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국민배우'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안성기와 1987년 베니스영화제 여주주연상에 빛나는 '원조 월드스타' 고 강수연 같은 예외도 있지만 아역배우가 성인배우로 성공하긴 결코 쉽지 않았다. 실제로 아역시절 놀라운 연기와 귀여운 외모로 사랑 받았던 많은 아역배우들이 성인이 된 후 이미지를 바꾸지 못해 고전하거나 배우생활을 일찍 접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양동근과 김민정, 문근영처럼 성인배우로 성공한 아역 출신들이 꽤 등장했다. 현재는 김유정과 김소현, 박은빈, 이세영, 유승호 등 아역 출신 배우들이 성인연기자로 변신에 성공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성공한 아역출신 배우라면 역시 여진구를 빼놓을 수 없다. 2005년 영화 <새드무비>로 데뷔해 조인성과 주지훈, 이준기, 지성, 장혁, 지창욱, 김수현 등 쟁쟁한 배우들의 아역을 맡았던 여진구는 <왕이 된 남자>와 <호텔 델루나>, <괴물> 등을 통해 성인배우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리고 귀여운 아역 이미지가 강했던 여진구가 자신의 캐릭터로 관객들에게 각인됐던 첫 번째 작품은 장준환 감독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였다.
 
 장준환 감독은 <화이>로 239만 관객을 동원하며 <지구를 지켜라> 흥행 실패의 아쉬움을 달랬다.

장준환 감독은 <화이>로 239만 관객을 동원하며 <지구를 지켜라> 흥행 실패의 아쉬움을 달랬다. ⓒ (주)쇼박스

 
봉준호 감독과 비견되던 천재감독

영화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1984년에 설립한 한국영화 아카데미는 지금까지 많은 영화감독과 평론가들을 배출했다. 그 중에서도 영화 아카데미 11기는 더욱 특별한 기수로 꼽힌다.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두 천재감독 봉준호와 장준환을 배출한 기수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감독이 된 봉준호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장준환 감독 역시 영화 아카데미 시절부터 봉준호 감독 못지 않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으로 인정 받았다.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한 봉준호 감독과 달리 데뷔작 연출까지 제법 긴 준비기간이 걸렸던 장준환 감독은 2003년 4월 신하균과 백윤식 주연의 장편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를 선보였다. 장준환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를 통해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감독상과 국내 5개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휩쓸며 능력을 인정 받았다. 하지만 정작 <지구를 지켜라>는 유치한 코미디 영화 취급을 받으며 흥행 실패했다.

봉준호 감독이 같은 해 개봉한 <살인의 추억> 성공 이후 승승장구한 것과 달리 장준환 감독은 데뷔작 실패 후 슬럼프에 빠졌다. 구상했던 차기작들이 차례로 무산된 장준환 감독은 2006년 배우 문소리와 결혼 후 타짜 4부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만들려 했지만 이 역시 최종적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장준환 감독이 방황(?)하는 사이 봉준호 감독은 <괴물>과 <마더>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손에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나 버렸다.

하지만 와신상담하던 장준환 감독은 2013년<지구를 지켜라> 이후 10년 만에 신작 <화이>를 선보였다. 귀여운 아역이미지가 강했던 여진구가 5명의 범죄자 아버지 사이에서 길러진 킬러로 출연한 영화 <화이>는 많은 우려에도 전국 239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장준환 감독은 <화이>를 통해 특유의 어둡고 냉소적인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관객들과 잘 소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7년 9월 아내 문소리가 연출한 <여배우는 오늘도>에 카메오 출연한 장준환 감독은 같은 해 연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소재로 한 신작 <1987>을 연출했다. <화이>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김윤석이 북한출신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 박처원을 연기한 <1987>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723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제 장준환 감독을 '비운의 천재'라 부르는 관객은 아무도 없다.

아역배우 여진구가 '탈아역' 외친 영화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는 귀여운 이미지였던 여진구의 남성미를 끌어낸 영화로도 유명하다.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는 귀여운 이미지였던 여진구의 남성미를 끌어낸 영화로도 유명하다. ⓒ (주)쇼박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지만 영화에서도 데뷔작의 흥행에 실패한 감독이 두 번째 기회를 얻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장준환 감독 역시 장편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가 각종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휩쓸고 마니아들에게 극찬을 받았음에도 두 번째 영화 <화이>를 만들기까지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화이>는 범죄자들이 주로 활동하는 밤이 아닌 낮에 활동하며 '낮도깨비'로 불리는 범죄집단과 그들의 손에서 킬러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하지만 장준환 감독은 <화이>에서 주인공과 조연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여진구가 연기한 화이와 김윤석, 장현성, 조진웅, 김성균, 박해준이 맡은 5명의 아버지가 모두 비슷한 비중을 차지했다. <화이>는 2012년에 개봉한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 못지 않은 '집단주인공 영화'인 셈이다.

<화이>는 <괴물을 삼킨 아이>라는 부제에 나타나는 것처럼 5명의 범죄자들에게서 길러진 화이(여진구 분)가 무엇을 닮았다고 표현하기 힘든 괴기한 모습을 한 괴물을 보며 고통에 시달린다. 이는 화이가 유일하게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 부르는 낮도깨비의 리더 석태(김윤석 분)도 겪었던 트라우마다. 하지만 석태가 살인을 저지르고 괴물에 의해 삼켜지는 쪽을 택한 반면에 순수하고 선한 면모를 가진 화이는 괴물을 삼키는 쪽을 선택했다.

또래 여자아이 유경(남지현 분)과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할 정도로 숫기 없는 소년으로 등장하는 화이는 괴물을 삼킨 후 자신을 킬러로 자라게 한 '아빠들'에게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저격수로서 화이의 뛰어난 실력과 여진구의 폭발하는 연기가 나오는 후반부는 단연 영화의 하이라이트. 여진구는 <화이>를 통해 청룡영화상을 비롯해 무려 6개 영화제의 신인상을 휩쓸며 누군가의 아역이 아닌 배우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화이>는 배우들이 심각한 얼굴로 찍은 포스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로 잔혹한 묘사도 제법 많이 나온다. 일부 평론가들은 <화이>를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를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관점으로 해석하기도 했는데 물론 영화의 해석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칠봉이-구동매-강동주의 악역 시절
 
 유연석은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의 악역연기를 끝으로 <응답하라 1994>를 통해 선한 이미지로 큰 사랑을 받았다.

유연석은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의 악역연기를 끝으로 <응답하라 1994>를 통해 선한 이미지로 큰 사랑을 받았다. ⓒ (주)쇼박스

 
<화이>는 장준환 감독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답게 6명의 주인공 외에도 배우 캐스팅에 많은 공을 들인 영화다.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무빙>에서 악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문성근은 <화이>에서 조직폭력배 두목 출신의 대형건설사 회장 전승기를 연기했다. 전승기는 석태 일행에게 임형택(이경영 분) 부부의 청부살인을 의뢰해 화이가 범죄집단에서 성장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영화 엔딩에서 화이의 총에 맞고 숨을 거뒀다.

<응답하라1994>와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선한 캐릭터부터 <미스터 션샤인>의 까칠한 야쿠자, <수리남>의 능청스러운 악역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 유연석은 <화이>에서 전승기의 오른팔이자 개인비서 박지원을 연기했다. 조직폭력배 행동대장 출신의 박지원은 주로 전승기의 명령을 받아 각종 지저분한 일을 처리하는 인물로 석태 일행과의 오해로 인한 총격 도중 석태의 총에 맞고 사망한다.

2022년 <작은 아씨들>에서 프리랜서 기자, 작년 <하이쿠키>에서 위기에 빠진 동생을 구하려는 소녀가장을 연기했던 남지현은 <화이>에서 화이와 같은 동네에 사는 여고생 유경 역을 맡았다. 화이의 부탁을 받고 화이의 친모를 간호하지만 비리경찰 창호(박용우 분)에게 잡혀 고초를 겪는다. 그리고 영화 초반과 후반 유경의 친구로 잠시 등장하는 단역배우는 <오징어게임>과 <힘 센 여자 강남순>에 출연했던 이유미였다. 

KBS 주말드라마 <효심이네 각자도생>에서 효심의 새 언니(오빠의 아내) 양희주를 연기하고 있는 임지은은 <화이>에서 다섯 범죄자와 함께 사는 장영주 역을 맡았다. 장영주는 다섯 범죄자와 같은 보육원 출신으로 처음엔 석태에 의해 감금됐지만 나중엔 외부생활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석태의 집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누구보다 화이를 친자식처럼 아끼는 영주는 많은 인물이 사망하는 <화이>에서 유경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는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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