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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자>의 한 장면.
 영화 <애자>의 한 장면.
ⓒ 시리우스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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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나이가 오십이다' 그러면 엄청 늙었다고 생각했어. 근데 내가 낼모레 벌써 오십이야. 내 나이에 내가 놀란다니까, 정말."

"난 서른아홉 때 마흔 살 되는 밤 12시까지 시계를 붙들고 있었어. 나한테도 마흔이 정말 오나 싶었지. 12시 땡! 하면서 마흔이 되고 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가는 시간이 좀 뻔뻔하더라. 마흔 되면 불혹(不惑)이라고 하잖니. 오십은 또 지천명(知天命)이라며? 이거 진짜 웃기는 얘기야. 난 요즘에 떨어지는 낙엽에도 얼마나 마음이 흔들리는데. 호호호…."

동갑내기 친구들과 전화로 수다를 떨다가 나이 얘기가 나왔다. 마흔도 아니고 이제 곧 쉰을 바라보는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 20년차 내외다. 흔한 세상잣대로 보면 웬만큼 '자리' 잡고 살면서 자식들 얼추 키워놓고 이제 한가로이 여유를 즐길 시기다.

하지만 인간사가 어디 숫자로 딱딱 떨어지던가? 물론 나이에 걸맞게 그만한 평수의 아파트에서 여유 있게 사는 친구가 있긴 하지만, 같은 나이에 나처럼 '아파트 평수' 따위는 포기한(?) 사람도 있다.

'가는 세월 잡는 심정으로 시계를 붙들고 있었다'는 친구가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에 속절없이 흔들린다'고 한 말은 차라리 귀엽다. 먹고사는 일을 붙들고 있는 나에 비하면 그래도 친구는 '나잇값'을 하는 듯 보인다.

'쉰이면 꼬부라지는 나이'라고 그 누가 그랬던가

쉰의 경계로 들어서는 요즘, 초겨울 바람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고 날씨마저 꼬물꼬물 삐져나오는 내 회색빛 머리카락처럼 흐릿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강보조식품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친정언니를 보면서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렇게 찾아먹냐"고 했건만, 요즘엔 나도 혈액순환에 좋다는 약을 내 스스로 찾아먹고 있다. 역시 나이가 들긴 했나보다.

많은 주부들이 하루에 한 번씩 꼭 하는 고민, '저녁은 뭘 하나'라고 생각하다가, 역시 나이가 드니 이것도 귀찮다. 이런 날엔 다들 먹고 들어온다고 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친구들과도, 혼자서도 '나이 탓'을 하고 있을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나여~ 시골서 들깨사다가 기름 짜놨는데 마침 서울서 욱이 애비가 내려 왔잖어. 그래 그 편에 보냈으니께, 받아먹어. 김에 발라서 금방 구워먹으면 고소하고 참 좋아. 기름 받으면 네 엄마(친정)한테도 한 병 드려 봐. 밖에 바람 불고 추운데 거기도 춥지? 따시게 하고 그럼 잘 지내여~!"

시어머니였다. 게으름에 꼼지락거리던 내 몸이 용수철처럼 튀었다. '마흔이면 미지근해지고 쉰이면 맛이 가듯 쉬어 꼬부라지는 나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50살의 두 배에 가까운 연세인 어머니는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험난한 일정시대와 전쟁을 겪고 평생 농사일로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살아오신 구순의 어머니가 이제 겨우 50살을 바라보는 며느리 수다를 들었다면 참 가소롭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다.

어머니는 당신의 인품을 긍정과 열정으로 당당하게 가꾸어 오신 분이다. 결혼 20년쯤 되고 보니 어머니가 세상을 살아오신 '방식'이 주는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겠다. 93년이 구구절절이 상처와 아픔과 고생 투성였음에도, 49살 며느리 목소리보다 씩씩하다.

욕심을 접고 조급했던 마음을 내려놓다

MBC 드라마 <보석비빔밥>의 한 장면.
 MBC 드라마 <보석비빔밥>의 한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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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아홉 살 인생'을 다섯 바퀴 조금 넘게 돌았다. 한 바퀴 돌 때마다 뭔가 새로운 출발에 서서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홉은 막바지를 향해 가는 고비인 듯, 내겐 언제나 넘어서야 할 커다란 장애물 같았다.

동갑 친구 중에는 올해부터 부동산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가 있다. 동네 주변의 가게 간판 중에서 가장 많이 생기고 가장 많이 없어지는 게 '부동산' 간판이다. 친구는 '시작이 반'이라면서 이제 나머지 반만 더 가면 된다고 용기를 내고 있다. 친구는 어쩜 나이를 잊는 지혜를 일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홉(9)에 많은 의미를 담는다. 구곡간장(九曲肝腸)이란 말도 있고, 9회말에 역전의 드라마를 펼치는 야구경기도 있다. 9라는 숫자는 끝이 아닌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다. '구사일생'이라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혼신의 힘을 다하면 안 될 일이 또 무언가. 살아오면서 구구절절 잘 안 되는 일의 탓을 내가 아닌 남에게로 돌린 적이 많았음을, 쉰에 들어서면서 자백한다.

'아홉수'는 마법의 숫자가 아니다. 그 '마수(魔數)'는 내가 나를 스스로 옭아매는 '자충수(自充手)'이자 '자기 태만의 합리화'였다. 마흔 아홉에서 쉰으로 가는 지금, 나는 이것도 저것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포기하려고 한다. 눈앞의 이해득실에 연연하여 조급했던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더 큰 꿈과 지혜로 다가가는 것임을, 쉰살을 코앞에 두고 마흔 아홉을 살면서 깨달았다. 이것이 '지천명'일까? 그랬으면 참 좋겠다.


태그:#마흔아홉, #쉰, #5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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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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