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시 토크는 스포츠에서 흔히 자극적인 말로 상대를 도발하는 일종의 심리전을 의미한다. 현역 시절 자극적인 트래시 토크의 1인자로 불렸던 NBA(미프로농구) 레전드 케빈 가넷(은퇴)은, "트래시 토킹이 상대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느낀 이후 좀더 전략적으로 써먹기 시작했다"고 밝히면서도 "일단 트래시 토킹은 실력이 받쳐줘야만 한다. 상대방의 반응을 이끌어내려면 기본적으로 농구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가넷은 새파랗던 신인 시절에 상대를 잘못 골라 트래시 토크를 함부로 시전하다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다. 1996년 2월, 당시 가넷의 소속팀이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시카고 불스를 상대로 접전을 벌였다. 한창 패기넘치던 가넷은 선전하는 팀동료들을 독려하는 과정에서 "네 상대는 너를 절대 막지 못 해. 그냥 짓밟아버려"라고 상대 선수를 자극하는 거친 언사를 끊임없이 쏟아냈다. 문제는 그가 도발한 상대가 바로 하필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이었다는 것.
 
까마득한 후배의 망언에 제대로 열받은 조던은 가넷을 잠시 노려보더니, 그때부터 경기에서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승부를 뒤집어버렸다. 몇분간 뭐에 홀린 듯 아무 것도 못하다가 벤치로 쫓겨난 가넷은 결국 팀동료들에게 자신의 입방정을 사과해야 했다고.

가넷이 은퇴 후 자신이 현역 시절 저지른 수많은 트래시 토크 중 유일하게 후회했던 순간으로 직접 꼽았던 에피소드다. 실력이 뒷받침 되지 못한 어설픈 트래시 토크가 오히려 자신과 팀에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마네킹' 더비, 흑역사로 끝나나
 
LG 이관희 '간다' 16일 경남 창원체육관에서 열린 '2022-2023 SKT 에이닷 프로농구 정규리그' 창원 LG 세이커스와 서울 SK 나이츠 4강 플레이오프 2차전. LG 이관희가 드리블하고 있다.

▲ LG 이관희 '간다' 16일 경남 창원체육관에서 열린 '2022-2023 SKT 에이닷 프로농구 정규리그' 창원 LG 세이커스와 서울 SK 나이츠 4강 플레이오프 2차전. LG 이관희가 드리블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22-2023시즌 서울 SK와 창원 LG의 KBL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는 이른바 '마네킹' 더비로 불리우고 있다. 창원 LG의 이관희가 4강 시리즈를 앞두고 "SK 수비는 나에게는 한 명의 마네킹에 불과하다"고 도발한 데서 비롯됐다.
 
NBA와 달리, 보수적인 한국농구 문화에서 그동안 상대팀이나 선수를 저격하는 트래시 토크가 드물었던 데다, 발언 자체도 상당히 수위 높은 편이었기에 이관희의 도발은 여러모로 큰 화제가 됐다.
 
이관희의 자신감에도 이유는 있었다. 이관희는 올시즌 SK와 치른 정규리그에서 6경기 모두 출전하여 평균 17점 3.2리바운드 3어시스트 1.5스틸, 3점슛 45.5%를 기록했다. LG 선수를 통틀어 SK를 상대로 가장 좋은 기록이었다. LG는 SK와 정규시즌 상대전적에서 3승 3패로 박빙이었으나 2위 싸움에서 승리하며 4강 직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관희로서는 중요한 봄농구를 앞두고 SK의 상승세를 견제하고 팀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앞장서서 '스피커'를 자처한 것.
 
하지만 가넷과 조던의 에피소드에서도 보듯이, 실력과 결과가 받쳐주지 못 하는 트래시 토크는 결국 '양날의 검'으로 돌아온다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LG는 이관희의 도발과 4강 직행 어드밴티지가 무색하게, 홈에서 열린 1, 2차전을 SK에게 내리 내주며 탈락 위기에 놓였다. SK는 14일에 1차전에서 73-68, 16일 2차전에서 92-91로 2연속 역전승을 거뒀다.
 
지난 시즌 디펜딩챔피언 SK는 정규시즌 6라운드부터 6강 PO플레이오프를 거쳐 4강전까지 내리 14연승을 달리는 폭발적인 상승세를 이어갔다. 특히 SK는 이번 봄농구 시즌에만 6강 2, 3차전, 4강 1, 2차전까지 두 자릿수 점수차 열세를 극복하고 거둔 승리만 벌써 4번이나 될 만큼 '역전의 명수'로 등극했다.
 
역대 4강 플레이오프 1, 2차전 연승 팀의 챔피언결정전 진출 확률은 100%(28회 중 28회)다. SK가 이대로 챔프전까지 진출한다면 2020-2021시즌 안양 KGC 인삼공사(정규리그 3위, 챔프전 우승)가 세웠던, 6강 PO부터 시작한 팀이 챔프전까지 '10전 전승'을 올렸던 기록을 재현할 수도 있다.
 
반면 2018-2019시즌 이후 4년 만에 봄농구로 돌아온 LG는, 4강 직행 프리미엄이 무색하게 플레이오프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 하고 스윕을 걱정해야 할 벼랑 끝에 몰렸다. LG는 통산 5할이 넘는 정규리그 승률(691승 665패, 승률 .510)과 달리 플레이오프 통산 승률은 현재까지 28승 52패(.350)에 불과할 만큼 유독 단기전에 약했다.
 
또한 LG는 '2위 징크스'도 있다. 올시즌을 포함하여 역대 프로농구 정규리그에서 5번이나 2위를 기록했는데 이 중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 것은 단 1번(2000-2001) 뿐이었다. 1997-1998시즌(vs. 부산 기아), 2002-2003시즌(vs. 원주 TG삼보), 2006-2007시즌(vs. 부산 KTF)에 올해 SK에 패한다면 3위팀에게만 역대최다인 4번이나 '업셋'을 당하는 불명예 진기록의 주인공이 될 위기에 놓였다.
 
LG에 별 도움 안 된 이관희의 도발
 
SK, LG에 1점 차 승리 16일 경남 창원체육관에서 열린 '2022-2023 SKT 에이닷 프로농구 정규리그' 창원 LG 세이커스와 서울 SK 나이츠 4강 플레이오프 2차전 종료 후 LG에 92대 91로 승리한 SK 선수단이 기뻐하고 있다.

▲ SK, LG에 1점 차 승리 16일 경남 창원체육관에서 열린 '2022-2023 SKT 에이닷 프로농구 정규리그' 창원 LG 세이커스와 서울 SK 나이츠 4강 플레이오프 2차전 종료 후 LG에 92대 91로 승리한 SK 선수단이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큰 소리를 쳤던 이관희의 시리즈 활약은 어땠을까. 1차전에서 이관희는 28분 25초를 소화하며 고작 6득점 3리바운드 3스틸에 그쳤다. 야투를 11개나 시도했으나 림을 가른 것은 3개 뿐이었고 3점슛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2차전에서는 19득점으로 레지 페리(31점 13리바운드)에 이어 LG 국내 선수중에는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리며 체면을 세웠다. 하지만 정작 원투펀치인 두 선수가 신경전을 벌이며 서로에게 패스를 제대로 주지 않으며 팀플레이를 망친 것인 것이 오히려 역전의 빌미를 허용했다. 또한 이관희는 결정적인 순간에 체력이 떨어지며 4쿼터 승부처에 벤치로 물려나야 했고, 팀이 경기 종료 직전 SK 리온 윌리엄스에게 역전 위닝샷을 허용하며 무너지는 모습을 허탈하게 지켜봐야 했다.
 
반면 이관희가 마네킹이라고 평가절하했던 SK 선수들은? 모두 중요한 순간에 펄펄 날았다. 1차전에서 최성원과 최원혁, 오재현 등은 평소보다 더욱 열정적인 수비로 달려들며 이관희를 꽁꽁 묶었다. 이관희의 전매특허인 '시계 세리머니'를 따라하거나 패러디하는 장면들도 눈에 띄었다.
 
2차전에서는 허일영이 돋보였다. 전문슈터인 허일영은 최성원이나 최원혁처럼 수비가 능한 선수는 아니다. 허일영은 수비에서 이관희를 1차전처럼 잘 막지는 못했지만, 대신 이관희보다 더 많은 24점을 올리며 공수마진에서 오히려 우위를 점했다. 2점슛 성공률 100%(4/4)와 자유투 성공률 100%(7/7), 3점슛 성공 개수(3개)와 성공률(50%) 등 효율성에도 모두 이관희보다 월등한 우위였다.
 
허일영은 이날 승리 이후 아예 직접적으로 이관희를 언급했다. "이관희가 우리 선수들을 마네킹이라고 이야기하더라. 하지만 최원혁, 최성원, 오재현은 모두 수비 5걸에 선정된 바 있는 선수들"이라고 동료들을 옹호하며 "이관희도 나에게 점수를 많이 줬다. 이관희가 우리 앞선 자원을 마네이킹이라고 생각하듯, 나도 이관희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반박하며, 코트에 이어 입담에서도 제대로 복수했다. SK 선수들도 내색은 안 했지만 이관희의 발언을 듣고 상당히 이를 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이관희의 트래시 토크 시도 자체가 '잘못된 언행'이었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너무 선을 넘지않는 범위라면, 이러한 적당한 신경전도 승부의 재미를 높여주는 양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시리즈만 놓고 봤을 때 이관희의 도발이 결과적으로 LG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된 반면, 오히려 SK 선수들의 승부욕과 전투력을 높여주는 자극제가 되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시리즈가 이대로 반전없이 SK의 완승으로 끝나면, 이관희의 마네킹 발언은 두고두고 엄청난 흑역사로 남게 될 전망이다. 과연 이관희와 LG는 벼랑끝에서 무언가 반전을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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