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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전북 고창에 자리한 인촌 김성수 생가를 찾았다. 김성수는 미당 서정주와 함께 고창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인촌 생가와 서정주의 생가 옆 폐교 건물을 리모델링한 미당 시문학관은 고창의 내로라하는 관광지로 두 곳의 거리도 3km 남짓에 불과하다.

둘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인 올해 나름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두 사람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그들의 비루한 삶을 더듬어보며 반면교사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언하건대 역사와 문학에 눈뜬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최고의 답사 장소로 손색이 없다.
 
인촌 김성수
 인촌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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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생가는 개항 전후 만석꾼 집안의 전형을 보여주는 저택이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를 두루 갖춘 양반 가옥 두 채가 앞뒤로 연이어진 거대한 살림집이다. 견문이 적은 탓인지, 근 20년 동안 숱하게 답사를 다녔지만 궁궐을 제외하고 이렇게 넓은 집은 여태 본 적이 없다.

형은 '글'로, 아우는 '돈'으로 일제에 부역

이곳에서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태어났다. 둘의 생애를 제외하면 우리 현대사가 밋밋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할 만큼 한 시대를 풍미한 거물들이다. 다만 안타까운 건,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물구나무서도록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김성수를 수식하는 직함은 많고도 화려하다.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자, 동아일보를 설립한 언론인이기도 하다. 또, 중앙학원을 세우고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운영한 교육자이며, 굴지의 경성방직 회사를 꾸린 기업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철저히 일본 제국주의 편에 섰다. 막대한 국방헌금을 냈고 전쟁을 미화하는 시국강연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일제의 전쟁 동원 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조선 청년들의 징병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언론에 여러 차례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해방 이후 승승장구했다. 미군정의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선임되는가 하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가 되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우익의 거물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좌익 세력은 물론 중도파가 대부분 거세된 뒤 그는 6.25 전쟁의 혼란 속 부통령으로 추대되기까지 했다.

형과 5년 터울인 아우 김연수의 면면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일본 최고의 명문인 교토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해서 형의 사업을 이어받아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방직과 고무 산업, 농장 운영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 내내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갔다.

전북 고창과 전남 영광, 장성, 함평 등지에서 광대한 농장을 운영했고, 서해안 곳곳의 갯벌을 매립한 간척지를 사유화하기도 했다. 당시 '김연수의 땅을 밟지 않고선 호남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였다. 이때의 농장 운영 회사가 현재 삼양사의 전신인 삼수사다.

그의 축재는 총독부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 가능했다. 중추원과 관선 도평의회,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등 수많은 총독부 관변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도, 천문학적인 국방헌금과 위문금을 자발적으로 낸 이유도 그래서다. 이로 인해 그는 일왕에 의해 두 차례나 감수포장을 받았다.

참고로 감수포장이란 공익을 위해 개인재산을 기부한 이에게 일왕이 주는 훈장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공익을 위해 개인재산을 털었다면, 기실 일제의 주구였다는 말과 다름없다. 해방 직후 설립된 반민특위가 가장 먼저 체포에 나선 이도 바로 김연수였다.

형은 '글'로, 아우는 '돈'으로 일제에 부역한 셈이다. 물론 출범한 지 채 1년도 안 돼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김연수는 무죄로 풀려났다. 이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과 박정희 유신 정권에 협력하면서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거듭났고,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에 선임됐다.

김성수와 김연수 가문은 일제에 부역하며 부와 권세를 누리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친일 혐의를 세탁한 뒤 독재정권에 결탁해 승승장구해온,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의 전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정치와 교육, 언론과 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그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친일파들의 나라'임을 증명하고 있다고나 할까.

유력한 보수 언론인 동아일보는 김성수의 직계 후손이 세습 운영하고 있다. 현 김재호 사장은 김성수의 증손으로, 학벌 구조의 정점인 고려대학교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또, 해방 이후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고, 전두환 정권 시절 최초의 호남 출신 국무총리로 주목을 받은 김상협은 김연수의 아들이다.

생가에 설치된 안내판, 그 안에 담긴 왜곡 

두 형제의 친일반민족행위는 이미 학계는 물론 정부로부터 공인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가에 설치된 안내판을 통해서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뿐더러 되레 미화하는가 하면 사실 왜곡마저 일삼고 있다. 모르는 이가 읽는다면 자칫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로 착각할 우려마저 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이 탄생한 생가'라고 적힌 왜곡투성이 안내판이 정문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정부가 세운 공식 표지판은 워낙 작고 내용도 소략해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 인촌 생가의 관광 안내판 "인촌 김성수 선생이 탄생한 생가"라고 적힌 왜곡투성이 안내판이 정문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정부가 세운 공식 표지판은 워낙 작고 내용도 소략해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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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탄생'이라는 봉건적인 단어부터가 눈에 거슬린다. 일제에 부역한 사실을 '공사(公事)에 헌신했다'고 왜곡하고, 민족을 배반한 대가로 부를 축적했으면서 '민족자본 육성의 수범'이라며 추켜세운 건 후안무치한 짓이다. 어처구니없는 미사여구 대신 차라리 그들이 쓴 내로라하는 감투들을 순서대로 적어놨다면 덜 민망했을 듯 싶다.

더욱 가관인 것은 구한말 탐학을 일삼던 지주들과 관리, 외세에 기댄 매판세력들을 징치하던 농민들을 '화적떼의 행패'로 표현한 부분이다. 두 형제가 생가를 버리고 타지로 떠난 시기는 1907년 즈음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돼 외교권을 박탈당한 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의 해산을 앞둔 시기이니, 그들은 '화적떼'이기는커녕 차라리 '의병'이라 해야 옳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그들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애써 감추고 미화하려는 노력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안내판에 제작자나 관리기관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들의 후손이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문제는 그렇듯 왜곡투성이인 안내판이 버젓이 세워져 있는데도 문화재청이나 지방자치단체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옆, 정부가 제작한 안내판은 비교가 안 될 만큼 작기도 하거니와 내용도 네 줄로 소략해 눈길조차 끌지 못한다. 심지어 동생 김연수에 대한 내용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그것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왜곡투성이 안내판을 정부가 세운 것으로 여기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인촌 생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화적떼의 행패'를 피해 이사했다는 집에도 어이없는 유물이 수문장처럼 서 있다. 전북 부안 줄포에 자리한 김상만 가옥의 '진휼선정비'다. '진휼'이란 가난해서 끼니를 굶는 인근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었다는 건데, 그런 양반가라면 '화적떼의 행패'를 당했을 리 없잖은가. 이른바 '셀프 공덕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참고로 김상만은 김성수의 아들이다.

이 또한 모르는 이가 본다면 대를 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모범적인 인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생뚱맞은 선정비 앞에서 친일반민족행위를 '세탁'하려는 저들의 몸부림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김상만 가옥은 현재 정부의 예산을 들여 대대적인 정비와 수리 공사가 한창이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 역사 바로 잡아야

우리는 친일 잔재의 청산이라는 대의에 공감은 하되, 각자의 깜냥대로 실천하려는 노력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권력을 쥔 정치인들이 법과 제도를 바꿔야만 이뤄낼 수 있는 것으로 치부하며 구경꾼처럼 팔짱만 끼고 있는 이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둘이나 배출한 이곳을 '탄생지'로 표현한 황당한 안내판이 버젓이 서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월요일 아침,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안내판을 철거하거나 내용을 즉시 교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4~5년 전쯤에도 이곳에 답사를 왔다가 전화를 걸어 항의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담당 공무원의 '영혼 없는' 답변은 한결같았다.

"검토한 뒤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겠습니다."

언제부턴가 검토하겠다는 걸 할 생각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로 여기게 됐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항의하면,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솔직히 이게 어제오늘의 일이냐 싶어 놀랍진 않지만, 이번만큼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매번 직접 가서 확인하기는 어렵다 해도 전화는 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혹시나 하는 걱정이 아예 없진 않다.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는 이라면, 번거로운 일에 선뜻 나설 리 만무한 까닭이다. 더욱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고장을 대표하는 인물 아닌가. 인촌과 수당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적시하라는 요구에 '공은 공이고, 과는 과'라는 식으로 두루뭉수리 눙치게 될까 두렵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미당 시문학관의 전시실에 '꽃'의 시인 김춘수가 서정주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두둔한 구절이 자꾸만 눈에 밟힌 이유다. 그는 서정주의 친일반민족행위가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이렇게 잘라 말했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
 
입구에 들어서면 내로라는 시인과 평론가들이 서정주를 평가한 글귀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게 두 개 있다. 하나는 '미당은 시의 정부(政府)'라고 말했던 고은 시인의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라고 못박은 김춘수 시인의 그것이다.
▲ 미당 시문학관 전시실 내부 입구에 들어서면 내로라는 시인과 평론가들이 서정주를 평가한 글귀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게 두 개 있다. 하나는 "미당은 시의 정부(政府)"라고 말했던 고은 시인의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라고 못박은 김춘수 시인의 그것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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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친일반민족행위자, #인촌 김성수, #수당 김연수, #미당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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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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