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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전집에 관한 독자들의 이슈는 번역, 디자인, 가격, 초역 여부 등이다. 한 출판사의 전집을 한 번에 구매하는 것보다는 작품별로 번역이 더 좋은 판본을 선택하고, 표지 디자인이 더 예쁜 판본을 고르는 것은 좋은 소비라고 생각한다.

책을 좋아하다 보면 책에 관한 좀 더 세밀한 궁금증을 가지게 되는데, '세계문학 전집 1번'에 담긴 출판사의 의도나 성향을 생각해 보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화투 놀이를 할 때 상대의 첫 패를 주목하라는 말이 있다. 과연 좋은 전략이다. 패를 받으면 그 판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정하고 첫 패는 그 시나리오를 다지는 초석이니까 말이다. 마찬가지로 막대한 예산과 거대한 설계가 필요한 문학 전집을 내면서 1번을 아무런 의도 없이 '그냥 제일 먼저 내게 된 목록'이기는 어렵다.

민음사의 세계 문학 전집
 
변신 이야기 1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변신 이야기 1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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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전집의 종갓집이자 2020년 1월 현재 360번까지 출간한 민음사의 1번은 이윤기 선생이 번역한 <변신 이야기>가 차지했다. 무려 기원전에 쓰인 작품이다. 

민음사는 500번 700번을 넘어 1000번을 달성할 수 있다는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 세계문학 전집의 터줏대감답게 가장 많은 발행 권수를 자랑한다. 처음부터 기원전 작품을 선택함으로써 동서고금의 좋은 작품은 다 섭렵하겠다는 의지로도 읽힌다. 민음사는 친절하게도 자사가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 그 정답을 알려주었다. 

발간 21년째를 맞고 있고 모두 합쳐서 1천만 부를 판매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의 1번이 <변신 이야기>인 이유는 민음사의 문학 전집의 기획 의도와 가장 잘 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음사가 세계문학 전집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그리스 로마 신화'만 주로 출간이 되었지 <변신 이야기>를 주목한 출판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야심차게 <변신 이야기>를 1번으로 밀었지만 이윤기 선생의 번역은 중역이며, 천병희 선생의 번역본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의견이 많다. 

서양을 공부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독교와 변신 이야기다. 이 두 개가 서양의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뿌리를 차지하며 '그리스 로마신화'의 상당 부분이 <변신 이야기>에 빚을 지고 있다. <변신 이야기>를 발굴하고 확대 보급하는 것이 세계문학 전집의 발간 취지와 부합하기 때문에 1번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결국 민음사가 21년 전에 <변신 이야기>로 세계문학 전집의 출발을 한 것이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파격적인 출발이긴 한데 사실 이 행위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인문학적인 행위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본디 고전을 발굴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 모태가 되어 시작된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은 <변신 이야기>를 1번으로 선택해서 독자들의 주목을 받게 하고 더 많은 독자가 읽게 한 것은 출판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문학적인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내친김에 민음사의 세계문학 전집에 관한 궁금증을 더 해결해 보자. 눈이 밝은 독자들은 눈치를 챘겠지만, 민음사의 세계문학 전집에서 표지 그림도 없고 심지어 뒤표지에 다른 목록에는 실려 있는 줄거리와 작품설명이 없는 유일한 책이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 주인공이다. 

이는 원저작권자인 샐린저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샐린저는 '내 책을 출간할 때는 표지에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고 민음사는 원저자의 뜻을 따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유일하게 표지 그림이 없고 제목만 인쇄되어 있어서 가장 성의가 없고 예쁘지 않은 목록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목록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독자가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세계문학 전집은 전집으로 한 번에 사는 것이 아니고 한 권씩 낱권으로 사야 한다는 명제 말이다. 이에 대해서 물론 낱권으로 사는 것이 좋은 방법이긴 한데 전집을 한 번에 사는 것이 나름의 장점도 있다고 하는 민음사 직원의 주장이 신선했다.

독자마다 취향이 다른데 전집으로 사두었다가 한 권씩 무작위로 꺼내서 읽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간다는 설명이다. 무수한 실패를 통해서 자신만의 독서 취향을 찾아가기 위해서 전집 구매도 나쁘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토록 우아하고 인문학적인 마케팅이라니.

을유문화사의 세계 문학 전집
 
마의 산 -상  | 을유세계문학전집 1 , 토마스 만 (지은이),홍성광 (옮긴이)
 마의 산 -상 | 을유세계문학전집 1 , 토마스 만 (지은이),홍성광 (옮긴이)
ⓒ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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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을유 세계문학 전집이다. 출판사 이름이 왜 '을유'인지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 답은 쉽게 나온다. 이 출판사가 1945년 창립되었는데 그 해가 '을유'년이었기 때문이다. 유구한 전통을 가진 출판사답게 묵직한 목록을 주로 낸다. 을유 세계 문학 전집의 영광스러운 1번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다. 

<마의 산>은 을유 세계문학 전집의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을 잘 보여준다. 을유 세계문학 전집은 잘 팔릴 것 같은 목록보다는 균형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라별 목록 수를 비슷하게 맞추고 잘 알려진 목록과 알려지지 않은 목록도 적절히 안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잘 모르는 목록이 많아 보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을유 세계문학 전집의 가장 큰 장점은 번역이다. <마의 산>만 해도 그렇다.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나와서 <마의 산>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러니까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토마스 만의 전문가를 모셔다가 번역을 맡겼다. 번역가의 질뿐만 아니라 번역 위원들 간의 만장일치와 삼중 교차 점검이라는 시스템을 가동하는데, 지금까지 번역에 대해서 일체 문제 제기가 없었다.

을유 세계 문학 전집이 얼마나 정확한 번역에 몰입하는지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온 국민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아는 책을 좀 더 정확한 번역이라면서 <젊은 베르터의 고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을 했다. 판매량보다는 '논문에 인용될 수 있는 번역'을 추구하는 을유출판사다운 결정이다.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의 1번은 그 이름도 생소한 <트리스터럼 샌디>라는 영문학 작품이다. 혁신적인 소설 기법으로 문학의 새로운 전범을 보여준 초기 영문학의 대표작이라는 찬사를 달고 있지만 2001년이 되어서야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되었다. 대산세계문학총서는 초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문학 전집이며 <트리스터럼 샌디>가 그 정체성을 대표한다. 

하드커버이며 띠지에 '국내 처음으로 번역'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초역이 많다 보니 당연히 국내 독자들에게는 낯선 목록이 많다. 대산세계문학총서의 또 다른 특징은 시집의 비중이 다른 전집보다 높다는 것이다. <트리스터럼 샌디>가 보여주는 대산세계문학총서의 정체성은 표지 디자인에 그다지 정성을 기울이지 않지만 튼튼한 하드커버로 대표되는 묵직함도 들 수 있다. 이 신념은 다소 변화를 겪어서 44번 <경선지련>의 경우 화려한 꽃 그림이 표지에 장식되어 있고 소프트 커버다.

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시리즈
 
죄와 벌 - 상  | 열린책들 세계문학 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은이),홍대화 (옮긴이)열린책들
 죄와 벌 - 상 | 열린책들 세계문학 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은이),홍대화 (옮긴이)열린책들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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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시리즈의 1번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차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러시아 문학 전문 출판사로 시작한 열린책들이 달리 다른 목록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러시아 전문출판사로서 열린책들의 위엄은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3차례에 걸쳐서 다른 장정과 판본으로 냈다는 것과 1,794쪽의 <뿌쉬낀 전집>을 낸 것으로 충분하다.

<뿌쉬낀 전집>은 뿌쉬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전문가인 석영중 교수가 번역을 맡았지만 아쉽게도 뿌쉬낀이 남긴 '시'의 일부를 담지 못한 미완의 전집이 되고 말았다. 열린책들의 설립자 홍지웅 사장의 도스토옙스키 사랑은 고려대 철학과 1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턱대고 읽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철학을 공부하면서 읽는 도스토옙스키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홍지웅 사장은 도스토옙스키에 몰입했고 2주 만에 정음사판 전집을 독파했다.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도스토옙스키를 연구하기 위해서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는데 1986년 자택 지하 창고에서 책상 몇 개로 출판사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 낸 것이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붉은 수레바퀴>(전7권)였다.

자신이 잘 아는 분야라고 생각한 러시아 문학은 생각보다 판매가 부진했다. 그때부터 도스토옙스키 완역 전집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꿈은 무려 13년이 흐른 2000년 6월에 이루어졌다. 독자들이 '푸른색 버전'이라고 부르는 양장본 전집이 출간되었다. 5년 뒤인 2005년에는 소위 '빨갱이 버전'으로 알려진 뭉크의 그림으로 장식된 표지로 사랑을 받은 2판이 나왔다. 2007년에는 고급 장정을 가진 '수집가용 한정판'이 출간되었다. 같은 해에 양장을 포기한 저렴한 보급판도 내놨는데 두께가 워낙 두꺼워서 '벽돌 책'이 되었다. 

보급판 덕분에 도스토옙스키의 판매고는 올라갔는데 누적 판매가 20만 부를 훨씬 넘었다. 개정을 거듭하면서 번역이나 오탈자에 대한 독자들의 불만은 줄어들었고 지금은 안정된 번역으로 자리 잡았다.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리커버 특별판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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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의 1순위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전 중의 하나이며 지금까지 10차례 영화로 제작되었고 가장 유명한 첫 문장 중의 하나로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다.

무리하지 않고 무난한 작품을 선정하겠다는 취지가 엿보인다. 문학동네는 이 취지에 맞게 대체로 명성이 높으면서도 독자들이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목록을 많이 출간했다. 초역의 비율도 점차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균형감 있는 시리즈를 목표로 둔 듯하다.

펭귄 클래식 코리아의 '펭귄 클래식'

펭귄 클래식 코리아의 '펭귄 클래식'은 클래식이라는 시리즈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기획을 보여준다. 펭귄 클래식의 1번은 <유토피아>다. 소설이 아닌 인문서인데 시리즈 이름이 문학 전집이 아니고 그냥 클래식(고전)이니까 인문서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펭귄 클래식은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유토피아>, <시학>, <군주론>과 같은 인문서도 포함하는 전집이다. 놀랍게도 <대학. 중용>도 펭귄 클래식의 이름으로 나왔다. 

펭귄 클래식 코리아는 1번인 <유토피아>를 통해서 다른 출판사와는 달리 자신들은 인문서도 전집에 포함하겠다는 신호를 주었다.

마의 산 -상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2008)


죄와 벌 - 상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열린책들(2009)


변신 이야기 1

오비디우스 (지은이), 이윤기 (옮긴이), 민음사(1998)


태그:#독서, #문학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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