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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윤창중 사건을 보고, '어떻게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에 그런…' 혹은 '어떻게 청와대 대변인씩이나 되는 사람이…'라며 놀라워했다. 만약 이것이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사건이었다면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이 놀라운 일로써 '대서특필' 된 결정적 이유는 청와대 대변인이 여성 인턴을 성추행 하는 게 드물게 벌어지는 일이어서가 아니라, '힘 없는 직원 한 사람이 청와대 관계자를 고소한 행동'이 매우드물게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윤창중을 발탁한 것은 박근혜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건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49퍼센트는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보수 사회, 기업, 자본주의, 강자들을 여전히 용인하고 지탱하고 있는 건 사실 우리다. 아무리 진보 진보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자와 강자들을동경하고,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사람들을 일 잘 한다며 중요한 자리에 올려놓는다.

권력을 키우거나 이윤을 잡기 위해서는 상명하복의 '질서'가 효율적이고, 남양유업 사건처럼 강제로 약자들에게 밀어내기라도 할 수 있는 이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꾸준히 암묵적으로 용인해왔다. 미국처럼 가능성이 많은 사회가 아닌 이상 한국에서 '선한 심성으로' 이윤을 내거나 권력을 얻기는 아주 어렵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와 질서와 이기심을 강조하는 '강한 권력'이 폭력성과 멀리 떨어지기도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애써 무시한다. 이러한 사회적 사고방식 속에서 고위 공직자가 밑의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엉덩이 좀 만진 일이 어쩌다 실수로 일어난 것일까?

"저 남자 참 재수도 없지… 쯧쯧"이라고 TV를 보며 무심코 내뱉었다는 한 아주머니의 말을 전한 어떤 트윗을 보았다. 어쩌면 이 말은 이 사건의 성격을 보여주는 핵심을 담고 있다. '높은 공직자가 그런 짓을 하다니'가 놀라운 게 아니라, 사실 권력 있는 사람들이 그런 추행을 하는 일은 비일비재한데, '어쩌다 잘못 걸린 것'이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순방중 청와대고위공직자들이 인턴들을 자주 노예처럼 부리고 폭언을 행사해왔다는 사실이 인턴들의 증언을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고, 백화점 매니저나 포스코 왕상무 사건처럼 아래 직원이나 서비스업종 종사자들을 하대하고 폭행하는 '직급 있는 한국 남성들'의 행동에 관한 사실도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많은 횡포들은 '갑'들이 아랫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하찮은 소모품이나 시중드는 노예급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약 상급자가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여성 비서나 직원들에 대해 성희롱, 성추행은 드물게 벌어질 만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회사나 조직 내에서 성적 폭력에 대한 보고는 매우 많다.(관련기사 : '갑 아저씨, 제발 그만하세요… 갑을 성폭력 만연'(<머니투데이> 5월 15일), '안아보자' 직장내 갑의 성희롱… '피해구제 안돼' 을의 한탄(<한국일보> 5월 14일))

나는 궁금하다. 윤창중이 한 짓이 후안무치하고 비도덕적이고 쓰레기 같은 짓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조롱한다. 그런데 그토록 쓰레기 같은 짓이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데, 비슷한 수많은 폭력들이 어째서 그렇게 많이 묻히나.

사실 성추행을 당한 것을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행동은 매우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다니지 않겠다'라며 다니던 직장을 향해 일침을 놓고 경찰에 신고를 한 문화원 직원의 행동은 단순한 '선한 행위'를 넘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녀의 행동은 이번 사건을 무마하려 했던 상사와 직장에 대한 거부이고, '설마 나한테 어떻게 하겠어?'라고 권력을 엎고 자신만만해하던 한국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경고였고, '높은 사람들' 눈치보며 옳은 선택을 하지 못했던 한국의 '알아서 기는 사회'에 대한 거부였다.

문화원 직원의 행동이 이처럼 많은 시사점이 있는 까닭은 그것이 결코 쉬운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문화원 직원의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혹은 "한국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같은 질문에는 여성의 입장으로서도 "예스"라고 대답하기엔 쉽지 않다.

검경과 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권력자를 뒤로 하고 있는 사람을 경찰에 고소한다? 웃기는 소리다. 설령 해외에서 유학 중이었더라도, 한국에 돌아가면 해코지가 생기지 않을까? 낙인이라도 찍히지 않을까? 본인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일을, 그렇게 나서서 도와줄 수 있었을까?

유명인이거나, 혹은 노동 현안이나 철거문제나, 이미 사회적으로 여론이 집중된 사안이라면 이와 같이 '권력에 저항하기'에 그닥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함께 목소리를 내어줄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데 알려지지 않은 작은 회사 직원이거나, 여론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도 희박하다면? '찍히고, 쫓겨나고, 사회에 발 붙이기도 어려울 텐데' 하며 다들 말리지 않았을까.

만약 한국이었고, 청와대에서 윤창중을 '토사구팽' 하지 않고 철처하게 보호했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 보수 언론과 방송까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할 수 있던 건, 청와대에서 재빨리 윤창중을 '버렸기' 때문이지, 만약 감싸는 위치를 취했다면 개인의 작은 노력은 훨씬 힘들어졌을 수도 있다.

지금 윤창중 사건에 음담패설 농담까지 곁들이며 마음껏 비판하고 조롱하고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과연 똑같은 상황이 도래하면 피해자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 건가. 사회에서 왕따 당하고 직장을 떠나는 걸 감수하고?

직장이나 조직 내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고소나 폭로까지 가기 어려운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특히 직장이 내 삶에서 중요하고 가해자가 인사 권한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해보자. 내가 피해자라면, 혹은 동료라면 피해자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가해자가 한 치 앞을 다투는 몇십 억이 걸려 있는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는 임원이었다면? "OO 때문에 일이 엎어졌다." 이 말은 누구에게 하게 될 것 같은가? 그 임원에게? 천만에. 대부분의 경우 피해 여성에게 돌아간다. 피해자가 꽃뱀으로 몰리지 않는다면 천만다행이다.

우리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종종 착각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가해자에게 해야 할 말을 피해자에게 하고 있지 않은가. 대표적인 것이 파업으로 항의하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이 파업해서 우리가 불편해요"라는 것이다. 그러한 불편이 항의하는 약자들의 탓인가? 아니면 약자들이 파업을 하게 될 정도로 무자비한 처우를 지속시킨 갑의 책임인가? 이 경우도 다른 위에서 말한 케이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윤창중의 케이스는 파장의 책임자가 그나마 '제대로' 지목된 사건이기도하다. 미국 경찰의 협조가 없었거나 자칫 잘못했으면 국격 떨어지고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진 책임을 피해자가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우리는 문화원 직원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높은가? 아니면 '일 커진다. 제발 고소만은 말아달라'라고 '착하게' 수습하려 했던 문화원 원장처럼 행할 가능성에 더 가까운가? 파렴치한을비난하는 사람들이여, 솔직히, 아주 솔직히 물어보자.

갑을 성폭행이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정치권에서 대책 마련을 위한 노력도 생길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에서 수많은 '윤창중'을 접했을 때 우리가 그 문화원 직원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윤창중을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실제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그 문화원 직원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세상은 후안무치한 누군가를 줄기차게 욕하고 비난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 같은 개인이 주변의 모든 것을 감수하고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할 때 바뀐다. 국격 떨어지고 창피한 사건인 건 분명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아주 고무적인 일이기도 하다. 개인의 작은 행동이 사회에 파장을 크게 일으킨 케이스이다. 미국이었고, 운도 있었고, 매우 다행인 특별한 케이스이기도 하지만.

나는 한국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좌지우지 할 수 있을 높은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시끄럽게 만들고' '조직 분위기 싸해지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특히 견고한 조직과 사회 내에서 박탈당할까 하는 두려움이다.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은 이 두려움을 이용해서 몹쓸 짓을 한다. 그래도 주변이 조용하다면 몹쓸 짓이 벌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고발되거나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개인이 이를 '두려워하지 않은 행동을' 하자 높은 사람들은 무척 당황했다. 그들의 견고한 상식이 무너졌다. 권위가 무너졌다. 결국 자기네들 권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슈퍼갑' 미국 국무위원의 경고까지 받고 당황하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한 사람의 작은 의로운 행동 덕택에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가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그분에게 정말 고맙다. 아울러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당한 성추행을 고발하고, 싸우고, 조직에서 매장당하고 쫓겨나고 묵살당했던 수많은 이름없는 여성분들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태그:#윤창중, #성추행,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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