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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은 일본 역사상 가장 절망스러운 새해의 순간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거듭된 치명적인 패배들 속에서, 전쟁 수행을 위해 반드시 사수해야 할 권역으로 설정됐던 '절대국방권'은 붕괴됐다. 특히, 연합함대가 궤멸돼 수상에서의 유의미한 작전수행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은, 태평양에서의 전쟁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르렀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고 종전의 활로를 찾는 대신, 급기야 탑승원의 사망을 전제로 하는 '특공'을 시작하며 최후의 발악에 돌입했다(관련 기사:"충성 빛나리"... 자국민 죽음 내몬 일본의 끔찍 '신화').

가미카제 특공대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1944년 말에 필리핀 레이테 섬을 탈환했다. '필리핀을 빼앗기면 일본은 말라죽고 만다' '필리핀의 다음은 일본 본토'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던 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에게 있어, 레이테 섬의 상실은 특히나 뼈아픈 손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리핀 북부의 루손 섬은 연합군의 일본 본토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와 같이 여겨졌다.

옥쇄
 
1945년 1월 9일 하루 동안 175000명의 병력이 상륙한 것으로 전해진다.
▲ 루손 섬에 상륙하는 미군 선발대 1945년 1월 9일 하루 동안 175000명의 병력이 상륙한 것으로 전해진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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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에 걸친 함포사격과 공습으로 일본군의 해안방어선을 무력화시킨 연합군은 1945년 1월 9일, 루손 섬 링가옌 만(Lingayen Gulf)에 대대적으로 상륙했다. 제국 일본의 존망이 걸린 이른바 '루손 섬 결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결전'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루손 섬 수비대는 연합군에 맞설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미 제공권과 제해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일본 본토로부터 보내지던 병력과 물자의 태반이 루손 섬에 닿지 못한 채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던 탓이었다. 그나마 비축된 전력들조차 앞선 레이테 섬 전투에 차출돼버린 탓에 루손 섬 수비대는 그야말로 맨주먹과 다름없는 상태로 연합군을 맞아야 했다.

미 해군의 어뢰공격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아 루손 섬에 발을 들였던 일본군 장병들은, 이제 더 큰 고난을 마주해야 했다. 단발식 소총을 든 빈약한 보병들로는 중화기로 무장한 연합군 상륙부대를 저지할 수 없었다. 몰아치는 포화 속에서, 전선의 붕괴와 수비대의 '옥쇄'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루손 섬 결전을 지휘하게 된 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 대장은, 일본군 수비대가 루손 섬 결전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루손 섬에서 연합군의 발을 최대한 오랫동안 묶어 둘 수 있다면 그만큼 일본 본토에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전 초기, 영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말레이의 호랑이'로 불렸던 야마시타 대장은 이제 승리가 아닌 '최대한 버티는 것'을 과제로 하는 '지연전'을 목표로 자신의 마지막 싸움을 구상하게 됐다. 
 
야마시타 대장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중화기 운용이 곤란한 산악지형으로 미군을 유인하여 지연전을 치렀다.
▲ 바레테 고개에서 포복전진하는 미군 야마시타 대장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중화기 운용이 곤란한 산악지형으로 미군을 유인하여 지연전을 치렀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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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타 대장은 최전선에서 옥쇄하는 대신, 연합군을 루손 섬 내륙의 산악지형으로 유인해 시간을 끌고자 했다. 산악지형에서는 전차 등의 중화기 투입이 곤란한 만큼 연합군의 물리적 우위를 반감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이 같은 전략에 따라, 일본군은 피해를 감내하면서도 천천히 북부 산악지대로 물러나 연합군의 주력을 끌어들였다.

야마시타 대장의 전략은 합리적인 것이었지만, 문제는 보급이었다. 상술한 제공권과 제해권의 문제로, 루손 섬 수비대는 본토로부터 그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조선인 출신의 홍사익(洪思翊) 중장이 병참감을 맡아 필사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으로 싸움을 이어나가는 것은 초인적인 인내를 요하는 것이었다. 이에 야마시타 대장은 '자활자전 영구항전(自活自戦 永久抗戦)'이라는 방침을 내세웠다. 즉,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해 스스로 싸우며 끝까지 버티라는 뜻이었다. 일선 장병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됐지만, 일본 본토를 위해 버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야마시타 대장은 그 끔찍한 고육지책을 감내했다.
 
"부상 당하면 금세 구더기가 꼬입니다. 그리고 파리가 붕붕 날아다니죠. 그럼 그 구더기를 집어서 딱 딱 씹어먹는 것이죠."
▲ 루손 섬의 보급난에 대해 증언하는 이구치 미츠오 씨(2012년 인터뷰 당시 88세)  "부상 당하면 금세 구더기가 꼬입니다. 그리고 파리가 붕붕 날아다니죠. 그럼 그 구더기를 집어서 딱 딱 씹어먹는 것이죠."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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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루손 섬 수비대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도, 루손 섬 결전을 국민들에게 대대전으로 선전했다. 지난날 싱가포르를 함락시키며 국가적 영웅으로 올라선 야마시타 대장이 일본 본토의 코앞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전의를 북돋을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급기야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총리는 루손 섬 수비대가 방어에만 급급하다며 육군참모총장을 채근하기에 이르렀다. 즉, 루손 섬 수비대가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어전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본토의 명령에 따라, 일선 부대에서는 '키리코미(斬り込み)'라는 이름의 무모한 공격을 시도해야 했다. 이들은 군도, 총검, 수류탄 등의 빈약한 무기를 들고 연합군 진영에 돌격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부상병들 역시, 의약품 부족으로 인해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광산에 마련된 야전병원의 어둠 속에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병기는 마모됐고 탄약은 소진됐으며, 식량은 바닥이 났다. 굶주린 장병들은 '자활' 지침에 따라 스스로 먹을 것을 구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울부짖는 필리핀 현지인들로부터 식량을 빼앗았다. 장병 개개인은 이 약탈행위로부터 죄책감과 동요를 느끼기도 했지만, 당장 오늘 현지인의 식량을 빼앗지 않고서는 자신들이 아사하게 될 판국이었다.

일본군의 거듭된 약탈에 분노한 필리핀 현지인들은 급기야 항일 게릴라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연합군으로부터 무기와 훈련 등을 제공받은 이들은 일본군을 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일본군은 게릴라 소탕을 명목으로 현지 부락들을 초토화시켰고,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부터 현지인들의 항일의식은 더욱 깊어졌다. 끊을 수 없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관련기사:개전 80년, '대동아 전쟁' 신화가 청산돼야 할 이유).
 
"'저 부락은 게릴라의 부락이니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모조리 죽여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 한명이라도 남겨두면 곤란하다고 모두 죽여버리는 겁니다. 말하기조차 부끄럽지만, 여자에게는 '엉덩이를 내밀어라, 그럼 살려주마'라고 희롱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군대, 우리의 군대가 그렇게 사람을 죽였습니다. 끔찍하다고 생각했지만, 저보다 2년 위의 선임이 있으니 불평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 게릴라 소탕전의 참상을 증언하는 타카다 겐이치로 씨. (2010년 인터뷰 당시 88세) ""저 부락은 게릴라의 부락이니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모조리 죽여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 한명이라도 남겨두면 곤란하다고 모두 죽여버리는 겁니다. 말하기조차 부끄럽지만, 여자에게는 "엉덩이를 내밀어라, 그럼 살려주마"라고 희롱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군대, 우리의 군대가 그렇게 사람을 죽였습니다. 끔찍하다고 생각했지만, 저보다 2년 위의 선임이 있으니 불평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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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기아와 질병, 현지 게릴라를 상대로 무너지고 있는 사이, 연합군은 일본군 사령부가 위치한 바기오(Baguio)로 바짝 진격해 들어왔다. 연합군을 저지할 수단이 없던 일본군은, 보병이 폭탄을 안고 적 전차로 뛰어드는 '육탄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본토에서는 '국운을 건 결전'으로 선전되고 있던 루손 섬에서의 싸움은, 이미 일반적인 범주의 전투라고도 부를 수 없는 것이 돼 있었다.

1945년 4월 23일, 결국 바기오는 연합군에 의해 함락됐다. 이때는 이미 일본 본토인 이오 섬이 함락되고 오키나와에서까지 전투가 이어지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일본 본토를 위해 시간을 벌겠다는 지연전의 취지는 그 빛을 잃게 됐다. 그러나 야마시타 대장은 바기오의 함락에도 포기하지 않고 항전을 지속하고자 했다.

바기오 북쪽의 산악지대로까지 물러난 일본군은, 기아의 질병, 연합군의 포화에 시달리며 밀림 속을 방황했다. 전략적으로 무의미해진 그들만의 지연전은, 천황의 항복 선언이 있고서도 한 달이 더 지나서야 비로소 끝났다.

NHK에 따르면, 이 루손 섬 결전에서 30만 명의 일본군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는 태평양의 각 전장들을 통틀어서도 최고 수치이다(NHK<戦争証言 兵士たちの戦争>2012.3.4). 굶주림과 질병에 지쳐 죽어간 불쌍한 청년들, 혹은 필리핀 주민들을 빼앗고 죽였던 흉악한 범죄자들. 전장의 극한에서 인간성마저 상실한 채 끔찍한 말로를 맞은 일본군 장병들은 한때,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교수대로 향하기 전 "전 인류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야마시타 대장은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영국군을 상대로 한 말레이 반도 전역을 대승으로 이끌어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러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벌 싸움에 밀려 전쟁 내내 일본군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후 '루손 결전'의 임무를 맞게 된 야마시타 대장은 8개월에 걸친 지연전을 지휘했다.
▲ "루손 결전"을 지휘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 야마시타 대장은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영국군을 상대로 한 말레이 반도 전역을 대승으로 이끌어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러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벌 싸움에 밀려 전쟁 내내 일본군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후 "루손 결전"의 임무를 맞게 된 야마시타 대장은 8개월에 걸친 지연전을 지휘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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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지휘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연합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2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수대에 오르기 40분 전, 그는 장병들의 희생과 침략전쟁의 책임에 대해 '전 인류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고 자책하며 장문의 구술을 남겼다. 특히 그는, 이 같은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를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본의 미래에 대해 이와 같이 당부했다.
 
"포츠담 선언으로 일본이, 현명하지 못한 계획으로 일본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군벌지도자는 일소되고, 민의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에 의해 평화국가로의 재건이 시급하겠지만, 앞날은 갈수록 다사다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건설로 가는 길에 안이한 길은 없습니다. 군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온갖 곤궁과 고통, 결핍을 견뎌낸 그 10년 간의 전쟁체험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무엇인가를 남겨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신일본 건설에는, 우리와 같은 과거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직업군인 또는 아첨과 추종을 하는 무절제한 정치가, 침략전쟁에 합리적 기초를 부여하고자 한 어용학자 등을 결단코 참가시켜서는 안 됩니다."

태그:#일본군, #필리핀, #루손 섬, #아시아 태평양 전쟁,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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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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