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9 17:46최종 업데이트 23.06.1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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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5일 경기 포천 승진훈련장에서 '2023 연합·합동 화력격멸훈련'을 주관한 뒤 천무, 천궁 등의 무기를 관람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권에는 세 명의 국부가 있다. 각각의 분야에서 국정 운영의 모델이 되는 세 명의 전직 대통령이 있다.

국내 관계에서는 전두환이 모델이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가 되기 전인 2021년 10월 19일 부산 해운대구에서 "전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 잘했다는 분들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게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윤 정권은 노동 탄압, 언론 탄압, 통일운동 억압, 시민단체 탄압 등에서 전두환 정권을 연상시키고 있다. 윤 대통령이 지난 5일 '시민단체 보조금에 대한 단죄와 환수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하자 국민의힘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에 대한 경찰 수사를 의뢰한 사실은 윤 정권이 전두환을 본받다 못해 이제 이성까지 잃고 있다는 느낌을 줄 만하다.

윤 정권은 한일관계에서는 김대중을 모델로 내세운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가 되고 엿새 뒤인 2021년 11월 11일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을 방문하기 직전에 페이스북 글을 남겼다. 1998년 10월 8일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거론하며 "우리나라 현대사에 그만큼 한일관계가 좋았던 때가 없었다"라고 쓴 글이다.

윤 정권은 작년 5월 출범 이후에도,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입각해 한일관계를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수시로 피력했다. 하지만, 윤 정권이 복원했다는 한일관계는 김대중 집권기가 아닌 박정희 집권기와 흡사하다.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시다 유코 여사가 7일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 전용기에서 내리고 있다. 2023.5.7 ⓒ 연합뉴스

 
김대중 내세우며 박정희 따르는

김대중 정권은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 중에서 사과를 관철했다. 오부치 총리로부터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표명을 받았다. 반면, 윤 정권은 배상은 물론이고 사과조차 받지 않았다. 사과·배상 없이 한일관계를 굴욕적으로 복원한 박 정권의 전철을 답습하고 있다.

1965년 언론보도와 최근 언론보도의 비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윤 정권과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는 방식은 박 정권 및 사토 에이사쿠 내각과 거의 비슷하다. 역사문제를 경제문제와 뒤섞는 그랜드 바겐 방식을 표방하다가 역사문제를 협상 테이블에서 슬며시 밀어내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또 한국인들의 격렬한 반대 때문에 한일협정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박정희를 독려할 목적으로 사토 내각이 일본 초청 카드를 꺼내든 모습도 지금과 흡사했다. 일본이 식민 지배를 배상하지 않는 대신에 미래세대를 위한 장학금 지원을 약속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유사 사례를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처럼 윤 정권이 한일관계 모델로 삼는 것은 실제로는 박정희 집권기다. 박정희와 한일협정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의식해 박정희를 내세우지 못하고 엉뚱하게 김대중 이미지를 희생시키고 있다. '친부'가 부끄러워 '남의 아버지'를 친부인 양 주장하는 셈이다. 굴욕적인 한일관계를 반대하는 국민의 상당수가 김대중을 좋아한다는 점도 이런 선전전략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윤 정권의 모델이 누구인가와 관련해 세 번째로 살펴볼 분야는 한일관계를 제외한 나머지 국제관계다. 이 나머지 국제관계에는 북한도 포함돼 있다. 윤 정권은 북한을 외국 혹은 이민족처럼 대하다 보니, 통일부도 대북 외교부처럼 운영하고 있다.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마치 동족 국가를 대하듯 허물을 감싸 안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한일관계도 국제관계의 일부가 돼야 하지만, 이 때문에 윤 정권의 국정 운영에서는 한일관계와 여타 국제관계가 별도로 작동하는 듯하다. 그래서 윤 정권의 국제관계는 한일관계와 분리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윤 정권은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 '김대중(실제로는 박정희) 시절의 한일관계가 좋았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국내관계와 한일관계에서 누구를 모델로 하는지가 쉽게 드러나는 반면, 국제관계에서는 모델이 누구인지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현상이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는,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도 대결적 자세를 취하더니 이제는 러시아마저 적으로 돌리는 윤 정권의 냉전주의적 모습이다. 또 하나는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이념적 기초로 만들 목적으로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행보다.

이승만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이 반공을 앞세워 냉전질서를 운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한국 기득권층에 이익을 나눠줬기 때문이다. 윤 정권이 이승만을 띄우려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이승만식 냉전 이념으로 무장시켜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에 적응시키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윤 정권이 '이승만이 대외관계는 잘했다', '이승만 때의 대일관계가 가장 좋았다'라고 자신 있게 표방하지 못하고, 이승만기념관부터 건립하고 보겠다는 우회 전략을 구사하는 이유는 헌법 전문에 들어 있다. 헌법 전문이 이승만을 끌어내린 '4·19 민주이념'을 높이 숭상하는 상황에서는, 이승만을 대외관계의 모델로 공식화하는 일이 힘들 수밖에 없다. 국가보훈부의 활동은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윤 정권이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러시아에 대해서까지 적대적 자세를 취하는 것은 바이든 정권이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전의 냉전질서로 미국이 회귀하고 있다는 판단이 윤 정권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래서 이승만을 띄우려는 집념이 윤 정권에서 나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2년 11월 14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부대행사에서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미국도 윤 정부와는 반대로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분명히 겉으로는 신냉전을 연상시키는 대결적 태도를 취하면서 동아시아 동맹국들을 결속시키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지향하는 질서가 과거의 냉전과 똑같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최근 들어 자주 나타나고 있다.

냉전시대의 상당수 국가들이 상대 진영과 담을 쌓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진영과 소련 진영의 경제가 상당 수준으로 격절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에는 진영 내부의 교역만으로도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었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외교 이전에 한국 기업들이 대외무역으로 큰돈을 벌 수 있었던 데는 그런 요인도 작용했다.

그런데 지금의 미국이 그런 냉전질서를 복원시키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대결적 자세를 취하다가도 중국과의 대화 채널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이 16일로 예정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일이다.

최근 미중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미국은 대화에 집착하는 반면 중국은 여유를 보이며 '밀당'을 한다는 점이다. 지난달 28일 중국이 미국과의 국방부 장관 회담을 거절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최근 들어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유난히 강조하는 것도 중국 경제와의 디커플링 반대 혹은 탈동조화 반대다. 지난 8일 중국과의 협력을 희망한다고 표시한 그는 13일에도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서 중국과의 경제적 단절은 "큰 실수"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중국과의 경제적 단절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과거 냉전질서의 복제가 아닐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진영과 진영 간의 경제적 장벽이 높았던 냉전시대로 회귀하고자 한다면, 재무장관이 나서서 디커플링 반대를 거듭 외치는 일이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동일한 양상이, 미국과 더불어 서방세계의 주축을 형성하는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월 6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반대한다고 명시적으로 발언했다. 이달 5일 독일 집권당인 사민당의 라스 클링바일 대표는 중국에 대한 공급망 디커플링을 반대한다고 중국 총리 면전에서 발언했다. 신냉전의 깃발을 높이 들고 1990년대 이전으로 힘차게 달려가는 윤석열 정권이 과연 제정신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현상들이다.

미국이 신냉전을 추구하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중국과의 경제적 유대를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현실은 윤 정권이 국제관계의 모델로 삼아야 할 인물이 이승만이 아님을 시사한다. 미국이 추구하는 모델이 1950년대 국제질서가 아닌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친미진영과 주로 교역하면서 공산진영과의 관계도 함께 모색한 노태우 집권기를 모델로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국가를 운영하는 집단이 누구를 국정 모델로 삼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델을 잘못 채택하면 국정 운영이 크게 뒤틀릴 수도 있다.

국내관계에서는 전두환, 대일관계에서는 김대중(실제로는 박정희), 국제관계에서는 이승만을 모델로 삼는 윤석열 정권의 국정운영전략은 전면 수정돼야 한다. 대일관계에서는 김대중이 아니라 박정희를 모델로 생각하고 있다고 솔직히 밝혀야 한다. 국제관계에서는 이승만 이외의 다른 모델을 물색해야 한다. 국내관계 모델도 당연히 교체해야 한다.

집권 1년이 넘도록 국정운영 모델을 솔직히 밝히지 못하거나 모델을 올바로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정권이 실패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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