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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구립 동네 도서관
▲ 성북구 청수도서관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구립 동네 도서관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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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릉동 집에서 1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청수도서관이라는 자그마한 동네 도서관이 있다. 성북구청에서 동네의 3층짜리 단독주택을 도서관으로 만들어 운영하는데 집 가까이 있어 편리하게 이용한다. 비치된 책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할 때 찾아가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어 좋다.

도서관 1층에는 문학 관련 책들이 주로 비치되어 있는데, 소설가 최인훈이 쓴 '광장'과 '회색인'을 비롯한 소설책도 여러 권 꽂혀 있다. '광장'은 대학생 시절에 재미있게 읽었고, '회색인'도 읽은 것 같은데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요즈음 하는 일 없이 회색인 비슷하게 살아가는 면도 없잖아서, 제목도 마음에 들고 해서 다시 한번 읽게 되었다.

책은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일부 문장이나 글귀가 괜찮아서 생각을 좀더 깊게 해볼 수 있었다. '보리밭 지켜보고 한평생 살자', '정신사를 앓지 말게 해골이 못 당하니' 등등 소제목처럼 붙여 놓은 문장들이 작가의 재치와 해학이 번뜩여 음미할 만하였다.

 
최인훈인 쓴 회색인
▲ 소설 회색인 최인훈인 쓴 회색인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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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가 중간에 소제목처럼 붙인 '나는 한가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문장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빌려와 생각한다를 한가하다로만 바꾸어 놓은 것이다.

흥미를 느껴 그 부분을 자세히 읽어봤는데 작가가 어떤 의도에서 이렇게 문장을 바꾸었는지 직접적인 설명은 없었다. 주인공이 5월의 신록의 뜰에 앉아 문학과 시대를 사색하는 내용을 길게 서술하고 있으니 한가한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한가하다는 것이 얼마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인지, 그래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지를 밝히는 내용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가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문장이 가슴에 확 와닿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나는 10여년 전부터 사회적인 활동을 대부분 정리하고, 사람과의 왕래도 아주 줄이면서 한가롭게 살아오고 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한가하다는 말과 뜻을 실감하게 되었고, 한가하게 지내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필요하고 좋은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한번밖에 살 수 없으니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면서 후회없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확실히 체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가하게 살아봐야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법도 깨우칠 수 있다는 철학 같은 것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한가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에 바로 공감했고, 나의 이러한 철학을 간명하게 대변해주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소설 회색인 중에 나는 한가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 회색인 소설 회색인 중에 나는 한가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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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인훈도 나와 같은 의미에서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깊은 뜻을 담은 문장으로 사용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단순하게 유추하면 한가해야만 생각을 많이 할 수 있고, 그래서 한가한 것을 바로 생각하는 것으로 등치시켰을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와 '나는 한가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이 서로 같아지게 된다. 어쨌든 최인훈 작가 덕분에 한가한 인생에 대한 나의 신통찮은 철학을 더욱 멋있고 간명하게 대변해줄 수 있는 문장을 찾아내어 좋았다.

​또 조선시대에 최고의 천재로 손꼽히는 매월당 김시습도 '일생에 일없기로 나만한 이 있을까(一生無事莫如吾)'라는 싯귀로 자신의 한가한 처지를 노래한 바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노하여 벼슬살이를 포기하고, 평생 산천을 유랑하며 살았으니 한가롭기가 그지없었을 것이다.

김시습이 그렇게 한가로운 인생을 살게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금오신화를 비롯하여 주옥같이 빼어난 시문을 많이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벼슬살이로 권력을 다투며 바쁘게 살았다면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문학적인 성과를 오히려 한가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셈이다.

한가한 인생을 선택함으로써 자신만의 부귀영달에 빠지는 삶에서 벗어나, 후세의 사람들과 시문으로 소통하며 영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 김시습이야말로 '나는 한가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에 아주 잘 맞는 인생을 살아간 대표적인 인물로 내세울 만한 것이다.

가끔 주위의 사람들이 너무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가하게 살아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자신이 보내는 시간을 음미하면서 한가하게 살아봐야 인생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인생에 이룬 바도 없이 나이들어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도 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최인훈 작가도 '나는 한가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글까지 썼으니, 이제부터는 소설가 최인훈의 위력을 빌려 좀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최인훈의 '회색인'을 다시 만나 내 생각을 그대로 대변하는 이 말을 찾게 된 것이 너무나 기쁘다.

태그:#나는 한가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회색인, #최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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