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4.3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 4.3평화재단

 
"야, 새내기 니들! 종로로 술 마시러 안 갈래?"

스무살이던 1998년 3월 말이었습니다. 동기 녀석과 술 마실 건수 없나 국문과 과실을 어슬렁 거리는데, 91학번 선배 둘이 우리를 불러세우더군요. 뭘 망설였겠습니까. 좋아라 따라 나섰지요. 그런 시절이었죠. 주머니에 차비밖에 없어도, 뭣모르고 선배들 따라다니며 행복해했던 그런 시절.

어라. 근데 하늘 같은 27살 선배들이 데려간 곳은 일단 술집이 아니라 미술관이었습니다. 그때 처음 갔던 거 같습니다.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학고재' 미술관(갤러리) 말이지요. 아무런 배경도, 관련 지식도 없이 마주한 그림들은 실로 강렬했습니다. 역사화 같기도 하고 처연한 공포의 느낌이 지배적이었던 기억의 잔상이 꽤 오래남았던 것 같습니다.

1998년은 제주4.3 50주년이었고, 마침 4·3 50주년 기념 강요배 화백 <동백꽃 지다> 순회전이 열리고 있었던 거였죠. 이 직후 또 다른 문학 모임 선배가 건네준 <순이삼촌>을 읽었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초반부 제주도 방언으로 점철된 대화 내용을 선뜻 '해석'하기 쉽지 않았지만 갈수록 빠져드는 흡입력 있는 문장들과 실제 벌어졌던 사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민간인 학살의 묘사가 충격으로 다가왔더랬죠.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 덕분인지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을 읽을 당시 소설 속 제주4.3의 아픔이 더 선명하고 강렬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뚜렷합니다. 물론, 그날 91학번 선배들과 필름이 끊기게 술을 마셔서 그 기억이 약간 옅어지긴 했지만요.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8년 제주4.3 70주년부터 제주4.3을 전국에 알리는 일에 '용병'으로 종종 동참하게 됐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 스무살 기억이 영향을 미쳤겠지요.

3일 오후 4.3 창작뮤지컬 <순이삼촌>이 세종문회회관 대극장에서 상연됐습니다. 4일까지 2회 공연 무료 객석이 일찌감치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현기영 작가의 원작 소설이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것이 1978년이니, 대한민국의 중심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 현기영 작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지기까지 44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 또한 <순이삼촌>을 처음 읽은지 24년 만이라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더군요.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이 주는 의미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공연이 열린 세종문화회관.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공연이 열린 세종문화회관. ⓒ 하성태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공연이 열린 세종문화회관 피날레 무대.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공연이 열린 세종문화회관 피날레 무대. ⓒ 하성태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중에 누구 한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 소설 <순이삼촌> 중에서

이미 널리 회자된 <순이삼촌> 속 제주4.3을 정의하는 가슴 아픈 명문이다. 물론 오페라 <순이삼촌>도 이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원작자인 현기영 선생이 오프닝 프롤로그 무대에 직접 등장해 소설의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고 테너의 헌정곡이 울려 퍼지는데요. 4.3 예술의 원천이자 진앙지라 할 수 있는 <순이삼촌>에 대한 오페라식 헌사임이 분명하더군요.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시가 공동기획하고 제작한 4·3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이 제주밖 무대에서 선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20년 이후 제주에서 4차례 공연한 뒤, 지난해 연말 경기아트센터에서도 한차례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제주4.3 70주년 당시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고 외쳤던 퍼포먼스와 함께 제주4.3을 알렸던 본거지가 광화문이었던 점을 상기하면 서울, 그것도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첫 번째 공연은 4.3의 역사에 있어 기록할 만한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술총감독은 제주를 대표하는 성악인이자 그 자신도 4.3 유족인 강혜명 소프라노가 맡았습니다. 강 소프라노는 여기에 더해 주인공인 순이삼촌을 맡았고, 원작 소설의 각색에도 참여했는데요. 또 4.3 추념식 전야제 및 서울 추념식 등 4.3을 알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성악인이기도 합니다.

수년 간 <순이삼촌>의 오페라화를 준비했다는 강 소프라노는 지난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제주 출신 예술가로서 느낀 사명감을 가지고 <순이삼촌>을 만들게 됐다"며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을 때 현기영 선생님을 찾아가서 오페라로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고, 여러 번의 설득을 통해 작품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지요(관련 기사 : 4·3항쟁의 진실, 광화문을 거쳐 미국까지).

이 <순이삼촌>을 오페라로 만나는 일은 분명 신선하고 흥미로운 일인 동시에 제주4.3 자체가 전달하는 아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껴안는 시간에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소설보다 무대로 지평이 확장된 만큼 오페라는 소설 속 주인공 상수의 1인칭 회상으로 등장하는 북촌리 학살 사건을 정면으로 묘사하는데요.

도립제주예술단과 4·3평화합창단을 필두로, 극단 가람과 제주시뮤지컬아카데미, 밀물현대무용단 등 총 230여 명이 출연한 오페라 <순이삼촌>은 이러한 규모를 통해 관객들을 북촌리 학살 사건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군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이 총성으로 주민들을 겁박하고 군인들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것이죠.

각색 과정을 거친 만큼 원작과 다른 집중과 확장, 강조도 이뤄지더군요. 이를 테면, 토벌군에 참여했던 고모부의 성격을 더 명확히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상수와 길수의 등장으로 아이들까지 희생됐던 학살의 참혹함을 강조하는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기사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쥬"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순이삼촌이 어떻게, 왜 생을 마감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석도 담겼습니다. 비극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맞출 뿐 아니라 그 안에서 희생당하고 고통 당해야 했던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더군요.

또 <순이삼촌>은 강요배 화백, 강정효 사진가 등 4.3 예술을 대표하는 제주 예술인들이 참여한 만큼 무대 영상을 포함해 다채로운 시각화에도 공을 들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창작오페라라는 형식의 자유로움을 엿볼 수 있는 설정도 적지 않고요.

총 4막, 총 2시간 30여분에 달하는 공연 시간 안에 4.3의 진상을 알리려는 총체성을 담보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경주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페라 장르로서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를 수 있을 겁니다. <순이삼촌> 서울 공연은 그럼에도 첫 4.3 창작오페라라는 의미와 함께 제주4.3의 학살 현장을 무대에서 마주하는 일 자체의 무게감, 4.3을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한 노력과 존재감 만큼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4.3의 대중화, 전국화, 세계화를 위하여
 
 4.3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4.3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 4.3평화재단

 
 
 4.3 창작오페라 <순이 삼촌>.

4.3 창작오페라 <순이 삼촌>. ⓒ 4.3평화재단

 

강혜명 소프라노가 4.3의 헌정곡이라 할 수 있는 '잠들지 않는 남도'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서 가창했던 지난해 4.3 서울추념식을 직접 기획했었습니다. '서울 촌놈'이던 제가 제주4.3 70주년부터 제주4.3범국민위원회에서 '용병'으로 일하며 신문에, 광고에, 단편영화에, 영상 콘텐츠 기획에, 1시간 짜리 교육용 시나리오에, 국가 추념식 작가 및 기획에, 4.3과 친구들 영화제까지, 4.3을 홍보하기 위해 다채로운 일을 해왔는데요.

이를 통해 현기영 선생님을 직접 뵙고 고견을 들을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1941년생인 현기영 선생님은 그때마다 "젊은이들이 어서 4.3을 영화로, 대중영화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광주 5.18을 소재로 한 "<화려한 휴가>나 <택시 운전사>처럼 전 국민이 볼 수 있는 4.3 영화가 나와야 한다"고 말이죠. 또 4.3을 청년들에게 알리기 위해 좀 더 대중적이고 재미있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에 강조를 하시기도 했고요.

내년이면 제주4.3이 75주년을 맞습니다. 70주년 이후 4.3의 전국화와 대중화가 지속적으로 진척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처럼 제주4·3의 아픔과 토벌대의 학살로 아이를 잃은 어미의 슬픔을 4막의 오페라로 표현한 4.3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의 서울공연은 그러한 움직임을 전 국민에게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4.3의 의미와 교훈을 '육지 것들'에게 알리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소설 <순이삼촌>으로부터 44년. 현기영 선생님은 오페라 제작발표회에서 4.3의 발생 책임에 미국의 책임이 분명한 만큼 "미국에서도 <순이삼촌>이 꼭 공연되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창작오페라 <순이삼촌>과 같이 제주4.3을 전국에,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작품들이 이후에도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마지 않겠습니다. 
순이삼촌 제주4.3 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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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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