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포스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포스터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처음부터 확 '땡기는' 뭔가가 있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내 삶에 붙어있는 '해방'이라는 단어가 드라마 제목에 들어있어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눈길을 줬을 것이다. 단조롭고 황량할 정도의 느낌을 줄 정도로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 사이로 튀어나오는 멘트들이 구미를 당겼다.
 
흰자위의 사람들
 
무엇보다도 계란의 비유가 내게 꽂혔다. 서울이 노른자고 주변을 둘러싼 경기도는 흰자라는 표현이 묘했다. 노른자는 생명이 되고 흰자는 그 생명에게 영양분을 공급한다. 서울은 한국 자본주의의 심장이 되고 경기도는 서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럼 경기도 밖의 지방은 착취 당하는 자원일까. 흰자는 영원히 노른자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소외와 배제의 느낌이 든다. 그럼 해방은 수도에 진입하는 '인(in) 서울'일까. 어차피 노른자와 흰자를 드러낸 계란은 생명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먹잇감이다.
 
오랫동안 경기도에 살고 경기도에서 활동하면서 느낀 경기도의 애매함이 떠올랐다. 지방도 서울도 아닌 흰자는 노른자에 대한 흰자의 열등감을 만드는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는 파리에 대한 열등감이 없는 프로방스(지방)에서 창조적 예술이 탄생했단다. 서울과 지방에 낀 처지가 아니라 두 쪽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면 혹시 창조성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직 피라미드처럼 서울 제국에서 식민지가 된 지방이 차라리 서울에 대한 열등감을 잊어버릴 수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경기도는 열등감이 클 수 있다.
 
갑질해대는 정규직 직장상사에 대해 영혼 없이 대응하는 또 하나의 '소울리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주인공을 통해 요란하지도 않고 신파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절망적으로 비극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서울로 출근하는 전철과 한잔했을 때면 택시로 퇴근하는 어쩌면 지극히 딱딱한 일상의 껍질을 고집스럽게 보여주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꾹 누르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역설적으로 드러나게 한 것은 아닐까.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나
 
무엇으로부터 해방이며 무엇이 해방이며 어떻게 해방된다는 것인가. 드라마는 주인공들을 통해서 오가는 이 질문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도, 강렬한 전투도, 짜릿한 결말도 속 시원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아비에 억눌려 소심한 저항을 일삼는 아들놈에게 비싼 외제 차 타고  달리는 것이 해방일까. 그렇다 해도 지극히 세속적이고 흔한 욕망이다. 매우 상투적인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관리하던 그는 결국 편의점 삶을 이어간다. 이게 속박일까 아니면 결국은 해방일까. 나는 이런 아들이나 남자에 대해서 별로 공감을 주지 않는 대신, 배우 이엘에게는 매우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의 배역에 대해서는 말을 보태고 싶지 않다.
 
이 드라마 덕분에 유행한 '추앙'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원과 용법을 열심히 찾아 해부하는 사람도 있구나. 게다가 호스트바 관리하는 '깡패 새끼'를 추앙하는 것이 말이 되냐며 도덕을 깐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도 있다. '깡패 새끼'라고 삶의 고뇌가 없던가. 틈만 나면 술 처먹고 소주병 가득 쌓아놓는 그의 삶을 조금이라도 읽었다면 이렇게 평가할 수 있을까.
 
작가는 어이없게도 갑자기 딸들과 아들의 엄마를 죽여버린다. 여동생 챙기는 남편과 해방되지 못한 아이들의 그럭저럭 고통스럽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바라보고 돌보던 엄마는 갑자기 죽어버린다. 평생 살림과 농사 노동이며 남편의 보조 노동을 하던 엄마의 죽음이 속절없기만 하다. 어쩌면 속박된 일상에서 가장 확실한 해방은 죽음인지도 모른다. 기가 막힌 것은 엄마가 죽고 나서야 해변으로 여행을 떠난 아이들과 남편의 뒤늦은 후회다. 역시 인간들은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는 걸까.
 
라떼 너무 싫다
 
이 드라마의 작가 박해영의 예전 드라마인 〈나의 아저씨〉가 종영된 후에 몰입해 본 적이 있다. 이때도 내 주변에는 '아저씨 동화'라는 혹평이 있었지만, 푹 빠진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의 해방일지〉도 시청률은 별로라고 했지만, 주변에서는 보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도 이 드라마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듣게 되곤 했다. 심지어 오래전의 내 수배 생활을 떠올리며 '나의 수배일지'나 옥고를 치른 후배에게는 '나의 감방일지'를 써보는 것이 어떠냐는 얘기도 들었다.
 
라떼가 우유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든 커피에 다양한 방식으로 섞은 밀크셰이크를 의미하든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오랜 도바리(수배 생활)로 신경성 위염에 시달리던 위장에 커피를 붓는 것은 고통이었기에 30여 년간 커피를 싫어했다. 더구나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민주화운동 경력 따위를 민주당식의 정치에서 지겹도록 보아왔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운동권 시절의 미몽만 가득 남았을 뿐 체제 안에 진입하기 위한 경로로 들어서서 안간힘을 쓰는 진보정당과 지나버린 시절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동권들에게서 보아온 구린 스토리들이 싫다.
 
과거를 부정해버리면 삶은 송두리째 열등감의 쓰레기통으로 처박힌다. 그래서 과거는 과거대로 인정하고 한계는 한계대로 보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라떼보다 훨씬 더 통렬한 성찰을 통해 현실 자체를 번뇌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해방이든, 너의 해방이든 문제는 지금 이 순간 혹독한 사회 꼴이다. 얄팍한 자존심을 넘어설 야무진 자존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라떼를 버리고 지금 여기에 집중할 것이다. 어쩌면 가장 긴급한 것은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라떼로부터의 해방'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조건준 아유 대표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7, 8월호 '드라마 만나기' 꼭지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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