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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과 한빛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이전 기사] 너 없이 퇴임하지만 슬퍼하지 않을게, 너도 기뻐해줘 http://omn.kr/1ocaj
 
책 '사랑의 학교'
 책 "사랑의 학교"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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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이탈리아 작가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를 읽었다. 90년대 말쯤 창비에서 <사랑의 학교>가 연달아 3권으로 나왔을 때 반가워서 꼭 읽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냥 지나갔다. 숙제를 안 한 것처럼 이상하게 남아있었다. 결국 정년퇴임을 두 달 앞두고 읽게 됐다.

이 책을 처음 만났던 것은 국민학교 때였다. 그러고 보니 50년도 더 되었다. '쿠오레(Cuore)'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사랑의 학교>라는 부제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어로 '마음, 심장'을 뜻한다는 '쿠오레(Cuore)'보다는 나에게는 <사랑의 학교>로 남아있다. 어렸지만 책이 닳아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었다.

<사랑의 학교>는 4학년인 엔리코가 일 년 동안 학교와 집, 사회에서 보고 느낀 점,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일기이다. 책 앞부분에 등장인물 소개가 있던 것이 특이했다.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이 있어 한참을 읽다가 헷갈리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확인하며 읽어 외국어지만 이름을 거의 외었다.

엔리코를 보면서 일기 쓰고 싶은 욕심도 다졌다. 일기를 이렇게도 쓰는구나. 참 쉽네. 매일 일기장 앞에서 오늘은 무슨 착한 일을 했나? 어떤 반성을 해야 하나? 하던 고민을 조금은 덜게 했다.

무엇이 이 책을 읽고 또 읽게 했을까? 어린 마음에도 책 어디를 펼쳐도 따뜻했다. 그 따듯함이 착하고 슬픈 눈동자로 상대를 바라보는 서로의 시선이었음을 이번에 알았다. 또 어렸을 때는 엔리코의 친구들만 보였는데 이번에는 친구들의 아버지인 노동자, 귀족, 부자. 나무장수, 죄수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와 닿았다. 작가가 노동자나 가난한 이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음을 느꼈다. 진작 읽을 걸 후회가 됐다.

이래서 책을 읽고 또 읽나? 세계적 고전만 그런 줄 알았다. 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데미안>을 읽었다. 국어 선생님은 감동에 젖어 추천하셨지만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아니 이해가 안 됐다. 그저 잘난 척하기 위해 들고 다녔다. 그러다 20대 중반에 <데미안>을 스스로 찾아 읽으면서 엄청 울었다. 한 문장 한 문장 다 암기하고 싶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야금야금 읽었다.

이번에 <사랑의 학교>에서 가슴을 울컥하게 한 것은 엔리코 친구들이 아니었다. 어린 학생의 눈으로 본 학교생활 속에 있는 '사랑과 나눔'이었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친구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의 사랑이었다. 어렸을 때는 이 역할을 페르보니 담임선생님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엔리코 아버지와 엄마가 아들에게 하는 말 한마디, 작은 행동 등이 가슴을 울렸다.

"친구들과 작별 인사는 다 했니? 혹시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이 있다면 지금 용서를 빌고 오너라"라거나 "로비노 소방관께 인사드려라... 이 악수를 잊지 마라. 앞으로 너는 네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악수하게 되겠지만 저렇게 훌륭한 손은 흔치 않을 테니"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웠다.
 
내가 찍은 우리 중학교 사진.
 내가 찍은 우리 중학교 사진.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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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도 말했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선생님이며 최고의 친구인 우리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아버지는 내게 좋은 충고를 해 주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내가 더욱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수호천사인 우리 어머니. 다정한 어머니는 내가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고 내가 괴로울 때 함께 아파해 주셨다..." 

"무더운 날씨. 이럴 때 공부를 하려면 얼마나 많은 의지력이 필요한지 모른다.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는 게 슬프고 화가 난다. 하지만 학교에서 나올 때 지쳐 있지나 않은지 나를 살펴보는 어머니를 대하면 다시금 기운이 난다. 어머니는 내가 숙제를 한 쪽 할 때마다 '할 만하니?'라고 물으신다."

"늘 내 가슴에 있을 거야"

또 울음이 터졌다. 한빛이 떠난 후에는 이렇게 모든 게 다 한빛과 연결된다. 한빛은 엔리코만큼 엄마한테서 기운을 얻었을까? 나는 과연 몇 번이나 한빛의 표정과 마음을 읽었을까? 숙제할 때마다 "할 만하니?"하고 물었을까? "숙제했니? 아직도 안 했어? 낮에는 뭐 했어. 빨리해" 했을 거다.

한번은 한빛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컴퓨터게임이라고 해서 종일 하라고 한 적이 있다. 저녁때쯤 지쳤는지 거실로 나왔는데 얼이 나가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패닉상태였다. 

나는 이때다 싶어 "거봐. 힘들지? 그러니까 앞으로는..."하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밀어붙였다. 솔직히 스스로 깨닫게 한다며 종일 게임하라고 한 것도 어쩌면 나의 허울이었다. 내 기준과 내 판단으로 한빛을 조종하려고 했다. 조금 기다린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그런 엄마였다. 엔리코 엄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후들거렸다.

나는 한빛이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고 괴로울 때 함께 아파해 주었나? 한 손으로는 한빛 이마를 쓰다듬어 주고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다.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빛은 철저하게 마지막까지 엄마가 자신의 영혼에 심어 준 사랑에 감사한다고 했다. 나는 어쩌란 말인가?

학년말 페르보니 선생님이 했던 말은 내가 한빛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가끔 인내심을 잃고 화낸 일, 고의는 아니었지만 불공평하게 대한 일 그리고 너무 엄하게 대한 적이 있다면 용서해다오. 그리고 나를 꼭 기억해다오. 너희들은 늘 내 가슴에 있을 거야."

그러나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손을 잡을 수도 없고 기억해 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은데 한빛은 없다.

그렇구나. 한빛아, 엄마는 너를 가슴에서만 만날 수 있구나. 그러나 시와의 노랫말처럼 "다시 태어난 듯이 새로운 시간 새로웁게 살 거야." 너가 내 가슴에 있으면 항상 너와 함께 있는 거니까 엄마는 너를 매일 만나는 거네. 사랑해 한빛.

[관련 기사] 고 이한빛 PD의 엄마입니다 http://omn.kr/1kn3b

덧붙이는 글 | '새 이름을 갖고 싶어'는 가수 '시와'의 4집 노래 제목입니다.


태그:#시와, #이름, #사랑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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