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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여성 문화운동가의 구술 그림책이 나왔습니다.  2011년 급성 뇌졸중으로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된 그가 느린 왼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항쟁의 현장을 전합니다.[기자말]
최근 책 <양림동 소녀>를 펴낸 임영희 작가가 5·18민주화운동 44주년에 앞서 15일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이 든 액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도청 발포'는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집단 발포를 하는 그림이다. 달아나는 시민들의 신발이 피로 붉게 물든 도청 분수대 시계탑 앞에 쌓여 있다. '해방 광주'는 같은 해 5월 22일 시민들의 항거로 계엄군이 퇴각해 환희에 찬 사람들이 차를 타고 광주 시내를 도는 그림이다. 그는 책에서 이러한 모습을 "정말 신성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광주 오월 공동체"라고 썼다.
▲ 도청 발포(왼쪽)와 해방 광주(오른쪽) 최근 책 <양림동 소녀>를 펴낸 임영희 작가가 5·18민주화운동 44주년에 앞서 15일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이 든 액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도청 발포'는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집단 발포를 하는 그림이다. 달아나는 시민들의 신발이 피로 붉게 물든 도청 분수대 시계탑 앞에 쌓여 있다. '해방 광주'는 같은 해 5월 22일 시민들의 항거로 계엄군이 퇴각해 환희에 찬 사람들이 차를 타고 광주 시내를 도는 그림이다. 그는 책에서 이러한 모습을 "정말 신성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광주 오월 공동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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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발포를 명령하는 노래"를 삐뚤빼뚤한 그림들은 알고 있었다. 옛 전남도청 앞에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눈다. 금남로 위로 붉은 피가 흩뿌려진다. 고무신과 운동화가 벗겨진 줄도 모르고 시민들이 도망친다.

"1980년 5월 21일은 광란의 날. 아비규환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더라."

다음날 5월 22일 도청 앞에 똑같은 애국가가 흐른다. 시민군이 차를 타고 시내를 돌며 "해방의 노래"를 부른다. 사람들이 김밥과 주먹밥을 차에 올려주며 환호한다. 계엄군이 물러난 땅 위에 "누구 하나 총구녁 겨누며 싸우지 않는 공동체"가 색채 입은 그림으로 합쳐진다.

"폭력을 우리 힘으로 물리친 아름다운 날. 내 인생 뼛속 깊이 기억하고픈 장면이야."
 
임영희 작가가 지난 15일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자신이 늘 작업하던 탁상에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덧칠하고 있다. 2011년 뇌졸중으로 오른손을 못 쓰게 된 그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임영희 작가가 지난 15일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자신이 늘 작업하던 탁상에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덧칠하고 있다. 2011년 뇌졸중으로 오른손을 못 쓰게 된 그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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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과 항쟁, 발포와 해방, 아비규환과 아름다움. 두 상반된 애국가를 모두 목격한 여성이 광주의 역사를 그림으로 그렸다. 섬 출신의 임영희(68)는 광주 양림동에서 '유학 생활'을 한 문화운동가 출신 5·18민주화운동 여성 시민군이다. 그가 2020년부터 그린 80여 점의 그림들이 얼마 전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나의 이야기이자 모두의 이야기이면서 현대사와 맞물린 이야기이니까. 그리고 44년이나 됐잖아. 그때 해방 광주의 공동체 정신을 이 그림들이 다시 드러내줄 거라고 생각해."

책 제목이기도 한 '양림동 소녀'가 오월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성·노인·장애인 아우른 80여 점 작업
 
임영희 작가가 지난 15일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자신이 늘 작업하던 탁상에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덧칠하고 있다. 흰 켄트지(A4용지 크기)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연필과 사인펜과 크레파스로 색을 칠하면서 그는 그림을 그렸고, 그렇게 모아진 80여 점의 그림이 구술과 함께 최근 책 <양림동 소녀>로 출간됐다.
 임영희 작가가 지난 15일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자신이 늘 작업하던 탁상에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덧칠하고 있다. 흰 켄트지(A4용지 크기)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연필과 사인펜과 크레파스로 색을 칠하면서 그는 그림을 그렸고, 그렇게 모아진 80여 점의 그림이 구술과 함께 최근 책 <양림동 소녀>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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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들어와요. 대중교통도 안 다니는데."

광주에서 찻길로 20분 거리의 산골집(전남 화순 수만리)이었다. 지난 15일 오후 광주 시내서 돌아온 남편을 맞는 임영희의 집 앞엔 비가 많이 내려 크고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그는 오른손을 옆구리에 붙인 채 왼손으로 우산을 접고 점심을 차렸다. 식탁 위엔 색연필과 사인펜이 빼곡했고 거실 바닥엔 최근 출간된 그의 그림 구술생애사 <양림동 소녀>(오월의봄)가 있었다.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 표지가 구김 없이 빳빳했다.

"너무 신기하죠, 작가 임영희라니. 내 그림에 내 활자가 박혀서 책이 나왔네. 이제 서점 가판대에도 올라가겠네. 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건드려 준다면 청소년, 중년, 노년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소스가 되지 않겠나 싶지요."

시작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아들의 제안이었다. 흰 켄트지(A4용지 크기)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연필과 사인펜과 크레파스로 색을 칠했다. 짧게는 30분, 길게는 4시간까지 걸리는 이 작업이 거실에서 서너 달 동안 이어졌다. 처음엔 학창 시절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던 '문학소녀'의 명랑함을, 나중엔 문화운동과 민주화운동 한가운데 섰던 결연함을 그려 넣었다. 그림 중간중간 그의 얼굴과 뒷모습도 보였다. 과거 자신의 역사를 그림으로 복기하는 일은 임영희의 삶을 지탱하는 한 축이었다.

13년 전 급성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말이 어눌해지고 오른손을 못 쓰게 되는 등 장애를 갖게 됐다. 느릿느릿 왼손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삐뚤빼뚤 그의 오랜 이야기들을 길어 올렸다.
 
'광주로 도착'은 진도에서 태어난 임영희 작가가 유학을 위해 '옥주호'라는 배를 타고 광주로 가는 그림이다. '문학소녀'는 교내 문예 백일장에 시를 써서 당선된 그의 고등학생 시절을 그린 그림이다.
▲ 광주로 도착(왼쪽)과 문학소녀(오른쪽) '광주로 도착'은 진도에서 태어난 임영희 작가가 유학을 위해 '옥주호'라는 배를 타고 광주로 가는 그림이다. '문학소녀'는 교내 문예 백일장에 시를 써서 당선된 그의 고등학생 시절을 그린 그림이다.
ⓒ 양림동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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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희는 진도에 살다 열세 살에 배를 타고 광주 땅을 밟았다. 부모님이 광주 양림동에 있는 수피아여자중·고로 그를 유학 보냈다. 문학도를 꿈꾸던 그는 졸업 후 문화운동가가 돼 1978년 12월 광주·전남 최초 독립여성단체 '송백회'를 창립했다. 사회운동단체 '현대문화연구소' 여성부 간사, 민중극단 '광대' 단원으로도 활동했다.

세 단체는 당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고 광주 내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때를 떠올리며 임영희는 "삶의 터전이자 사상의 기저이며 젊고 푸른 청춘과 민주화운동의 근거를 만들었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낮엔 양림동에서 도청 가는 길로 출근했어요. 구속된 사람들 옥바라지하고 양말 떠서 책이랑 같이 넣어주고. 주부, 교사 등으로 그룹을 나눠 공부 모임도 하고. 밤엔 다시 양림동에 있는 홍희담(본명 홍희윤) 선생 집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책 속 그림들이 든 액자를 2층에서 가져오며 그가 말했다. 독재 정권 시절 양림동에서 형성된 그의 의식과 세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거기에는 민주화 이후에도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역사에서 가려져 온 '시민군' 이야기도 있었다. 광주 시민들, 여성들, 동지들과 함께한 그 기억들이 그의 왼손으로 칠해지고 그의 입을 빌려 전해졌다.

"계엄군 물러간 광주, 그런 신성한 공동체는..."
 
임영희 작가가 지난 15일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자신이 늘 작업하던 탁상에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덧칠하고 있다. 2011년 뇌졸중으로 오른손을 못 쓰게 된 그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임영희 작가가 지난 15일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자신이 늘 작업하던 탁상에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덧칠하고 있다. 2011년 뇌졸중으로 오른손을 못 쓰게 된 그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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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5·18 이전 경찰에 붙잡혀 "세 번의 고문"을 당했었다.

"광주경찰서에 두 번, 서부경찰서에 한 번. 잠을 안 재우는 대신 볼펜을 손가락에 끼우고 '어느 선배랑 만나서 뭘 했니', '누구한테 돈을 얼마 받았니' 물으면서 조작된 조서에 지장을 찍으라는 거야. 그걸 거부했더니 나중엔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맞아서 기절 졸도를 했죠."

불법 구금 상태에서 경찰은 그를 밤낮으로 유치장과 여관에 데려가 고문했다. 당시 유신 헌법과 긴급 조치는 광주 여자기독교청년회관(YWCA)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모임과 강연에 참여한 사람들을 폭력의 피해자로 만들었다. 많은 시민이 죽었고 국가보안법에 짓눌려 일생을 아파했다. 임영희도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5·18을 그린 그림들에선 광주의 참상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5월 18일. YWCA에서 광대 단원들이랑 대본 연습하고 있는데 전남대 학생들이 맞은편 무등고시학원으로 뛰어 들어가니까 군인들이 곤봉을 두들기는 광경을 목격했지. 5월 19일. 사람들이 그렇게 다쳐도 아무 응답이 없길래 분노하는 마음으로 MBC에 화염병을 투척했지. 5월 21일.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군인에게 교련복 입은 학생들이 총 맞아 죽는 걸 봤지."

그림을 따라가던 그의 말이 '5월 22일'에 멈춰 섰다.

"시민들의 항거로 계엄군이 물러나니까 누구 하나 싸우거나 도둑질하지 않고, 서로서로 보살피며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대했어. 그날 '해방 광주'의 감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차별, 억압, 격차, 이런 단어들의 경계선이 다 무너졌달까. 인류 역사에 그런 신성한 공동체는 없었을 거야."
 
'5월 27일 새벽'은 재진압 작전에 나선 계엄군에 시민군이 맞선 장소인 광주 여자기독교청년회관(YWCA)을 그린 그림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 탄생'은 1982년 4월 임영희 작가가 이 노래를 녹음한 광주 운암동 소설가 황석영의 자택 평면도를 그린 그림이다. 평면도 뒤로 이 노래를 시작하는 첫 음표인 점4분음표가 초록색으로 그려져 있다.
▲ 5월 27일 새벽(왼쪽)과 님을 위한 행진곡 탄생(오른쪽) '5월 27일 새벽'은 재진압 작전에 나선 계엄군에 시민군이 맞선 장소인 광주 여자기독교청년회관(YWCA)을 그린 그림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 탄생'은 1982년 4월 임영희 작가가 이 노래를 녹음한 광주 운암동 소설가 황석영의 자택 평면도를 그린 그림이다. 평면도 뒤로 이 노래를 시작하는 첫 음표인 점4분음표가 초록색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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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열흘 만에 진압됐다. 5월 26일에서 27일을 넘어가는 새벽 3시였다. YWCA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는 나무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엄군의 재진압에 대비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나가서 대피하라'는 남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끝내 두 여자와 건물을 나와 맞은편 책방 녹두서점으로 이동하는데, 뒤에서 굉음의 총소리가 들려 왔다. "30분 같았던 2시간"이 지나고 거리로 나오니 계엄군이 시신들을 들것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두 해가 지나도 오월의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다.

1982년 4월, 양림동에서 운암동으로 옮겨 간 소설가 황석영의 자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테이프 녹음이 시작됐다. 광주 문화운동가들이 5·18의 진실을 알리려 만든 노래극 '넋풀이: 빛의 결혼식'에 수록된 곡이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곡은 한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당시 이 노래를 함께 불렀던 전남대생 오정묵씨가 현재 그의 남편이다. 둘은 같은 해 결혼했다.

임씨 가족은 지난 2022년엔 영화를 제작했다. 책과 같은 제목의 30분짜리 다큐메이션(다큐멘터리+애니메이션)이었다. 임영희가 그림을 그리고, 오정묵이 붓글씨로 제목을 옮겨쓰고, 아들이 배경음악을 연주하고, 딸이 번역을 담당했다. 가족이 함께 만든 영화는 서울독립영화제·광주여성영화제에 초청되고 청룡영화상 후보에 오르는 등 호평을 받았다. 화가와 작가에 이어 감독까지 임영희의 직함은 다양하게 달렸다.

몸을 잃고 붙든 이야기
 
'병원 생활'은 2011년 급성 뇌졸중으로 쓰러진 임영희 작가가 재활치료를 받기 위해 기립기에 묶여 서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짤둑이 모임'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오른쪽 반신마비가 온 그와 다른 뇌졸중 환자들이 절뚝절뚝거리며 커피 전문점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 병원 생활(왼쪽)과 짤뚝이 모임(오른쪽) '병원 생활'은 2011년 급성 뇌졸중으로 쓰러진 임영희 작가가 재활치료를 받기 위해 기립기에 묶여 서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짤둑이 모임'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오른쪽 반신마비가 온 그와 다른 뇌졸중 환자들이 절뚝절뚝거리며 커피 전문점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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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몸 한쪽이 움직이지 않았다.

2011년 갑작스레 찾아온 급성 뇌졸중은 오른쪽 반신마비와 언어마비를 가져왔다. 한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오른손잡이였던 그는 왼손으로 젓가락질하고 글씨 쓰는 법부터 새로 익혔다.

쉰이 넘어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그는 세상의 공격적인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오른쪽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건 그의 장애였지만, 움직일 수 없는 그를 더욱 고립시킨 건 차별과 편견이었다. 

"카페에 가면 손님들이 다 나가버리고, 계단이랑 에스컬레이터를 천천히 이용하면 빨리 가라고 밀어버리고. 그래서인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시위, 특수학교 설립 문제를 더 눈여겨보게 되더라고. 거기에 반대하는 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데 안 좋은 현상이라고 봐요."
 
임영희 작가가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거실 바닥에 일렬로 정렬된 자신의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2020년부터 80여 점의 그림들을 그렸고, 그중 60여 점이 최근 책 <양림동 소녀>로 출간됐다.
 임영희 작가가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거실 바닥에 일렬로 정렬된 자신의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2020년부터 80여 점의 그림들을 그렸고, 그중 60여 점이 최근 책 <양림동 소녀>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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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희는 장애를 한계로 받아들이는 대신, 장애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궁리했다. 세상의 낮은 목소리들을 떠올리며 왼손으로 만들어 낸 그림은 몸과 마음을 나아지게 했고 그를 살게 했다. 수십 년 낙인에 숨어야 했던 시민군과 장애인과 노인의 삶은 그 시간들을 통과해 온 임영희만이 붙들 수 있는 이야기가 됐다.

지난해 광주에서 두 차례 개인전을 연 이후 그는 새 그림을 그리진 못했다. 아직 몸이 의욕을 따라가지 못했고, 흥미가 아닌 의무감에만 얽매이는 건 아닐지 걱정이 들어서였다. 그는 대신 올가을 광주 충장축제에서 패션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다. 장애를 갖고 난 뒤로 남편이 재봉 학원에 다니며 만들어 준 맞춤형 원피스, 재킷, 바지 스무여 벌을 영화와 노래와 함께 보여주는 전시회다.

"나의 오월이 시작되는 곳을 그림책으로 펴냈으니, 이젠 '옷으로 치유를 입다'라는 부제로 복합 전시회를 기획해 보려고요. 제 옷 안에는 양림동 소녀의 이야기도 있고 옛 세대와 소통할 수도 있는 요소들도 있으니까 재밌겠다 싶어요."
 
임영희 작가가 지난 15일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 '문학소녀'가 든 액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책 <양림동 소녀> 겉표지에도 나오는 이 그림은 교내 문예 백일장에 시를 써서 당선된 그의 고등학생 시절을 담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릴케, 김동리, 도스토옙스키 등 당시 그가 읽었던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임영희 작가가 지난 15일 전남 화순 수만리 자택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 '문학소녀'가 든 액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책 <양림동 소녀> 겉표지에도 나오는 이 그림은 교내 문예 백일장에 시를 써서 당선된 그의 고등학생 시절을 담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릴케, 김동리, 도스토옙스키 등 당시 그가 읽었던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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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녀가 광주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60대 노인이 됐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오월 공동체가 몸에 깊게 새겨진 임영희는 남은 생이 다할 때까지 역사와 역사, 세대와 세대를 잇는 문화운동가로 역할을 하고자 했다. 대화의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이젠 세대를 아우르는 5·18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화가이자 감독이자 작가 임영희의 역할이지 않을까요. 그렇게 저는 싸목싸목(천천히) 늙어갔으면, 제 작품들은 오래오래 기억됐으면 해요."
 

태그:#양림동소녀, #임영희, #5·18민주화운동, #44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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