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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 읽는 고전'은 30대를 통과하고 있는 한 독서인이 뒤늦게 문학 고전을 접하며 느낀 재미와 사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엄마, 재미있는 이야기해주세요."

매일 아이들 앞에서 내가 바보가 되는 순간이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처음 외국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던 그 순간처럼 머릿속이 하얘진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준담.

고민 끝에 내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라고는 '호랑이와 곶감' 같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전래동화가 전부다. 그마저도 중간중간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이야기는 매번 썰렁하고 어설프게 끝나곤 한다. 이렇게 짧은 이야기도 하나 지어내지 못하고, 전래동화나 어설프게 읊고 있는 내가 스스로도 한심스러워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제 다섯, 여섯 살 된 내 딸들은 대체 언제부터 전해져 온 이야기인지도 모르는 그 곰팡내 나는 옛날이야기를 몇 번이고 또 해달라고 조를 정도로 재미있어 한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몇 번 들어 익숙해진 이야기에 아이들은 이제 자기들 마음대로 이야기를 꾸미고 덧붙여서 매번 색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릴 적에는 끝도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놀곤 했었다. 그랬던 내가 언제부터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잃어버리고 이렇게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버렸을까.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3000가지의 언어들 가운데 78종의 언어에만 글로 쓰인 문학이 있다. 나머지 언어에서는 문학이 오로지 머리와 입속에서만 존재한다. 언어의 본질은 결국 입말이고 인간은 말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이렇게 운율에 맞춰 전해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인간 유기체의 한 부분이라고, 그리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시작된 세계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능력이 도가 넘칠 정도로 실현되었던 거라고 말할밖에. 이런 대단한 이야기를 잠자리에서 들기 전에 아버지한테서 듣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들이 그들 삶의 기반이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전해 듣던 세계이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진대도 이것만큼은 변함없이 이어질 그런 세계였던 것이다. - 애덤 니컬슨 <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중에서
 
들려주소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오뒷세이아> 앞표지
 <오뒷세이아> 앞표지
ⓒ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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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책장에 장식용으로 꽂아만 두었던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꺼내어 읽은 건, 올 한 해를 돌아볼 때 내가 한 일 중 가장 뿌듯한 일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무려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그리스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나는 마치 전래동화를 들으며 깔깔대는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장장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이야기 안에는 온갖 모험과 역경, 인간의 어리석음과 실패, 인류애와 믿음, 죄와 벌, 그리고 생과 죽음까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오랜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다가 문자로 기록됐다. 그 과정에서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수없이 더하고 빼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조금도 어설픈 구석 없이 완벽하다. 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인간과 신들의 이름, 수많은 에피소드가 등장하지만, 이야기가 산만하지 않고 인물 하나하나, 각각의 에피소드가 모두 흥미롭다.

이타카의 왕 오뒷세우스는 고향을 떠나 트로이 전쟁에 참전해 트로이를 파괴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항해를 시작한다. '지혜에서 인간들을 능가하고 하늘에 사는 불사신들에게 누구보다도 많은 재물을 바친' 오뒷세우스는 제우스와 그의 딸 아테네의 보호를 받지만, 항해 과정에서 오뒷세우스가 바다의 지배자 포세이돈의 아들 폴뤼페모스를 눈멀게 하는 바람에 포세이돈의 화를 사게 된다.

그렇게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미운 털이 박힌 오뒷세우스의 귀향길은 멀고도 험하다. 한편 그의 고향 이타카에서는 오뒷세우스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과 재혼하기를 원하는 구혼자들이 집에 들끓고, 구혼자들은 오뒷세우스의 집 마당에 진을 치고 앉아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그의 가산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바다로 떠나게 되고, 그 둘의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마침내 뻔뻔하고 염치없는 구혼자들을 향한 오뒷세우스 부자의 참혹한 복수가 펼쳐진다. 여기까지가 <오뒷세우스>의 간략한 줄거리다.

서사시를 읽고 나면 남는 것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내가 생각하는 <오뒷세이아>를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신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있다. 호메로스의 이야기에 그려진 신들은 전지전능하거나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특정 인간을 편애하고, 대체로 무자비하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신과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들끼리 싸우며, 온갖 더럽고 치사한 짓을 일삼는다.

그들은 시종일관 여자들을 희롱하고 폄하하는데, 그 와중에 오뒷세우스를 사랑해 그를 자신의 섬에 7년 동안 억류했던 여신, '칼륍소'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칼륍소에게 붙들려 슬픔에 빠진 오뒷세우스를 돕기 위해 제우스는 그녀에게 당장 오뒷세우스를 보내주라고 명령한다. 그때 제우스를 향한 그녀의 당돌한 하소연에서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무정하시도다. 그대들 남신들은! 그리고 그대들은 유별나게
질투심이 강하시오. 그대들은 어떤 여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남편으로
삼아 공공연히 인간과 동침하게 되면 질투를 하시니 말예요.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오리온을 택했을 때도
안락한 생활을 하는 그대들 신들은 질투하셨고,
급기야 황금 옥좌의 순결한 아르테미스가 오르튀기아에서
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화살로 죽였지요.
또 머리를 곱게 땋은 데메테르가 자기 마음에 굴복하여
세 번이나 갈아놓은 묵정밭에서 이아시온과 사랑의 동침을
했을 때도 제우스께서는 금세 그것을 알아차리시고
번쩍이는 번개를 던져 이아시온을 죽이셨지요.
이번에는 또 신들이여, 그대들은 한 인간이 내 곁에 있는 것을
질투하시는군요. 내가 그를 구해주었어요. 그가 혼자 배의 용골에
걸터앉아 있을 때 말예요. (제5권 118행~131행)

<오뒷세이아>의 방대한 스케일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 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 생각되어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읽으며 특별한 삶의 지혜나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이 책의 역자 천병희 교수의 말대로 '문학작품을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지혜와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굳이 서사시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에 적합한 다른 장르에 의존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 못내 아쉬운 반면 이제라도 읽게 되어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이야기 자체가 매우 재미있고, 무엇보다 호메로스가 지금의 나에게 많은 영감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매일 밤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며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 약간의 상상력을 더하면 이야기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호메로스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오늘 낮에 엄마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는데, 아파트 1층 계단에 엄청나게 많은 개미들이 줄지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거야!"로 시작하는 '개미의 모험 시리즈'를 얼마든지 다양하게 지어낼 수 있다. 거기에 딸들의 즉흥적인 상상이 더해지면 재미는 배가 되고, 이야기엔 끝이 없다. 그렇다. 우리 모두에게는 위대한 이야기꾼 호메로스의 피가 흐르고 있다.
 
 <호메로스 읽기>, 로렌스 알마 타데마, 1885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호메로스 읽기>, 로렌스 알마 타데마, 1885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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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2006년판) - 그리스어 원전 번역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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