노동인권보장을 위한 공동캠페인 출범기자회견이 서울 광화문 KT사옥 앞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전화기를 내려놓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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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규는 "고객이 늘 옳다"고 되뇌는 대형마트의 고객센터 직원이다. 그는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늘 미소를 보일 뿐 자기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심지어는 여직원의 엉덩이를 만진 중년 남성 고객에게 되레 주먹질을 당하면서도 연신 고개를 숙인다.

그러던 그가 우연히 연예인 매니저 오승민의 휴대전화를 줍게 된다. 그 전화에는 여배우의 '은밀한 영상'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정이규에게 오승민은 그동안 당했던 욕설과 화풀이의 대상이 된다. 정이규는 오승민에게 전화를 공손히 받을 것, 반말하지 말 것 등의 수준을 요구를 하다가 점차 자신이 지목한 인물에게 테러를 가하라는 무리한 요구까지 하게 된다. 정이규는 점차 파멸의 길에 접어든다.

2009년 개봉한 영화 <핸드폰>의 줄거리다. 이 영화를 두고 감정노동자들의 어두운 실상과 심각성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감정노동'이란 말은 미국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처음 사용했다. 그는 1983년 <관리된 심장 : 인간 감정의 상품화>라는 책을 통해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건 21세기 들어서다.

감정노동이란 '배우가 연기를 하듯 타인의 감정을 맞추기 위하여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을 뜻한다. 실제로 자기가 느끼는 감정과 다른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노동을 말한다. 대표적인 직업으로 승무원, 백화점 점원, 텔레마케터, 상담원 등이 있다. 앨리 러셀 혹실드는 '자기 기분을 다스려 겉으로 드러내는 감정 관리가 직무의 40% 넘게 차지하는 노동'으로 규정했다.

감정노동을 통해 발생하는 부작용도 적지 않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물론 정신질환이나 자살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다. 이른바 대한항공 회항사태는 감정노동의 부작용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감정노동자인 승무원을 보호해야 할 회사의 임원이 진상 승객보다 더한 '갑질'을 행사한 것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인 승무원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감정노동자들을 고용한 회사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한 판결이 있어서 눈길을 끈다. 반면, 항소심은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판결 대 판결 14번째는 '감정노동자의 우울증 회사책임 인정판결 대 부정판결'이다.

1심 "회사는 감정노동자를 보호할 의무 있다"

[사례] 통신사 고객센터 상담원 A씨는 휴대전화를 분실한 고객 B씨에게 임대전화를 개통해 주었다. A씨는 개통 뒤에는 분실한 전화로는 수신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B씨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받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B씨의 동생 C씨는 "전화 개통으로 언니(B씨)의 전화기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불만을 2차례 접수했다. A씨는 C씨에게 "사전에 충분히 안내했다"고 설명했으나 고성만 듣게 되었다. C씨는 고객센터 게시판에 "A씨의 징계를 원한다"는 글까지 올렸다.

A씨가 상황을 설명했는데도 회사는 "고객에게 직접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C씨에게는A씨에게 친절 교육과 페널티를 부과하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그러자 A씨는 분개하면서 사표를 냈다. 사직서의 건의사항란에는 "서비스직일지라도 직원들의 인격은 지켜줘야 함이 당연함"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A씨는 다음날 수면제를 과다복용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병원에서는 '회사업무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면, 집중력 저하, 분노 등이 있어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소견과 함께 우울증으로 진단했다. A씨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서울남부지법 이예슬 판사)은 우선 '회사가 감정노동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법원은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근로자의 경우 고객에게 즐거움 같은 감정적 반응을 주도록 요구되는 동시에 사용자로부터 감정 활동의 통제, 실적 향상 및 고객 친절에 대한 지속적인 압력을 받고 있어 이로 인한 우울증, 대인 기피증 등 직무 스트레스성 직업병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고객 입장만 치우친 일방적 사과 지시, 배려의무 위반"

고객센터 상담원들의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 사진은 서울시 120 다산콜센터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상담원들 모습.
 고객센터 상담원들의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 사진은 서울시 120 다산콜센터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상담원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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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감정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용자는 보호의무를 진다고 보면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즉 ▲ 고객의 무리한 요구나 폭언에 대해 근로자 보호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하고 ▲ 사안별로 적극 대처할 지침을 제공하여 근로자가 활용하도록 하며 ▲ 고객과 근로자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관리감독자로서 중재역할을 다하여야 한다. 또 ▲ 고객의 위신을 높이는 데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사실관계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근로자에게 무조건적인 사과를 지시함으로써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와 함께 ▲ 식사시간, 화장실 가기 등 기본적인 생활상의 욕구를 만족시켜야 하고 ▲ 고객과의 분쟁이나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는 쉴 수 있는 자율성을 보장하며 ▲ 노동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업무량은 적정선에서 규제하여야 할 근로계약상 보호의무 내지 배려의무를 진다고 법원은 밝혔다.

이 사건을 놓고 볼 때 회사는 A씨에 대한 보호의무를 어겼다고 판단했다. 즉 ▲ 회사에 고객 불만에 대해 정확한 책임소재 확인이나 중재절차가 없고 상담직원이 고객에게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한 점 ▲ A씨는 2007년부터 장기간 근속하였고, 업무처리건수나 능력이 탁월한 편인데도 ▲ 고객에게 사과하도록 요구받는 상황에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고객의 입장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오히려 근로자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사실관계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사과를 지시함으로써 A씨에게 무력감,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었고, 이는 사용자로서 당연히 부담하는 보호의무 내지 배려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1심은 판시했다.

또한, "회사의 보호의무 위반 행위는 A씨로 하여금 우울증을 발병하게 하거나 적어도 우울증을 악화시킴으로써 자살시도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에까지 이르게 하였음이 분명하다"면서 "이를 두고 A씨의 개인적 취약성에 기인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회사에게 A씨의 우울증을 발병 내지 악화 시킨 데에 대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면서 치료비와 위자료를 합한 700여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회사는 감정노동자를 고객의 '갑질'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다.

항소심 "감정노동 스트레스 인정하지만 회사 책임은 엄격"

그런데 회사 측은 이에 불복, 항소를 제기했다. 2심 법원(서울남부지법 제1민사부 재판장 임병렬)은 1심과 전혀 다르게 보았다.

법원은 "A씨가 '감정노동자'로서 평소 고객을 응대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음은 경험칙상 인정될 수 있"다면서도 "업무 스트레스로 이전에 이미 우울증까지 발병한 상태였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더 나아가, 설사 업무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걸렸더라도 당연히 회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아니라고 보았다. 회사에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적절한 근로환경을 제공함으로써 피용자를 보호하고 부조할 의무를 위반한 사실 및 그로 인하여 근로자에게 우울증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피를 위한 별다른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은 고의 또는 과실이 있음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2심은 1심보다 회사의 노동자 보호의무를 더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다. 

항소심은 회사측이 고객만족도를 성과금에 일부 반영하거나 고객의 클레임이 있을 경우 사실관계 확인 후 직원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점 등은 인정했다.  하지만 근로자보호의무를 위반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재판부가 내세운 근거는 ▲ 성과급에 고객만족도 반영은 불가피하고, 반영비율이 높지 않은 점 ▲ 고객의 클레임이 있다고 무조건적인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점 ▲ 매년 1회 스트레스 관리교육을 실시하는 점 ▲ 업무내용이 극심한 우울증을 초래할 정도로 과도하다고 볼 자료가 없는 점 등을 들었다.

고객에 사과 요구는 권유에 불과...고객 불만 잠재우려는 의도일뿐

감정노동자의 우울증 회사책임 소송 1심과 2심 비교
 감정노동자의 우울증 회사책임 소송 1심과 2심 비교
ⓒ 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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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측이 고객에게 "A씨에 대해 페널티를 부과하겠다"는 답변을 한 부분에 대해 항소심은 "고객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의례적인 조치에 불과하고 실제로 징계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해석했다. 지점장이 사과를 지시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사과하지 그랬어" 정도로 말했을 뿐이어서 사과 요구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부당한 사과 강요나 징계 경고가 없었으므로 회사의 책임이 없다는 것이 2심의 판단이다.

지점장이 '고객에 사과하라'고 한 말은 '강요'가 아닌 '권유'였으며, '페널티를 부과하겠다'는 답변도 징계할 뜻 없이 고객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고, 회사 쪽의 손을 들어줬다.

같은 사안을 놓고 상반된 결론이다. 1심은 감정노동자인 A씨가 고객응대 과정에서 업무 스트레스에 사과 강요로 우울증까지 생겼다며 회사의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2심은 업무스트레스는 인정하지만 회사에 우울증 책임을 물을 정도로 고의나 과실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A씨가 상고를 하지 않아서 사건은 확정되었다.

2심 판결은 아쉬운 대목이 있다. 먼저 감정노동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회사의 책임을 너무 엄격하게 따졌다. 또한 직원보다는 고객의 입장에 치우친 업무처리를 한 회사의 입장을 고려한 듯한 인상을 준다. 단적인 예로, 회사의 상사가 고객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 이것을 지시가 아닌 권유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간큰 직원이 얼마나 될까. 감정노동자들이 단지 고객이 불만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징계나 사과 등 불이익을 떠올려야 한다면 불행한 직장, 불행한 사회 아닐까.           

현재 한국의 감정노동자는 조사 결과에 따라 6백만~1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감정노동자의 스트레스나 질병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가 해결해야 할 법적인 의무임은 자명하다. 이번 판결처럼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없으려면 감정노동자의 직무 스트레스에 따른 발병을 업무상 질병(재해)으로 인정하도록 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태그:#감정노동,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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