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대립, 그리고 결국은 선이 승리하는 결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식이다. 특히 슈퍼맨, 스파이더맨 등 각종 ‘맨’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슈퍼히어로물에서는 그 대립이 유치할 만큼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즉 슈퍼히어로는 철저히 영웅으로 그려지고, 그에 대적하는 악당은 억만장자가 되려 하거나 지구정복을 꿈꾸는 희화화된 속물로 그려졌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그 가운데에서도 슈퍼히어로물의 진화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진화의 징후는 주로 주인공인 슈퍼히어로를 통해 드러났다. 더 이상 슈퍼히어로들은 악과 싸우는 것을 그저 자랑스럽기만 한 사명으로 여기지 않을 뿐더러, 마냥 정의감에 불타오르지도 않는다.

 

즉 슈퍼히어로들에게도 최소한의 리얼리즘 혹은 휴머니티가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웅에 목말라했던 관객들은 더 이상 자신과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를 원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자신들과 같이 고민하고 망설이고 연애에 마음 졸이는 슈퍼히어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스파이더맨>을 기점으로 하여 <핸콕>에 이르기까지, 악당들이나 보여주던 어수룩하고 희화화된 모습을 이제는 슈퍼히어로들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렇듯 슈퍼히어로물이 진화하고 있는 와중에 슈퍼맨과 더불어 대표적인 슈퍼히어로라 할 수 있는 배트맨이 돌아왔다. 그런데 많은 면에서 이전과는 차이를 보인다. 우선 당연히 배트맨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던 영화 제목에서 배트맨의 이름을 빼버리고 <다크 나이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이는 이번 영화가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역시 배트맨의 숙적 조커의 ‘존재’이다. 조커의 ‘활약상’이 화제라고 하지 않고 굳이 조커의 ‘존재’가 화제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악행보다도 그의 존재 자체가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배트맨 시리즈는 처음부터 만만하기만 한 오락영화가 아니었다. <배트맨 포에버>부터 그렇고 그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다를 바 없는 영화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희대의 괴짜 감독 팀 버튼이 메가폰을 잡았던 <배트맨>과 <배트맨 2>는 감독 특유의 기괴함이 암울한 고담시의 정경과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룬 독특한 슈퍼히어로물이었다.

 

팀 버튼은 펭귄과 캣우먼 등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매력적인 악당 캐릭터를 창조해냈는데, 역시 관객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명배우 잭 니콜슨이 광기 어린 연기를 보여주었던 조커였다. 따라서 이번 영화에서 조커의 귀환은 배트맨의 귀환보다 분명히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더구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히스 레저라면, 잭 니콜슨이 연기했던 조커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조커를 연기해내기에 충분할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해 있었다. 

 

과연 히스 레저의 소름 끼치는 연기는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히스 레저의 연기뿐만이 아니라, 조커라는 캐릭터의 자체이다. 이번 영화에서 조커는 단순히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그는 돈이나 명예 따위 너절한 것들에는 하등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모든 인간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한 본성과 폭력성이 무질서하게 분출되는 순수한 혼돈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고결한 절대악, 그 자체라 하겠다.

 

김기덕의 <나쁜 남자>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나쁜 남자 한기가 선화에게 강제로 키스를 한 뒤에 일군의 해병대 무리에게 집단구타를 당하는 것이다. 해병대 무리는 폭행을 멈춘 뒤에 한기를 선화 앞으로 끌고 간다. 선화가 사과를 요구하자 해병대 무리도 한기에게 사과를 ‘명령’한다. 선화는 한기에게 침을 뱉고 자리를 떠난다.

 

한기가 선화에게 가한 성폭력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법이 아닌 다른 그 어떠한 사적인 폭력도 그를 처벌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해병대 무리는 그들에게 한기를 처벌할 어떠한 권리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집단폭행했다. 그들이 정말 정의를 원했다면 한기를 잡아 경찰서로 데려갔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적인 폭력을 통하여 스스로 한기를 ‘처벌’했다. 나는 그들이 휘두른 가공할 폭력에 소름이 끼쳤다. 군복 입은 마초들에게는 그것이 알량한 정의감의 표출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 폭력 행사를 통한 그들의 스트레스 해소에 불과하다. 

 

그들은 귀대 후에 자랑스레 그들이 행한 정의로운 처벌에 대해 떠벌렸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군 생활 스트레스 해소 삼아 악명 높은 해병대식 구타 및 가혹행위로 후임병들을 처벌했을지 모른다. 나는 만약 한기가 선화에게 성폭력을 행한 뒤에 해병대 무리에게 집단구타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 경우에도 한기가 선화를 성노동자로 만들어서까지 소유하려 했을까? 한기가 선화의 삶을 짓밟기까지는, 합법적 폭력집단인 일군의 해병대 무리가 한기를 상대로 휘두른 사적 폭력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절대악은 그러한 알량한 정의감을 그냥 지켜볼 수 없다. 절대악은 정의감에 불타올라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이를 지목하여 파멸시킨 뒤에 그의 내면에 억눌려 있던 악마적인 본성을 끄집어내고자 한다. 이러한 연유로 조커는 하비 덴트를 지목한다.

 

“나는 하비 덴트를 믿는다”라는 촌스러운 캠페인으로 스타 검사가 된 하비 덴트. 그는 부패로 얼룩진 고담시에서 범죄 집단들과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올곧은 면을 보여준다. 대기업 최고경영자인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은 그를 위해 후원회까지 열어준다.

 

이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의 정치인 후원회에 대한 자료를 볼 때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라는 것은 결국 돈 잔치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검사를 위해서도 후원회를 열어주다니, 역시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나라답게 모든 것을 돈으로 표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기야 이 나라에도 조중동이라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전직 대통령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살인자에게 명패를 집어던짐으로써 일약 스타 국회의원으로 떠올랐다가 대통령까지 한 정치인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인민들이 순진하게도 그를 믿는다고 외쳤던가. 미국식 후원회는 없었지만 감동적인 노란 저금통의 물결이 이어졌었다. 그는 심지어 십분의 일이라는 말장난까지 하며 대기업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것을 스스로 밝히기까지 했지만, 그를 믿었던 인민의 상당수는 아직도 그를 굳건히 믿고 있다.

 

그의 영혼의 쌍둥이를 자임하던 정치인은 이라크 침략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선결조건으로 내걸었던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옹호하고 의료영리화의 가속 페달을 밟았지만, 여전히 상당수 인민은 그가 저지른 일들이 그의 본심은 아니었을 것이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면서 아직도 그를 믿는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있다.

 

그러니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조커는 말한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고.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아니,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인간의 본성과 돈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고결한 절대악에 대하여 근본적이고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조커만으로도 이 영화는 분명히 기존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차별화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가 보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죄수와 시민들이 각기 나뉘어 탄 두 배가 서로 기폭장치를 터뜨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는 지점으로 가보도록 하자. 수인의 딜레마라고 할 만한 상황에서 시민들이 취하는 행동은 다수결의 원리에 입각한 투표이다. 사람들의 목숨을 놓고 투표를 하다니, 이 얼마나 민주적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체제인지를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다수결의 원리에 입각한 투표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정치인들을 선출해왔고 경쟁을 당연시하는 교육감을 선출했다. 우리의 정치적 결정을 대의하게 된 그들이 추진한 비정규직법과 무한경쟁교육이 노동자 민중을 죽이고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면, 우리에게도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다시 영화 속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결국 시민들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기폭장치를 누르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죄수들은 기폭장치를 배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을 택한다. 자, 이쯤 되면 도대체 누가 죄수들인지 분간이 되는가? 이것이 바로 조커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시민들도 끝내 기폭장치를 누르지 못하는 것이다. 도대체 저들은 죄수들이니 죽어도 되지만 자신들이 죽을 수는 없다고 투표했던 잘난 시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막상 죄수들을 죽게 하려니, 갑자기 한꺼번에 자신들이 죽을지언정 죄수들을 죽일 수 없다는 휴머니스트가 되기라도 한 것일까?

 

감독은 배트맨뿐만이 아니라 서로를 ‘죽이지 못한’(‘죽이지 않은’이 아니다) 사람들이야말로 슈퍼히어로이며, 모든 사람들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희망의 싹을 남겨두기 위함이었는지 몰라도, 관객들은 영화 속 시민들의 선택에 개연성이 부족하며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다.

 

다음으로 브루스 웨인. 하비 덴트마저 투페이스가 되어 내면의 악마적 본성을 아낌없이 표출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고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배트맨을 쫓기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조커를 죽이지 못한다. 그는 악을 응징할 뿐, 결코 해치고자 하지 않는 절대선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슈퍼히어로인 만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기로 하자.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도대체 대기업 최고경영자인 억만장자가 절대선이 될 수 있을까? 관객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기업 경영자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소외당하게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억만장자가 선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배트맨을 절대선으로 활약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브루스 웨인의 막대한 자본이다. 돈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고결한 절대악인 조커에 비해, 브루스 웨인의 막대한 자본이 없이는 배트맨이라는 절대선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하지만 철저히 미국적인 사고란 말인가?

 

어쩌면 많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은 악의 축을 응징하고 자유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전하는 슈퍼히어로일 것이다. 물론 슈퍼히어로에게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따라서 슈퍼히어로는 마땅히 식량과 원자재 투기, 그리고 전쟁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태평양 건너 먼 땅에는 미국식 자유주의를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는 조폭을 동원한 사적 폭력으로 감히 자신의 아들을 때린 사람을 스스로 ‘처벌’한 최고경영자가 아직도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천문학적인 돈을 탈세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전방위 로비작업을 벌이고도 한 차례도 구속되지 않은 최고경영자가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꼽히며, 대다수 젊은이들이 무노조가 원칙인 그의 회사에 비정규직으로라도 취업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어쩌면 그곳은 거대한 고담시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레디앙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8.13 14:57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레디앙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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