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06 10:15최종 업데이트 23.08.07 12:26
  • 본문듣기
[기사 수정 : 7일 오후 12시 26분]
 

지난 7월 6일 화성시청 본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근대음악전시관(홍난파기념관) 건립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화성시민신문

 
윤석열 정부의 대일 굴욕외교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지지율뿐 아니라 우리 사회 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독교 극우세력이 고무되고 있을 뿐 아니라, 친일청산 추진에 방해가 되는 움직임도 힘을 얻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한 장면이 경기도 화성시에서 나타나고 있다.

윤 정부가 전범기업의 강제징용 배상책임을 떠안겠다고 선언(3.6)하고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와 러브샷(3.16)을 한 뒤인 지난 3월 20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행정복지센터에서 '근대음악전시관 건립사업 추진위원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정희준 추진위원장이 만장일치로 선출되고 부위원장 5인과 상임위원 5인이 함께 선임됐다.


이들이 추진하는 근대음악전시관 사업에 대해 화성 시민단체들은 반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화성여성회, 화성민예총, 광복회 화성시지회 등이 민족문제연구소, 기억과연대 등과 연대해 7월 6일 근대음악전시관 반대 시민모임을 결성했다. 보도에 따르면, 시민모임은 "극심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며 전시관 사업의 철회를 촉구했다.

논쟁의 초점인 '근대음악전시관'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근대'다. 전시관을 추진하는 측이 생각하는 근대 음악은 친일파 홍난파(홍영후)의 음악이다. 홍난파를 숭앙하는 사람들이 그를 '근대 음악'과 연계시킨다는 점은 1998년 3월 31일 자 <경향신문> 에 실린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 홍난파 탄생 100주년 대음악회'라는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이 기사는 "한국 근대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민족 음악가"로 홍난파를 평가했다.

위 시민모임은 전시관 건립을 추진하는 핵심 인물들이 홍난파 기념사업과 관련됐다고 지적한다. 발족식 때 시민모임은 성명을 통해 "지난 3월, 오랫동안 홍난파 기념사업에 관여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 가칭 근대음악전시관을 건립하자면서 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고 지적했다.

위에 거명된 정희준 추진위원장은 '홍난파 전도사'로 불린다. 그에게는 홍난파와 관련된 명함이 많다. 난파음악상을 수여하는 난파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는 그가 운영이사로 기재돼 있다.

2020년 5월 22일 자 <화성신문>에 실린 '[원로 인터뷰] 정희준 (재)송호·지학장학재단 이사장' 기사는 "정 이사장은 홍난파 사업에도 혼을 담은 정성을 쏟고 있다"며 "사단법인 난파합창단 초대 이사장과 난파생가기념사업추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고, 난파의집 이사, 난파생가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한국예술가곡보존회 명예회장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인터뷰 말미에 "남은 인생의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난파 생가 기념사업의 완성"이라고 답했다. 지금 그가 추진하는 근대음악전시관 건립이 친일파 홍난파를 위한 일이라는 점이 이런 데서도 명확해진다.

제국주의에 굴복하고 부역한 인물

홍난파는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같은 가사에 선율을 붙였다. 그가 작곡한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등은 많은 한국인들의 뇌에 입력되고 입에 붙어 있다.

그의 음악이 한국인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 역사를 모독하는 일이다. 그는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한국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일본에 굴복했다. 제국주의에 맞서다 희생된 모범적 인물들이 한둘이 아닌데도, 하필이면 제국주의에 굴복하고 부역한 인물을 숭상하는 것은 화성시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

홍난파는 대한제국 시절인 1898년 4월 1일 서울 또는 경기도 남양군에서 태어났다. 도쿄음악학교, 도쿄고등음악학원(지금의 구니다치음대), 미국 셔우드음악학교를 거쳐 1930년대 초반부터 식민지 한국에서 활동한 그는 민족주의 단체인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후반에 뜻을 꺾고 친일 음악인으로 전향했다.

그의 친일은 일제에 대한 굴복의 표방이었다. 1937년 11월 일본어로 작성한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이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홍난파 편에 원본 사진과 함께 제시된 전향서는 그가 일본에 대해 어떤 맹세를 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이 있는 필자는 그 동기 여하와 그 활동 유무를 막론하고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민중의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제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상 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앞으로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 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음악가나 작가 등은 자신의 정신적 산물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한다. 그것이 생계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홍난파는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쪽에 섰던 지난날을 두고 '후회가 막급하다',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꾸겠다' 등등의 말을 했다. 이런 정신의 소유자로부터 우리 사회가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지 다시금 따져보게 된다.

그의 작품 활동은 그 맹세와 잘 부합했다. <황국 정신으로 돌아가서> <부인 종군의 노래> <국민 총력의 노래> <모두 병사다, 탄환이다> <출정 병사를 보내는 노래> <이겼다 일본> 등에 곡을 붙이거나 연주를 지휘했다. 일본군국주의를 응원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들이다. 그가 참여한 음악회의 수익금은 전쟁 성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억지로 친일을 한 게 아니었다. 이 점은 1940년에 '일본 건국 2600년' 현상 공모에 지원한 데서도 느낄 수 있다. 전쟁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이 행사에 <순정의 꽃 장사>를 출품해 당선됐다. 억지로 하는 친일이었다면, 자발성이 요구되는 응모전에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 본보기로 세울 수는 없다
 

서울 홍파동에 있는 홍난파 가옥 ⓒ 위키미디어 공용


홍난파는 친일단체에도 가입했다. 전향서를 쓰기 6개월 전인 1937년 5월에는 조선문예회에 가입했다. 한국 친일파 연구의 기초를 닦은 역사학자 임종국은 한일협정 이듬해인 1966년에 펴낸 <친일문학론>에서 조선문예회의 친일적 성격을 지적했다.

그는 "조선문예회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최남선·이광수·김영환 및 경성제대 교수 다카기 이치노스케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고 설명한다.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은 식민지 한국의 예술과 풍속을 '대일본제국'에 맞게 '교화'하는 것이었다.

1938년에는 수양동우회 출신들과 함께 대동민우회에 가세했다. 일본과 한국의 통합인 내선일체를 추구하는 단체였다. 또 전쟁 동원을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문화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일본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음악뿐 아니라 언론 기고를 통해서도 증명됐다. 1940년 7월 7일 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사변 3주년과 반도문화의 여명'은 그가 일본을 상대로 '간지러운' 말들을 얼마나 잘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기고문은 "이번의 성업이 성취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곡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낼 날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라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후방 국민으로서 음악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운동에 용감하게 매진할 것을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역설했다.

그런 친일 활동은 그에게 수익을 안겨주었다. 언론 기고나 응모전 당선 등이 친일 재산을 발생시켰음은 물론이다. 그가 만든 친일 노래는 레코드로 발매됐다. 그것 역시 친일 재산을 발생시켰다.

1993년에 발간된 <친일파 99인> 제3권에 실린 노동은 목원대 교수의 기고문 "홍난파: 민족음악 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는 그가 만든 <애마진군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1939년 1월에는 6개에 이르는 일본의 레코드 회사가 이를 녹음하여 발매하기도 하였다"고 설명한다. 다른 작품들도 많았으므로 이런 데서도 친일 재산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일제에 굴복해 친일음악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수익을 발생시킨 홍난파다. 이런 인물이 화성시민들의 표상이 될 수 없고 대한민국의 귀감이 될 수 없음은 명확하다. 설령 억지로 친일을 했다고 가정할지라도, 인류를 착취하는 제국주의에 그처럼 노골적으로 굴복한 인물을 우리 사회의 본보기로 세울 수는 없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