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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출신 가수 송창식은 매주 금·토요일 저녁 미사리 라이브 카페 ‘쏭아’에서 노래를 부른다. 지난 4월 9일 저녁 송창식이 공연을 하고 있다.
 인천 출신 가수 송창식은 매주 금·토요일 저녁 미사리 라이브 카페 ‘쏭아’에서 노래를 부른다. 지난 4월 9일 저녁 송창식이 공연을 하고 있다.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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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 하나 이렇게 밝혀 놓으셨나요/ 어느 별 어느 하늘이 이렇게/ 당신이 피워 놓으신 불처럼/ 밤이면 밤마다 이렇게 타오를 수 있나요~"

송창식(74), 그가 거기에 있었다.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 하나 가득 해맑은 미소로 송창식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실내가 쩌렁쩌렁 울렸다. 검은 패널의 통기타를 내려놓고, 양팔을 번쩍 들어올린 채 '피리 부는 사나이'를 불러줄 것도 같았다.

'담배 가게 아가씨', '우리는', '토함산'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테이블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 시간 동안 열 곡 정도를 열창한 그가 무대를 내려온 시각은 밤 9시 40분.

송창식은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 '쏭아'에서 매주 금·토요일 저녁에만 공연을 한다고 했다. 노래를 다 부르고 대기실로 들어가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 아이보리색 저고리와 밤색 바지 한복이 잘 어울렸다. 살이 오른 하얀 얼굴과 통통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이제 맑은 소리는 글렀어요. 내 목소리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 죽겠어요. 혹시나 판소리하는 사람처럼 변하면 새로운 음악을 할 수 있을까나."

어쩐지 목이 조금 쉬었다 했다. 1976년 성대 결절 수술을 받은 그는 3년 전 또 한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 뒤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양쪽 성대에 다 메스를 댔으니 더는 수술을 받을 생각이 없다. 운이 좋다면 새로운 목소리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데뷔 54년 지났어도, 매일 연습하는 가수

1967년 데뷔, 대중 앞에 선 지 54년이 지났건만 그는 여전히 음악에 목마르다. 매일 1시간은 기타, 1시간은 발성 연습을 하는 것은 음악적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다. "머리에 떠오르는 음이 '차~안' 하고 기타에서 나와줘야 하거든. 그런데 몸이 머리 말을 잘 안 들어. 그래서 그거 맞추려고 매일 연습하는 거예요."

송창식이 밤과 낮을 거꾸로 사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새벽 4시쯤 잠자리에 들고 오후 2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요즘은 치과와 내과에 다니느라 앞뒤로 1시간 오차 범위 내에서 왔다갔다한다. "일어나면 1시간 동안 화장실에서 책 읽고, 2시간 운동하고, 2시간 (음악) 연습을 해요. 오후 7시에 아침 먹고 새벽 1시쯤 점심 겸 저녁을 먹지요."

화장실에서 책을 읽는 것은 그렇다 치고, 운동 방법이 참 독특하다. 팬티 바람으로 2시간 동안 한 자리에 서서 뱅뱅 도는 것이 그가 하는 운동이다. "다 돌고 나면 땀이 비 오듯 하고 원심력에 의해 손가락 끝으로 피가 몰리지. 그런데 건강에 이보다 더 좋은 운동은 세상에 없어요."

그가 이 기묘한 운동을 시작한 건 27년 전이다. "1994년 3월 4일부터 돌기 시작했어요. 이왕 시작하는 거 1만 일을 채워야겠다 생각했지. 2024년이 1만 일이니까 아직 몇 년 더 남았어요." 송창식은 "2000년 전쯤 무예의 기본운동이 도는 거"였다며 "1만 일을 채우기 위해 그동안 외국도 안 다녔다"고 말했다.

송창식은 인천 중구 답동, 정확히 송도중학교 옆에 붙어 있던 집에서 1947년 태어났다. 땅이 많고 트럭도 몇 대 굴리며 운수업을 하던 부잣집이었다. 한국전쟁은 그러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 전사하셨어요. 어머니는 나와 여동생을 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집을 나가버렸어요. 내가 일곱 살, 동생이 네 살 때였지."
 
송창식이 매주 금·토요일 저녁 공연을 갖는 라이브 카페 '쏭아'
 송창식이 매주 금·토요일 저녁 공연을 갖는 라이브 카페 "쏭아"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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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담모퉁이, 독갑다리, 해광사, 팔팔로, 배다리 헌책방, 동인천 별 음악감상실... 송창식의 가슴 속엔 지금도 정겨운 고향의 모습들이 살아 숨 쉰다. "할아버지 집이 숭의동 독갑다리에 있었어요. 큰길로 나가면 벌판이었는데 미군 부대와 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요."

어려서부터 하모니카를 불고 노래를 곧잘 하던 창식은 미군들에게 인기 높은 '코리안 보이'였다. 창식이 부대 앞을 지나갈 때면 미군들이 불러 세워 연주와 노래를 시키고 초콜릿을 주었다. 그의 집안이 긴담모퉁이 뒷골목으로 이사한 때는 신흥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이다.

"이사한 집을 창신조라 불렀는데 똑같이 생긴 방이 여러 개 있었어요. 칸막이도 없이 여러 개의 구멍이 뚫린 공중화장실에서 한꺼번에 '볼일'을 봐야 하는 곳이었지요." 창신조는 개항 초기 부두의 하역 인력을 총괄하던 조직. 창신조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살던 적산가옥의 방 한 칸을 일곱 식구의 거처로 정한 것이다. 몸을 절묘하게 지그재그로 엮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그런 창식에겐 해방구가 있었으니 '음악'이었다.

한글을 깨친 여덟 살 때부터 창식은 음악책을 끼고 산다. 공부도 정말 잘했다. 3학년 이후 반장을 도맡았던 그는 당시 인천 최고의 명문 인천중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한다.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이 시험에 합격해야 갈 수 있는 학교였지만 1등으로 졸업하며 특례 입학한 것이다.

학교에선 '범생이'였지만, 동네에선 '껌 좀 씹는'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학교 가면 똘똘한 녀석들도 있었는데 동네 친구들은 시쳇말로 좀 노는 아이들이었거든. 해광사에서 맨날 싸움 얘기나 하고 시끄럽게 떠들다가 스님에게 쫓겨나기도 많이 쫓겨났지요."

"베토벤 앞에 있어도 무릎 꿇을 생각 없어요"
 
송창식은 지금도 하루 1시간은 기타, 1시간은 발성 연습을 한다. 송창식이 기타를 치고 있다.
 송창식은 지금도 하루 1시간은 기타, 1시간은 발성 연습을 한다. 송창식이 기타를 치고 있다.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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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 인천여상 강당에서 열린 오케스트라 연주에 감동을 받아 지휘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창식은 졸업할 때쯤 서울예고 진학을 선언한다. 난리가 났다. 학교는 창식을 제물포고로 진학시켜 서울대에 보낼 요량이었던 것이다. "인중-제고-서울대 진학이 정코스였거든. 선생님들이 제고 가서 서울대 음대 가면 된다고 했지만, 지휘자가 되려면 서둘러 음악 공부를 해야겠더라고."

필기시험에서 1등을 하며 창식은 덜컥 합격한다. 그러나 서울예고가 어떤 곳인가. 부유한 집안 자녀로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아야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아니던가. 동가식서가숙에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학교를 다니던 창식은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말쯤 중퇴를 한다.

그렇다고 지휘자의 꿈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창식은 이때부터 배다리 헌책방을 부지런히 오가며 독학을 한다. 갈라진 논이 단비를 빨아들이듯 클래식과 팝송, 국악과 화성악을 넘나들며 음악 이론서를 모조리 섭렵한 시기다.

스무 살이 되던 1966년, 창식은 종종 홍익대나 서울대 음대로 발걸음을 한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한테 밥 한 끼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대학생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서울대 배지를 달고 다녔어요." 캠퍼스 잔디밭에서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이따금 도강도 하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행운이 찾아온다.

"종로 세시봉이란 음악감상실 사장의 아들이 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 대학생의 밤이란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노래 불러보지 않겠냐고."

이때부터 '밥 동냥의 지겨움'에서 해방된 송창식은 '이론과 실력'이란 양 날개로 훨훨 날아오른다. 1968~1969년 트윈폴리오, 1974년 이후 솔로 활동을 통해 '불후의 명곡'들을 탄생시킨 송창식은 한 시대를 풍미한 뒤 1990년대 말부터 침묵에 들어간다.

"어느 날 보니 내 음악이 새롭게 등장하는 음악들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거예요. 새로운 음악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잠깐 숨을 고르기로 한 게 지금까지 왔네요."

송창식의 음악적 자존심은 대단하다 못해 꼿꼿하다. "저만의 음악이 있는 건 분명해요. 베토벤이 앞에 있어도 무릎 꿇을 생각이 없으니까."
 
공연을 마친 송창식이 '쏭아' 무대에서 특유의 웃음을 보내고 있다.
 공연을 마친 송창식이 "쏭아" 무대에서 특유의 웃음을 보내고 있다.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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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시 퇴촌에 사는 송창식은 직접 차를 몰아 고향을 찾곤 한다. 그렇게 연수구에 사는 여동생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친척이나 지인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는 인천이 음악적 모태이자 어머니 품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제 음악엔 하나도 빠짐없이 인천이 들어가 있어요.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를 가리켜 기인(奇人)이라 하는 것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송창식은 기인이 아닌 귀인(貴人)이다. 팝에 국악을 접목한 독창적이고 견고한 음악 세계를 창안한 천재다.

따뜻한 가슴과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인천 사람 송창식. 그는 언제까지나 고향을, 그리고 사랑을 노래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1년 5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송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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