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1 13:36최종 업데이트 20.08.0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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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과학(그것도 무려 마르크스주의) 분야, 아내는 미술 분야의 작가다 보니 여타 맞벌이 가족과 비교해 수입이 적은 편이다. 대략 외벌이 집과 맞벌이 집의 중간 어디쯤이 우리 집 수입이지 싶다. 언젠가 와인을 마시다 문득 마르코 복음서 12장 41~44절 내용이 떠올랐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와인교에 경전이 있다면 나는 신심을 인정받아 복음서의 한 귀퉁이에 기록되지 않을까. 재벌 3세가 데일리(daily) 와인처럼 마시는 '고오급' 와인을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만용에 가까운 용기를 내어 가까스로 마셔내니 말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작가로 사는 삶의 장점은 여타 직장인에 비해 흥미로운 경험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글이나 책을 쓰면, 그것을 썼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난다. 지난 6월 20일도 그런 날이었다.


그날 낮 12시경, 우리 부부는 서울교대역 인근의 모 음식점에 도착했다. 전혀 안면이 없는 분이 페이스북 메시지로 와인 모임에 초청했기 때문이다. 내 와인 연재 글을 재미있게 읽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와인 글을 연재한다는 게 무척 신기해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초청했단다.

참고로 나와 아내는 김영란법 대상이 아니다. 산해진미 주지육림 대접해봐야 아웃풋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 우리 부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선의'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 일인가. 그래도 빈손으로 가기는 민망해 집에 있는 내 책 몇 권을 들고 가서 모임 참석자에게 나눠드렸다. 글쟁이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

첫 번째 샴페인 병이 비워질 때쯤 오년지기가 되고 두 번째 부르고뉴 피노 누아의 막잔이 돌 때쯤 십년지기가 되었다. 한껏 불콰해진 낯빛으로 세월아 네월아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세 번째 와인이 등판했다. 바로 이놈!

트라피체 이스까이 말벡-카베르네 프랑 2015
Trapiche Iscay Malbec-Cabernet Franc 2015


아르헨티나 와인 제조사 트라피체(Trapiche)에서 포도 품종인 말벡(Malbec)과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을 각각 7:3의 비율로 섞어서 만든 와인이다. 이스까이(Iscay)는 제품명인데 잉카어로 '둘'을 의미한다니 아마도 두 품종을 섞어서 만든 것을 의미하겠지.
 

트라피체 이스까이 말벡-카베르네 프랑 2015 ⓒ 고정미

 

트라피체 이스까이 말벡-카베르네 프랑 2015 아르헨티나 와인 제조사 트라피체에서 포도 품종인 말벡과 카베르네 프랑을 각각 7:3의 비율로 섞어서 만든 와인이다. ⓒ 임승수

   
사실 이스까이가 등장했을 때 다소 당황했다. 이스까이는 와인 애호가에게 매우 인기가 많다. 와인 동호회 게시판에도 심심하다 싶으면 이스까이 맛있다는 후기가 보이고, 할인 판매 정보가 올라오면 매장이 어디냐고 묻는 댓글이 금세 달린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반응을 보면서도 이스까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말벡과 카베르네 프랑 때문이다.

우선 말벡부터 얘기하자면, 전에 말벡을 주품종으로 만든 와인 네 병을 마셨는데 모두 인상적이지 않았다. 좋다는 사람도 많은데, 한두 병도 아니고 네 병이나 그러니 말벡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밖에. 호불호 갈린다더니 나랑은 안 맞는구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심정이랄까. 이제 말벡은 안 산다고 내심 맘먹고 있었다.

카베르네 프랑도 아픈 과거가 있다. 작년 내 생일에 한껏 기대하며 마셨던 '고오급' 와인 샤토 슈발 블랑(Château Cheval Blanc) 2008 빈티지가 뼈아프게도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와인의 카베르네 프랑 비율이 무려 45%이었다. 2017년 12월에 마셨던 프랑스 루아르 쉬농 지역의 와인은 무려 카베르네 프랑 100%였는데, 그것도 취향에 안 맞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카베르네 프랑 비율이 높은 와인은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특히 샤토 슈발 블랑은 '고오급' 와인이 실패한 참교육의 순간이라 따로 연재글로 다루기도 했다.

[관련 기사: "이게 얼마짜린데..." 와인 선택 실패를 줄이는 방법]

그런데 트라피체 이스까이 말벡-카베르네 프랑은 마치 나를 조롱하듯 두 품종을 7:3 비율로 잔뜩 섞어놓은 것 아닌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일부러 피하던 와인이 떡하니 등장했는데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해서, 알코올이나 보충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텅 비우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오잉?????'

너무 맛있는 것 아닌가! 일부러 피하던 말벡과 카베르네 프랑을 콕 집어 섞어놨는데도 너무 맛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혹여나 얻어먹어서 맛있는 건 아닐까 싶어, 내 돈 내고 마신다고 최면을 걸며 마셨는데도 여전히 좋았다.

이런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내내 집에서 마셨다면 내 인생에서 이스까이를 접할 확률은 낮았을 것이다. 그 이후 7월에 한 번 더 마셨는데 역시 좋았고, 지금은 거실 셀러에서 언제든지 등판이 가능하도록 한 병이 대기 중이다.
 

이스까이 경험 전에 마셨던 말벡 네 병 좋다는 사람도 많은데, 나에게는 모두 인상적이지 않았다. 한두 병도 아니고 네 병이니 말벡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밖에. ⓒ 임승수

   
의외의 이스까이를 영접하며 몇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와인은 역시 비쌀수록 맛있다. 내 입맛에 안 맞는다고 홀대당한 말벡 네 병은 모두 이스까이보다 저렴하다. 이스까이는 와인 할인 행사 때에도 5만 원 정도는 줘야 살 수 있는, 나름 가격대가 있는 놈이다.

사람 혓바닥 참 간사하구나. 비싼 놈이 입에 들어가니 좋다고 바로 춤을 추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와인의 풍미와 가격 사이에는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이스까이를 통해 그 명백한 사실을 재확인했다.

둘째, 선입견은 언제든지 깨지기 마련이다. 말벡과 카베르네 프랑을 짬뽕한 놈 마시고 감동하니 말이다. 7:3의 비율로 섞인 두 품종이 서로의 빈곳을 잘 메워서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훌륭했다. 물론 다시 저가형 말벡이나 카베르네 프랑 비율 높은 와인을 마신다면 실망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내 코와 혀 세포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 품종을 선호하지 않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판단이 선입견일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둬야겠다. 이스까이 같이 맛있는 와인을 놓치지 않도록.

셋째, 인기 많고 재구매율 높은 와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몬테스 알파도 그렇고, 시데랄도 그렇고, 이번 이스까이도 그렇고. 와인 매장에서 뭘 살지 모르겠다면, 직원에게 재구매율 높은 와인으로만 추천받아도 실패율이 줄어들 것이다.

넷째, 가끔이라도 와인 모임에 참석해야겠다. 집에서 아내랑 둘이서만 마시면 아무래도 와인 경험의 폭이 제한적이다. 간만에 와인 모임 딱 한 번 참석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이스까이를 만나 경험치가 대폭 상승하지 않았나. 다수가 취향과 경험을 나누면 와인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피하던 품종에서 깨달음 얻다니,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하긴 공대 나와서 연구원 하던 내가 사회과학 저자로 살 거라고 생각이나 했는가. 이스까이 한 병이 인생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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