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5 08:48최종 업데이트 20.06.1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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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2020년 현재 필기구 업계는 몽블랑이란 강력한 일인자가 정점에 선 채 펠리칸, 그라폰, 오로라를 위시한 여러 업체가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워터맨, 파카를 필두로 수많은 업체가 각축을 벌이던 군웅할거의 시대였습니다.

지금의 만년필은 카트리지&컨버터나 피스톤 필러를 사용해 쓰는 게 일반적이지만 초기의 만년필은 별도의 충전 키트가 있어야 펜에 잉크를 주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무런 보조도구 없이 펜에 잉크를 넣을 수 있는 혁명적인 방법이 있었는데요. 이른바 셀프 필링 방식은 '콘클린(Conklin)'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콘클린의 '크레센트 필러(Crescent Filler)'가 시장에 선을 보인 이후, 각 업체들은 자신들만의 충전 메커니즘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신기술이 오늘 등장했다 내일 사라지는 명멸의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크레센트 필러는 구조상 펜 한가운데에 충전을 위한 부속 일부가 돌출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는 펜이 책상 위에서 구르다 떨어지는 걸 막아주기도 하지만, 미끈한 바디라인을 망치는 단점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쉐퍼는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쉐퍼는 배럴에 막대 형태의 접이식 레버를 달아 평소엔 드러나지 않고, 충전 시에만 90도로 세워 잉크를 흡입하는 충전 방식인 '레버 필러(Lever Filler)'를 다듬어 1912년 상용화했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 많은 필기구 생산 업체가 서로 경쟁하듯 새로운 잉크 충전 방식과 펜 제작에 쓰이는 신소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일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또 일부는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스러짐은 아니었습니다. 1920년을 기점으로 20년간 이어진 '만년필의 황금시대'를 길어 올리는 마중물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만년필 애프터서비스 시대를 연 쉐퍼

지금은 몽블랑이 만년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100년 전, 1920년대 만년필 황금기 선두에 섰던 업체는 누가 뭐래도 쉐퍼입니다. 이제는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라이프타임(Lifetime)'이 적용된 펜을 선보이며 대중의 주목을 받은 쉐퍼는 만년필 사용자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었습니다.

만년필 사용자라면 누구나, 언제 펜을 떨어뜨려 망가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습니다.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접촉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처럼, 만년필 쓰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순 없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잠깐 손에 쥔 지인이 볼펜 쓰듯 한번 꾹 누르는 것만으로도 펜촉이 틀어지기도 하는 게 만년필이기 때문입니다.

쉐퍼의 라이프타임은 바로 이 부분에 집중했습니다. '쉐퍼 만년필은 튼튼하다' 또 '분실하지만 않는다면 어디가 어떻게 망가지더라도 고쳐주겠다'라고 한다면 사용자가 지갑을 열 거란 계산을 한 겁니다.

만년필 사용자들 대부분은 펜을 과할 정도로 아끼면 아꼈지 함부로 다루진 않습니다. 실수로 떨어뜨릴 순 있을지언정, 바닥에 추락한 펜을 한 번 더 발로 밟아 캡이나 배럴이 두 동강 나게 하는 일은 드뭅니다. 그래서 쉐퍼는 '펜 추락 시 충격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는 펜촉을 튼튼하게 만든다면 고장 날 확률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거지요.

경영진의 이런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타 브랜드 경쟁 모델보다 3배나 높은 가격이었음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습니다. 이른바 쉐퍼호(號)가 돛을 펼치고 순풍에 키를 맡긴 채 순항하던 호시절입니다.
 

1940년대 쉐퍼 트라이엄프 센티널 디럭스 M촉 ⓒ 김덕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쉐퍼의 '레버필러(Lever Filler)' ⓒ 김덕래


물 들어왔을 때 노 젓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 쉐퍼는 라이프타임 마케팅에 박차를 가합니다. 어찌 보면 쉐퍼 전략의 핵심은 기술적 접근이라기보단 심리적 공감대 형성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기업 가전제품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애프터서비스에 있습니다.

지금의 만년필은 누군가의 성공과 행운을 기원하며 건네는 선물의 의미도 크지만, 당시의 만년필은 '내가 쓰는 나의 필기구'로서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어지간해선 망가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장 난다면 가져와라, 다시 쓸 수 있게 해주겠다는 쉐퍼의 말은, 전적으로 나를 믿어도 좋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읽혔습니다.

쉐퍼는 자신들의 공언(公言)에 마침표를 찍듯, 1924년부터 펜에 '화이트 닷(White Dot)'을 찍어 평생 보증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화이트 닷의 의미는 이 점이 지워질 때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만큼 공들여 만들었으니 걱정하지 말고 쓰라는 의미입니다.

쉐퍼 '트라이엄프 센티널 디럭스(Triumph Sentinel Deluxe)'의 펜촉은 흘깃 봐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일반적인 만년필의 펜촉과는 형태가 상이합니다. '트라이엄프 닙(Triumph Nib)'이라 이름 붙은 이 펜촉은 촉 끝부분이 두툼해 한눈에 봐도 놀랄 정도로 튼튼하고, 버텨주는 힘이 좋은 강성촉입니다.

파카와 정면 대결, 승부는 갈렸지만

파카51은 1941년 첫 등장 후 1978년 단종되기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만년필계의 영원한 전설입니다. 쉐퍼는 이 전설의 만년필을 공략하기 위해 골몰하다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듬해 파카51에 비해 3배나 많은 금을 펜촉에 쏟아부어 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벌어질 만한 역작을 만들어냈지만, 챔피언 파카51의 가드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쉐퍼는 전력을 다했지만, 파카의 아성을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쉐퍼社 평생 보증의 상징 '화이트 닷(White Dot)' ⓒ 김덕래

  

쉐퍼의 집념의 산물 '트라이엄프(Triumph)' 펜촉 ⓒ 김덕래


살짝 뒤로 젖혀진 펜촉 끝은 어떤 펜보다도 두툼해, 설령 책상 위에서 떨어뜨린대도 능히 버텨줄 것만 같은 신뢰감이 듭니다. 냉장고에 음식이 가득한 걸 알면 되려 배가 덜 고프고, 지금 배가 부른 상태더라도 집에 먹을 게 없는 걸 알면 슬몃 출출한 듯도 싶은 게 사람입니다. 내가 펜을 일부러 집어던지지만 않는다면 버텨줄 거란 믿음이 있으면 참 희한하게도 떨어뜨리지 않게 됩니다.
 

종이와 맞닿는 부분이 살짝 뒤로 젖혀진 트라이엄프 펜촉 ⓒ 김덕래


레버 필러의 성공을 시작으로 라이프타임 펜을 시장에 내놓으며 평생 꽃길만 걸을 것 같던 쉐퍼의 영화도 오래가진 않았습니다. 파카와 한 방씩 주고받으며 접전을 펼쳐왔지만, 점점 데미지가 쌓여가는 쪽은 쉐퍼였습니다. 잽, 스트레이트에 이어 어퍼컷과 훅을 쉼 없이 날렸지만, 시류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쉐퍼는 서서히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2014년 8월 크로스에 인수된 이후 힘겹게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는 쉐퍼를 보면, 그저 앞만 보며 달리는 게 최선은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세상을 관통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파도에 올라타야 합니다. 뒤처지면 역사 속에서만 남게 됩니다.

강성 펜촉이라 낭창거리는 하늘거림을 맛보기는 어렵지만, 두툼한 펜촉에서 느껴지는 신뢰감은 또 다른 맛과 멋입니다. 얼추 70~80년 전 만들어진 '빈티지(Vintage)' 만년필입니다. 그저 부드럽기만 한 필기감을 느끼기 위해 선택할 펜이 아닙니다.

나보다 한 발 앞선 업체를 따라가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모방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방책입니다. 내가 따라잡을 때까지 경쟁 업체가 기다려주지도 않을 뿐더러, 되려 상대가 여태까지보다 더 보폭을 크게 해 달리면 격차는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황이 되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입니다. 전혀 새로운 기술을 시장에 내놓는 거지요. 여태 세상에 없던 패러다임을 제시해야만 대중의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위험부담이 있는 방법을 쉐퍼는 택했고, 안타깝게도 실패했습니다.

파카의 '배큐메틱 필러(Vacumatic Filler)'라는 스트레이트를 '백-필(Vac-Fill)'로 맞받아쳤지만, 치명타를 입은 건 쉐퍼 쪽입니다. 하지만 쉬운 길을 마다하고 험한 길을 택했던 쉐퍼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런 근사한 펜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먹어본 만큼 맛을 알고, 아는 만큼 보입니다. 모르고 써도 좋은 펜이지만, 알고 보면 더 멋진 만년필입니다. 그저 오래전 만들어진 게 빈티지의 전부는 아닙니다. 틀에 넣고 쿡쿡 찍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한 자루 한 자루에 공을 들인 열정의 결과물이라야, 내가 죽고 없어진 후에도 평생토록 생명력 이어갈 작품이라야 진정한 빈티지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건, 설렘 두 스푼에 두려움 여덟 스푼을 얹는 일입니다. 아무리 일의 성취감을 크게 느끼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노력은 누구나 다 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시절 파카51을 비롯한 수많은 체급별 챔피언을 보유하고, 마치 영원할 것처럼 빛나던 파카 역시 몽블랑에게 왕좌를 내준 게 부인할 수 없는 만년필계의 역사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지나온 역사의 궤적을 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아무리 빛나는 별이더라도 몽블랑 역시 불멸을 장담할 순 없기에, 계속 새로운 펜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전진하고 있습니다.

내 나이보다 몇 곱절 오래된 만년필을 찾는 이들은, 그저 새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골동품을 자랑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많이 팔기 위한 목적 이전에,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그시대 장인들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서입니다.

들인 시간 대비 효율이 중요시되는 세상에서, 진정 오래 남을 도구를 적어도 한 자루쯤 손에 쥐길 원해서입니다. 낡고 여기저기 상처가 있어도 흠이 아닌 세월의 흔적이라 여기는 까닭은, 나 역시 나이가 들면 병들고 아파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설령 들인 노력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진대도, 우직하고 진득하게 시간을 들였을 게 분명한 펜입니다. '네가 나를 아무리 흔들어대도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는 쉐퍼의 행보는 가볍지 않은 울림을 줍니다. 쉐퍼의 오늘날 현실을 보면, 파카와 엎치락뒤치락하던 시절은 다시 오기 힘든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이란 걸 압니다. 하지만 그 시절, 쉐퍼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펜은 여전히 강력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마치 절정을 향해 치닫듯 숨 고를 틈도 없이 전력질주하던 쉐퍼의 1940년대 야심작입니다. 전력을 다했다면 승부에서 지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덜 후회하기 위해 오늘 하루도 내 열정의 모두를 쏟아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설령 당신이 정상의 자리에 서지 못한대도, 아무도 당신이 흘린 땀의 가치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이 펜은 어떤 만년필보다 더 아름다운 빈티지가 분명합니다.

* 쉐퍼(Sheaffer)
- 1913년 '월터 쉐퍼(Walter A. Sheaffer)'에 의해 미국에서 탄생한 필기구 브랜드. 펜에 찍힌 '하얀 점(White Dot)'이 사라질 때까지 펜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라이프타임(Lifetime)', 이른바 평생 보증 마케팅으로 유명세를 떨침. 당시 어떤 브랜드보다 강력했던 '파카(Parker)'와 치열한 접전을 펼치며 만년필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2014년 '크로스(Cross)'에 인수된 이후 숨 고르기 중. 파카와 맞상대하던 그 시절 파이팅 넘치던 모습을 재현해 주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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