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드 V 페라리> 포스터

영화 <포드 V 페라리>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새해같은 기분이 들든, 들지 않든 우리는 또 새로운 여정에 첫 발을 내딛고 있다. 다르지 않았던 일상에, 그래도 떠밀려 시작한 새로운 시간에 '삶의 의지'를 불어넣을 만한 뭔가가 없을까라고 고민하신다면, <포드 V 페라리>를 권하고 싶다. 맷 데이먼과 크리스찬 베일의 치열한 152분을 함께 하고 나면 어쩐지 나도 2020년을 멋지게 살아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같은 것이 솟아오르니 말이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래도 레이싱 영화라면 1971년 개봉된 <르망>을 빼놓을 수 없다. 바이크와 레이싱을 즐겼던 스티브 맥퀸이 제작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많은 장면을 직접 소화한 이 영화는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르망 24' 대회를 다큐멘터리처럼 실감나게 치열하게 그려냈다. 이 영화에서 극 중 스티브 맥퀸이 분한 '마이클 딜레이니'는 레이싱에 대해, '인생의 모든 것이며 레이싱을 하지 않는 시간은 경주를 기다리는 시간일 뿐'이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또 다른 마이클 딜레이니들이 등장했다. 

캐롤 셸비와 켄 마일스, 그들의 만남 
 
 영화 <포드 V 페라리> 장면

영화 <포드 V 페라리>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를 여는 것은 르망 24 경주 장면이다. 가시거리조차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레이서 캐롤 셸비(맷 데이먼 분)는 감각에 의존해 질주하고 있다. 눈앞을 가로막는 게 안개인지, 아니면 사고난 다른 자동차의 검은 연기인지 모를 극한 상황을 홀로 헤쳐나가는 중이다. 이어 캐롤의 독백이 흐른다.

"7000 RPM에 다다르는 순간,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 이런 질문을 마주한다. 'Who are you?'"

극한의 경지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 마치 물아일체처럼 경주라는 치열한 경쟁 상황의 너머 자기 자신에게 온전하게 집중하게 된다는 것. 이는 <포드 V 페라리>가 '레이싱'을 빙자해 '생'에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캐롤 셸비와 그의 소울 메이트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 분)가 답한다. 

안타깝게도 7000 RPM의 극한을 넘나들고 싶었던 셸비는 더 이상 경주에 나설 수 없게 된다. 바로 그의 심장이 더 이상 그 속도를 감당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레이서 대신 자동차 디자이너, 스포츠카 딜러가 된 셸비, 그런 그를 미국 최고의 자동차 회사 포드가 호출한다.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통한 대량 생산으로 자동차 산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온 기업이다. 미국의 대표적 자동차 회사인 포드는 1960년대에 이르자 자국 시장은 물론, 전 세계 시장에서 고전을 겪게 된다. 활로를 찾기 위해 포드는 이탈리아 스포츠카 브랜드인 페라리와 합병을 추진하지만 엔초 페라리로부터 오히려 수모를 당하고 빈 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회사 경영을 맡은 헨리 포드 2세는 이미지 혁신을 위해, 그리고 페라리에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기 위해 레이싱 대회에 도전한다. 그 중에서도 매년 페라리가 우승을 차지했던 세계 3대 레이싱 대회 중 하나이자,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르망 24시'에서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 승리의 견인차로 앞서 '르망'의 우승을 거머쥔 바 있는 셸비를 호출한다. 

켄 마일스는 셸비와 함께 '르망 24시 레이스' 우승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사업이든, 체면이든, 사교성이든 관심 없고 오로지 레이싱만 생각하는 외골수다. 그의 차에 엄격한 규정을 들이대는 대회 관계자 앞에서 차 앞유리를 깨는가 하면 트렁크를 망치로 쾅쾅 두드린다. 유연한 대처를 요구하는 셸비에게도 거침없이 스패너를 집어던지는 식이다. 깐깐하게 구는 손님에게는 '당신은 스포츠카를 몰 깜냥도 안 된다'고 응대하는 그에게 남은 건 가압류된 작업실뿐이다.

하지만 마일스의 고집은 레이싱 트랙에서 치열한 열정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셸비는 그에게 날라온 스패너를 기꺼이 자신의 사무실에 전시할 만큼 마일스의 열정과 능력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마일스야말로 포드를 르망에서 우승시켜 줄 유일한 레이서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이미 마일스의 직설 화법에 마음이 상한 포드 이사진들은 호시탐탐 마일스가 빠지길 원한다.

"Who are you?" 
 
 영화 <포드 V 페라리> 장면

영화 <포드 V 페라리>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맷 데이먼, 크리스찬 베일이라는 걸출한 두 배우를 앞세운 영화는 여느 레이싱 영화처럼 레이서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외골수 레이서 켄 마일스와 함께 르망 우승을 위해 고군분투 하는 셸비의 고뇌까지 깊게 다루며, 레이싱 그 이상의 이야기를 건넨다.

그렇다면 왜 마일스였을까? 레이싱 대회에서 앞서나가는 차를 추월하는 순간, 그 간발의 차이는 때론 사고로 이어지기도 하고 자칫하면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이제 더이상 운전할 수 없는 셸비는 그 미세한 지점을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마일스를 택한다. 자신이 아니라면 마일스일 수밖에 없는 셸비의 선택이자 집착을 영화는 두 사람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설득한다.

그렇다면 마일스는 어떨까? 사업장조차 압류된 시점에 그를 기꺼이 팀에 합류시켜준 셸비에게 마일스는 고마움을 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 앞에서 아이들처럼 엎치락 뒤치락하며 싸우는 그들에겐,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아도 서로를 믿게 된 역사가 있으리라 짐작하게 만든다. 늘 셸비는 튕겨 나가려는 마일스를 다독이고, 훼방 놓으려는 포드 임원진들에게 맞서 마일스를 지키려 한다. 그렇기에 마일스는 단칼에 출전을 거절 당하는 상황에서도 다시 그와 손을 맞잡게 되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그저 우정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는 부족해 보인다. 자신을 대신할 유일한 사람이라는 믿음, 그리고 관계에 서툴기만한 자신을 기꺼이 믿어주는 사람에 대한 애정. 이러한 추상적인 감정은 포드의 르망 레이스 도전이라는 상황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셸비와 마일스의 캐릭터와 함께 이들 관계는 영화적 감동의 수위를 더한다. 

"무조건 마일스는 안 된다"는 이사진의 결정에 셸비는 낙담한다. 하지만 마일스는 오히려 새로운 레이서에게 "브레이크를 조심하라"는 조언을 남기고 떠난다. 그렇게 르망에 도전하며 마일스도 서서히 변화해 간다. 그리고 그 변화의 정점은 르망 레이스의 마지막 순간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다음 르망 대회에 레이서로 나선 마일스는 결국 신기록을 세운다. 하지만 포드 이사진은 포드의 차량 3대가 한꺼번에 나란히 결승점을 통과하는 진풍경을 연출해달라고 주문한다. 이는 한 바퀴 이상 앞서 있는 마일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 셸비는 이에 반대하지만 결국 마일스는 셸비의 난처한 처지를 너른 아량을 베풀며 그 그림을 완성시켜준다. 영화는 이를 통해 두 사람의 성장과 믿음에 정점을 찍는다. 

7000 RPM의 순간을 함께 공유한 두 사람은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승리 그 정점과 함께 각자 자기 삶에서 변화하고 성장한다. 물론 레이싱 자체만으로도 <포드 V 페라리>에는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준 셸비와 마일스의 관계는 영화 초반 던져진 독백, "Who are you?"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그 넉넉한 답은 영화를 본 관객들에 대한 또 다른 "Who are you?"로 여운을 남긴다.

4차산업 혁명, 인공지능의 발달 등 최근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시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최고의 자동차인 포드가 르망에서 승리하기 위해 결국 필요했던 건 '사람'이라는, 셸비의 혜안을 통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포드V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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