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27 11:47최종 업데이트 23.01.2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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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상황에서 스마트 워치는 진가를 발휘했다. ⓒ 게티이미지뱅크


'운동을 할까, 말까?'

'지금 먹을까, 말까?' 혹은 '뭘 먹을까?' 다음으로 빈도가 높은, 지극히 일상적인 고민이다. 그런데 스마트 워치 광고 속 사람들은 운동할지 말지 고민하지 않는다. 경쾌하고 날렵한 몸짓으로 도심 한복판을 달리고 수영하고 춤추면서 하루 활동량을 가뿐하게 채운다. 


나는 운동이 취미인 사람치고는 꽤 오랫동안 스마트 워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스마트 워치가 당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꾼다'라는 마케팅 메시지가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또 모델들이 지나치게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모습만 보여줘서 도리어 거부감이 일었다.

일하고 움직이고 일하고 움직이고…. 세련되게 포장된 새 시대의 산업역군 아닌가? 아주 전형적인, 겉만 그럴싸하고 속은 텅 빈 이미지(아마도 스마트 워치를 처음 만든 사람조차 광고처럼 살지 못할 것이다)에 속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삼 년 전 생일 무렵 슬그머니 생각을 바꿨다. 휴대폰, 노트북, 블루투스 이어폰을 하나씩 모으면서 강력한 동기화의 사슬에 갇혔고 전화기를 꺼내지 않고 통화하거나 음악을 편하게 듣는다는 핑계로 애플 스토어 앞을 어슬렁거렸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사들인 스마트 워치는 운동은커녕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코로나 대유행의 풍파를 겪으면서 눈부신 진가를 발휘했다. 

코로나는 실로 엄청난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위기감의 정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대로 혼자 죽을 수도 있다'라는 두려움이었다. 재난은 평상시에 의식하지 못했던 삶의 조건을 선명하게 인식시켜주는 법, 선례가 없는 팬데믹의 공포와 대면하며 혼자 산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의식했다. 

게다가 나는 혼자 사는 사람 가운데서도 자유가 과한 편이다. 프리랜서이고 가족은커녕 룸메이트나 반려동물조차 없이 오롯이 혼자다. 순전히 내가 좋아서 선택한 삶의 조건이지만 그에 따른 리스크는 별도로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항상 건강과 안전에 강박적으로 공을 들이는데 코로나가 그 방어벽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스마트 워치

바로 그 틈을 스마트 워치가 파고들었다. 고작 시계일 뿐이면서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뭐든지 관심을 가졌다. 심박수가 조금이라도 오르면 운동 중이냐고 물었고 1시간 이상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으면 일어설 시간이라고 신호를 보냈다. 

또 스트레스가 고조되면 1분 동안의 심호흡과 명상을 제안하고 손을 대충 씻으면 다시 꼼꼼하게 씻을 것을 권한다. 저녁 10시만 돼도 나를 재우려고 계속 시도하고 엉망인 수면 패턴을 보여주면서 반성을 유도했다. 결정적으로 아직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기능이지만, 만약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면 119와 가족을 불러줄 구원 능력까지 갖췄다.

기껏해야 운동량을 채우고 칼로리를 소비하라고 닦달하는 기기인 줄 알았는데 스마트 워치의 강점은 뜻밖에도 돌봄에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돌봄이 필요했던 시기에 적절한 관심과 서비스를 제공한 이 똑똑한 시계는 단숨에 최고의 반려 가전 자리에 등극했다. 

이런 내가 <저주 토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소설가 정보라가 쓴 단편 <안녕, 내 사랑>을 읽고 기시감을 느낀 건 무리가 아니었다. 이 소설에는 인공 반려자를 개발한 여성 과학자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1호'를 인공이 아니라 진짜 반려자로 여긴다. 

'인공 반려자는 종종 진짜 인간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배려가 깊고 참을성이 있었다. 본래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국가들에서 노인들의 생활보조와 정서적인 지원을 위해 개발되었으나 이런 특성 때문에 인공 반려자는 어느 연령대, 어느 계층에나 무척 인기가 좋았다.'

장르의 특성상 소설의 결말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인공 존재를 반려자로 선택한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내가 아닌 생명과 짝이 되기 힘든 사람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생명과의 불화나 관계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만 해도 동물을 좋아하지만 반려동물을 들이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 존재에 따른 모든 생명 활동, 즉 생로병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의 생로병사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그러므로 '어떻게 인공 존재를 반려자로 삼을 수 있냐'는 통념이 지배적인 시대에서 '인공이니까 반려자로 삼을 수 있다'는 시대로의 변화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이뤄질지도 모른다. 

데이터
 

스마트 워치를 활용하는 데 러닝보다 더 최적화된 운동은 수영이다. ⓒ 게티이미지뱅크


뒤늦게 스마트 워치를 신뢰하게 된 나는 시계가 시키는 대로 운동을 해보기로 했다. 원래 러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펜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어쩔 수 없이 달렸다. 러닝은 야외에서 배우지 않고도 혼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운동이었다. 

그때 스마트 워치는 혼자 달리는 적막함을 달래주었다. 무작위로 음악을 골라주고 1킬로미터씩 갱신할 때마다 기록을 읊어준다. 페이스를 자세히 분석하고 배지를 주면서(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계속 달리라고 독려했다. 

'운동을 할까, 말까?'

이전에는 이 고민이, 마냥 퍼져 있으려는 나와 몸을 움직이려는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의지의 다툼이었다면 이제는 그사이에 스마트 워치가 있다. 그날따라 깜빡하고 시계를 빠트렸거나 배터리가 부족해서 전원이 꺼지기 직전이라면 애써 쥐어짠 의지도 맥없이 꺾인다. 정말이지 스마트 워치 없이는 운동하고 싶지 않다. 

급기야 코로나 대유행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때 순전히 스마트 워치 때문에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마트 워치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러닝보다 더 최적화된 운동이 수영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왜 스마트 워치 광고에서 수영하는 사람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어느새 광고 속의, 수영장을 배경으로 기록을 확인하면서 흡족하게 웃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수영이라는 행위 자체보다 어떤 영법으로 얼마나 헤엄쳤는지, 최고 심박수와 최저 심박수가 얼마인지, 거리당 스트로크를 몇 번이나 했는지, 그래서 기록이 얼마나 향상됐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나열한 데이터에 더 끌렸다. 그 숫자들은 언제 봐도 간결하고 아름답다. 

사실 스마트 워치가 날마다 제공하는 데이터는 너무 많아서 전부 소화할 수도 없다. 우리가 제대로 분석도 하지 못한 정보는 어디로 흘러갈까? 세상 어딘가에 방대한 양의 생체 데이터가 쌓이고 있다. 또 누군가를 이를 이용해서 좋게든 나쁘게든 인류를 놀라게 할 비기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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