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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이가 들어도 꼰대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무엇이든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뿐이라 믿는다. 방탄소년단을 사랑하는 아미로서 방탄의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늘어나는 해외 인터뷰를 자막 없이 듣겠다는 팬심이 더해져 영어공부에 매진한 지 2년 정도가 지났다.

전화영어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으니 전화영어 수업을 들은 지도 2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어려워 20분 수업을 듣고 나면 땀에 흠뻑 젖어 있곤 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귀가 뚫려 선생님이 하는 말은 거의 다 알아듣게 되었다. 물론 영어로 말을 하는 건 마음과 달리 아직도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내 원어민 선생님은 필리핀에 사는 서른 살의 여자 선생님이다. 밝은 성격에 열정적으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똑순이 선생님이다. 한 번도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일주일에 세 번씩 정기적으로 전화를 하고, '깨똑(카톡)'도 가끔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일상을 얘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힘든 속마음을 주고받기도 한다. 문법 따위는 벗어 던진, 아주 천천히 천천히 이어지는 영어 단어들의 나열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인내심과 서로의 마음이 더해져 말이 통하니 가끔은 신기하기도 하다.

얼마 전, 돈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학창 시절 나는 부모님께 용돈을 타 써서 돈을 아껴 써야 했다는 말끝에 돈을 주로 어디에 썼냐는 그녀의 질문이 이어졌다. 음... 어디에 썼냐고? "주로 친구들하고 노는 데 썼지." 그녀는 부러운 듯 말을 이어갔다. "나는 평생 그래본 적이 없었어."

그녀는 어릴 때 몹시 가난했다고 한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이 계셨지만 돈은 늘 부족했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아이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텔레비전이 집에 없어 텔레비전을 사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어느 날, 지인이 이사를 하면서 텔레비전을 2주 정도 그녀의 집에 맡겨놓았단다. 집에서 마음껏 텔레비전을 볼 수 있던 꿈같던 시간이 지나고, 텔레비전을 본래 주인이 찾아가는 날. 어렸던 그녀는 그 텔레비전이 자기 것이 된 줄 믿고 있었나 보다. 집 밖으로 옮겨지는 텔레비전을 뒤쫓아 가며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우리 텔레비전이야. 가져가지마. 안 돼. 엉엉"

그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던 그녀의 아빠는 결국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텔레비전 하나 사주지 못하는 본인을 책망하며 울고 계셨단다. 아마도 그 아빠는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어렸을 거다. 어린 그녀에겐 태산 같던 존재였겠지만, 눈물을 훔치던 아빠도 사실은 어린 아빠였다. 돈이 없던 어린 아빠.

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공무원이었던 아빠의 봉급으로 다섯 식구가 사는 건 빠듯한 일이었다. 그 당시엔 공무원 월급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고 한다. 빚지고 살지 않기 위해 엄마는 십 원짜리 하나 허투루 쓰지 않았고, 절약은 늘 몸에 배어 있었다.

35여 년을 거슬러 올라, 내 나이 예닐곱쯤.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은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항상 북적거리고 활기가 넘치는 시장에는 신기한 것도, 먹을 것도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쫄래쫄래 엄마를 쫓아다니며 시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 과일이 쭉 깔려있는 과일가게를 지나치던 나의 눈이 사과에 꽂혀버렸다. 어린 마음에 빨갛고 탐스럽던 사과가 몹시도 먹고 싶었나 보다. 난 엄마에게 사과를 사달라며 졸랐지만, 돈이 부족했던 엄마는 사과를 사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어린 마음에 서글펐는지 그 자리에서 사과를 목 놓아 부르며 한바탕 울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단다. 생각해보니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다. 엄마는 아직도 그 얘기를 가끔 하신다. 아마도 사과 하나를 사주지 못해 어린 딸을 울린 게 아직도 마음에 생채기로 남아있는 것 같다.

지금이야 사다 놓은 사과도 먹지 않아 썩혀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니,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원어민 선생님도 지금은 어린 날보다 풍족해져 월급을 타는 날이면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을 한다고 한다. 본인이 부모님께 받았던 걸 이제는 돌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때의 사과와 텔레비전은 빛바랜 추억으로 남긴 채, 우리는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날의 기억과 눈물은 아직 우리 몸 어딘가에 고스란히 새겨진 채 남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나도 아껴 쓰는 게 몸에 배어 있다. 백 원짜리 동전 한 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라도 아껴볼까 이리저리 가격을 비교하는 나를 보고 있자니, 어린 날의 엄마를 닮아있다. 돈 무서운 걸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실감하게 되는 까닭도 있으리라. 어린 딸들의 눈물을 쏙 빼던 그 돈이 참 무심하면서도, 무섭다.

태그:#돈, #딸,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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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철없는 어른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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