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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시사멘터리 추적>이 지난 달 방영한 '얼굴들, 학살과 기억 편'.
 KBS <시사멘터리 추적>이 지난 달 방영한 "얼굴들, 학살과 기억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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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국가폭력 및 인권이라는 지점에서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는 주제다. 베트남 전쟁의 참전을 옹호하는 측에선 박정희 정부 시대 단행된 베트남 파병이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논리로 접근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그 나라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사실에는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해선 1990년대부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국내에서 활발해졌다. 한베평화재단 등은 평화기행 같은 활동을 통해 참회를 요구하는 행보를 보였다.

학살을 경험한 피해자는 살아 있다. 지난 8월 퐁니퐁넛 학살의 피해자인 응우옌티탄(학살 당시 8세)씨와 남베트남군으로서 직접 학살을 목격했던 응우옌득쩌이(학살당시 28세)씨가 한국을 방문해 법정에서 학살을 증언했다. 전쟁 피해자가 버젓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부정할 수 없으며, 한국 사회와 정부의 반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베트남에서 한 행동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는 10월 7일 <한국일보>의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베트남인 학살 배상 소송 저지 방안'을 알아본 정부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로,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아 한국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진행중인 응우옌티탄씨가 지난 8월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과 국방부앞에서 진실을 밝히고, 학살 책임 인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로,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아 한국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진행중인 응우옌티탄씨가 지난 8월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과 국방부앞에서 진실을 밝히고, 학살 책임 인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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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숨기고 부정하려는 행동에 착수한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한국일보>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 확산을 막기 위해 베트남에서 법리 검토를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정리하면, 베트남 학살 피해자들이 조직적으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지난 7월 국내 A로펌 베트남 본부에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해 베트남 정부나 민간이 소송을 낼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소송을 한다면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를 문의한다"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일보>는 베트남 정부가 한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비공식 채널을 통해 항의의 뜻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 정부가 사과를 했지만 베트남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그러나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열자'는 기조로 한국군 학살에 대한 문제제기를 공식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양국의 경제적 협력과 문화증진을 추진하는 차원에서 잠시 주제를 돌리자는 맥락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전쟁범죄란 역사적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반성과 참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과오를 덮으려는 행위를 했으니, 베트남 정부 입장에선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항의는 당연하다.

역사를 숨기려 하나
 
한국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베트남의 주요 관광지인 다낭에서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다. 이 사진은 글쓴이가 베트남에 갔을 때 직접찍은 사진이다.
▲ 퐁니퐁넛 학살 위령비 한국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베트남의 주요 관광지인 다낭에서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다. 이 사진은 글쓴이가 베트남에 갔을 때 직접찍은 사진이다.
ⓒ 김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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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는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 두 나라는 외세의 식민지 지배와 외세에 의한 분단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현대사를 보면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대구 10.1 사건이나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국민 보도연맹 학살 그리고 거창양민 학살과 노근리 학살 등의 비극적인 국가폭력의 역사가 있었다.

베트남 또한 마찬가지다. 1954년 미국에 의해 분단된 베트남은 미국의 꼭두각시 정부인 응오딘지엠 정부 하에서 적잖은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이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됨에 따라 소위 '자유사격지대'라 불리는 곳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당했다. 민간인과 베트콩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과 남베트남 그리고 한국은 전선이 없는 제주 4.3 사건을 경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자행됐고, 퐁니퐁넛 학살과 같은 참극이 벌어졌다.

만약 윤석열 정부가 시도했다는 '베트남인 학살 배상 소송 저지 방안'이 실행된다면, 우리 역사에 그 자체로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한국 정부의 행각은 한국과 베트남 양국 사이의 외교적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격전지였던 곳엔 아직도 한국군 증오비가 있고 학살피해자들의 위령비가 있다. 그 지역에 사는 베트남인들이 그런 것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베트남인들이 한국군의 만행을 잊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베트남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의지가 없다는 속내를 내비치며, 시대역행적 행위를 했다는 건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무책임한 행동이다. 이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지 이제 50년이 지났다. 반 세기가 지났지만, 피해자들의 아픔은 여전하다. 그 아픔 앞에서 참회는커녕 정부가 나서서 과오를 지우려는가.

태그:#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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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전공자입니다. 사회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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