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4 11:39최종 업데이트 20.03.2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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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저자이자 가산탕진형 와인애호가 임승수입니다. 맨땅에 헤딩하며 습득한 와인 즐기는 노하우를 창고대방출하겠습니다.[편집자말]
"와인 그거 떫고 쓰던데 무슨 맛으로 먹나?"

와인에 빠지기 전에 딱 내가 하던 말이다. 호기심에 큰 맘 먹고 마트에서 사 온(혹은 선물 받은) 몇 만 원대의 와인을 기대감에 부풀어 개봉한다. 집에 와인잔이 없어서 대충 아무 데(가령 종이컵)나 부어서 소주나 맥주 마시듯 들이키는데, 이 비싼 와인에서 명백하게 떫고 쓴 맛이 난다. 뭐하러 이렇게 맛없는 술을 비싼 돈 주고 마실까? 역시 와인 마시는 놈들은 죄다 허세뿐이구나! 허탈감에 빠져 푸념한다.

당황스럽겠지만, 되레 숙성 잠재력이 뛰어난 고급 와인일수록 사서 바로 마시면 떫고 쓰다. 나 역시 동일한 경험이 있다. 때는 2015년 10월 18일 일요일 저녁, 그러니까 와인에 빠지고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르는 딱 그런 때였다. 좀 더 맛있고 좋은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나의 절박한 요청에 와인매장 직원은 이 와인을 추천했다.

루이 마티니 나파 밸리 로트 넘버 원 까베르네 소비뇽(Louis M. Martini, Napa Valley Lot No.1 Cabernet Sauvignon) 2012

맛의 대참사를 부른 와인
 

루이 마티니 나파 밸리 로트 넘버 원 까베르네 소비뇽 2012 좋은 와인은 따서 바로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 준 와인이다. ⓒ 임승수

 
루이 마티니Louis M. Martini는 와인회사 이름, 나파 밸리Napa Valley는 포도 재배 지역, 로트 넘버 원Lot No.1은 선별된 좋은 포도를 의미하고,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은 포도 품종, 2012는 포도 수확 연도다.

미국 최고의 와인 산지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주 나파 밸리 출신의 와인이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던 아내가 단단히 미쳤다며 내 등짝에 스매싱을 날릴 정도의 가격(할인가로 구매했음에도 십만 원이 넘음)이었다. 어쩌겠는가? 당시(그리고 지금도) 제정신이 아닌 것을.

"이 와인은 코르크를 열고 최소한 두 시간 이상 기다렸다가 드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이 와인의 제맛과 향을 느낄 수 없어요."
  
와린이(와인 초보)에게 와인매장 직원의 당부는 철의 규율이다. 한 달간의 경험을 통해 와인은 공기와 접촉하면서 맛과 향이 변하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도 했다. 스크류를 코르크에 낑낑대며 밀어 넣고 마개를 뽑은 후, 그 상태로 두 시간 정도 두었다가 첫 잔을 따라 마셨다.

"잉??"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떫고 쓴 것 아닌가. 분명 직원의 지침대로 두 시간을 기다렸는데 이 무슨 대참사인가? 이게 대체 얼마짜리 와인인데! 안주로 준비한 치즈를 씹으며 연거푸 와인을 따라 마셨지만 떫고 쓴 맛은 가실 줄 몰랐다. 아내에게 등짝 맞아가며 구입한 와인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 넣었지만, 와인은 끝까지 꽃봉오리를 닫고 제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루이 마티니 나파 밸리 로트 넘버 원 까베르네 소비뇽 2012는 연도 표시에서 알 수 있듯 2012년산 포도로 만들었다. 루이 마티니 와인회사 홈페이지의 정보를 찾아보니 이 회사 대표 상품인 로트 넘버 원 와인의 경우 대략 20개월 정도 오크통에서 숙성한단다.

내가 2015년에 구입한 시점에서 보면 오크통 숙성기간을 마치고 이제 막 병에 들어간 '신상'이다. 일반적으로 고급 와인은 오크통 숙성기간 외에 병입 후 추가로 수년의 숙성기간이 지나야 기대한 맛과 향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막 담근 겉절이 김치와 익은 김치의 맛이 얼마나 다른지 떠올리면 된다.

와인에서 떫고 쓴 맛의 원인이 되는 성분은 타닌tannin인데 양조 과정에서 포도씨와 껍질, 오크통 등에서 우러난다고 한다. 특히 카베르네 소비뇽은 여타 포도 품종보다 타닌이 강하다.

와인은 병 속에서 장기간 숙성과정을 거치며 타닌 성분이 부드러워지고 맛과 향이 더욱 근사해진다. 전문적인 글에서는 이 숙성 과정을 화학적으로 설명하는데, 그 내용을 이해한다고 와인 맛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사실은 읽어도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더라).

와인 평점 사이트 셀러트래커cellartracker에는 루이 마티니 나파 밸리 로트 넘버 원 까베르네 소비뇽 2012의 시음적기가 2016~2026년으로 나온다. 물론 예측치일 뿐이지만 어쨌든 전문성을 갖춘 와인평론가의 예상으로는 그렇다.

이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면 숙성된 맛과 향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20년 이후가 적절한 시기다. 그런데 2015년에 마셨으니 타닌 성분이 녹아들지 않아 여전히 떫고 쓸 수밖에. 와인매장 직원도 그런 상황을 우려해서 지금 마시려면 코르크를 열고 최소 두 시간 이상 기다리라고 조언한 것이다. 

물론 뚜껑 열고 두 시간 기다린다고 해서 수년간 숙성한 맛과 향이 나오지는 않는다. 수년에 걸쳐 병 속에서 진행되는 오묘한 숙성 과정과 몇 시간 만에 급속하게 진행되는 인위적 산화 과정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장기간의 점진적 숙성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맛과 향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개 제거 후 와인이 공기와 접촉하며 산화되는 과정에서 타닌이 누그러들고 와인이 마시기 좋게 부드러워지는 것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내 경우는 두 시간 뒤에도 떫고 쓴 맛이 여전했다. 이유는 뭘까? 공기와의 접촉면이 너무 협소했기 때문이다. 코르크 마개 제거 후 와인이 공기와 접하는 위치는 일반적으로 좁은 병목 부분이다. 이 정도의 접촉면으로는 유의미한 변화를 끌어내기 어렵다. 같은 두 시간이더라도 공기와의 접촉면이 넓으면 와인의 변화가 더 빠르다.

지금의 나라면 와인을 일정량 잔에 따라내어 와인이 공기와 만나는 지점을 병목 아래 어깨 부분까지 낮출 것이다. 그러면 와인과 공기의 접촉면이 더 넓어지며 병 속 와인의 변화가 빨라진다. 잔에 따른 와인 역시 공기와의 접촉면이 넓어지기 때문에 맛과 향의 변화가 빠르다. 이런 상태로 두 시간 정도 지나면 거친 타닌이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면서 맛과 향이 개선됨을 실제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와인이 공기와 접촉해 변화는 과정을 브리딩Breathing이라고 한다. 와인이 공기와 만나 숨을 쉰다는 의미다. 공기와 접촉시킨다는 의미로 에어레이션Aer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브리딩을 하면 와인의 맛과 향이 좋아진다고 해서 너무 오랜 시간 방치하면 공기와 지나치게 반응해 오히려 맛과 향이 꺾이고 심지어 식초가 되기도 한다.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적당한 브리딩 시간은?
 

집에서 사용하는 디캔터 오래 된 와인에서 침전물을 거르는 용도로 제작됐지만, 와인 맛을 부드럽게 하는 브리딩 용도로도 많이 사용된다. ⓒ 임승수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브리딩은 어느 정도 진행하는 게 적절할까? 와인마다 포도 품종, 토양과 기후, 양조자가 다르니 특정한 시간을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번거롭더라도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직접 맛을 보며 확인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저가 와인의 경우도 따서 바로 마시는 것보다는 10분 내지 20분 정도 기다렸다 마시면 맛과 향이 더 좋다.

다만 저가 와인은 일반적으로 브리딩이 두 시간을 넘어가면 오히려 맛이 쉽게 꺾이기도 한다. 요컨대 와인을 열어 일정량을 와인 잔에 따른 후 브리딩을 진행하면서 15~20분 단위로 맛과 향의 변화를 점검한다. 그러다가 와인이 마시기 좋게 부드러워졌다 싶으면 그때부터 안주를 곁들여 '천천히' 마시면 된다. '천천히'를 강조한 이유는 마시는 과정에서도 와인의 맛과 향이 다채롭게 변하기 때문이다. 특히 좋은 와인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간혹 디캔터라는 기구를 사용해 브리딩을 한다. 디캔터는 장기간 숙성된 와인에 생성되는 침전물을 걸러내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기구다. 입구는 좁고 내부는 넓은 구조로 되어 있는데, 침전물을 걸러내기 위해 와인을 병에서 디캔터로 조심스럽게 옮기는 과정에서 와인이 공기와 풍성하게 접촉한다. 게다가 디캔터 내부는 와인 병보다 공기와 닿는 면적이 훨씬 넓어서 산화 과정이 촉진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침전물을 거르는 용도 외에 단시간에 빠르게 브리딩을 진행해야 하거나 타닌이 매우 강한 미숙성 와인을 브리딩 할 때도 디캔터를 사용한다. 다만 디캔터를 사용해 브리딩을 하면 병에서 브리딩을 하는 것에 비해 와인의 맛과 향이 다소 차이가 난다는 의견도 있다. 그래서 내 경우에는 와인을 빠르게 브리딩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디캔터를 이용하는 편이다.

노파심에서 첨언하자면, 병 속에서 오래 묵혔다고 무조건 좋은 와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저가 와인은 숙성 잠재력이 떨어져서 보관상태에 따라서는 단기간에 쉽게 변질된다. 고급 와인의 경우에도 너무 오랜 기간(예컨대 30년)이 지나면 와인이 갈색으로 변하고 본연의 풍미를 잃는다. 그러니 맛있게 마시겠다고 1만 원대의 와인을 집에서 몇 년씩 묵히면 오히려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다. 맛없어지기 전에 후딱 마시자.

어린 시절 눈두덩에 자국이 나도록 만화경을 눌러 대고선 이리저리 돌려 보며 작은 통 안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화려한 무늬들에 흠뻑 빠져들던 기억이 생생하다. 와인이 공기와 만나 입안에서 펼쳐내는 맛과 향의 다채로운 변화는 가히 미각의 만화경이라 할 만하다.

이 글을 쓰며 문득 2017년 1월 1일에 마셨던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 누아 와인이 떠오른다. 그 와인이 공기와 만나 활짝 열렸을 때 내 미각과 후각을 자극했던 느낌은, 나에게 외딴 섬에서 고요한 밤바다를 바라보는 이미지를 떠오르게 했다. 이런 얘기를 털어놓으면 분명 누군가는 술 하나에 유난 떤다고 혀를 찰 것이다. 어쩌겠나? 그 와인이 나에게 유난스럽게 다가온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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