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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르메니아에는 기차를 타고 들어올 생각이었습니다. 국경이 폐쇄된 아제르바이잔과 달리,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사이에는 육로 국경이 열려 있으니까요. 국제 열차도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4월 15일부터, 한국 정부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국경 지역에 여행 금지 조치를 내렸습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국경으로부터 30km,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국경으로부터 5km 내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여행 금지 지역에 방문하는 경우에는 여권법에 의해 최대 징역 1년까지 처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저야 국경 지역에 방문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예레반은 국경으로부터 멀리 있으니 별 문제가 없었죠. 문제는 기차가 통과하는 경로였습니다. 아르메니아의 경우, 국경으로부터 30km면 국토의 거의 절반이 여행 금지 지역에 들어가게 됩니다.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가는 기차도 해당 지역을 통과합니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의 여행경보 상황. 검은 영역이 여행금지구역이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의 여행경보 상황. 검은 영역이 여행금지구역이다.
ⓒ 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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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코카서스 지역에 전쟁의 위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잠재적인 분쟁의 불씨가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많이 잊혀졌지만, 2020년에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전쟁을 벌였으니까요. 코카서스 지역은 여러 영토 분쟁을 안고 있는 곳입니다. 아르메니아도 마찬가지죠. 아제르바이잔과도, 튀르키예와도 영토 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튀르키예의 경우, 서아르메니아 문제가 있습니다. 1차대전 이후 아르메니아는 잠시 독립 국가를 꾸렸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의 패전국이 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소비에트 혁명으로 무너지고 있던 상황을 틈탄 것이었죠.

당시 1차대전의 승전국은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과 '세브르 조약'을 체결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 북동부 지역이 아르메니아로 편입될 예정이었죠. 이 지역은 학살 이전까지만 해도 아르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던, '서아르메니아'로 불리던 지역이었으니까요.
 
세브르 조약에 따른 오스만 제국 분할안
 세브르 조약에 따른 오스만 제국 분할안
ⓒ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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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합의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분할에 반발하며 튀르키예 독립운동이 벌어졌고, 오스만 제국 대신 튀르키예 공화국이 성립했으니까요. 튀르키예는 서아르메니아 지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동아르메니아에 존재하던 독립 아르메니아도 곧 소비에트에 편입되며 짧은 독립의 역사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분쟁의 역사는 남았습니다. 언급했듯 서아르메니아 지역 역시 과거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지역은 현재까지도 튀르키예의 땅으로 남았습니다. 특히 아르메니아 민족의 영산으로 알려진 아라라트 산이 튀르키예 영토가 된 것에, 아르메니아인들의 불만이 많았습니다.
 
예레반 시내에서 보이는 아라라트 산
 예레반 시내에서 보이는 아라라트 산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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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은 이미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이 문제였죠. 이 땅은 아제르바이잔 영토 안에 있지만, 아르메니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을 아르메니아의 영토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몇 차례 소련 중앙 정부와 갈등을 겪었고, 1990년에는 '신아르메니아군'이라는 별도의 군대도 창설합니다. 이후에는 이 군대가 소련 연방군과 충돌을 벌이기도 하죠. 아르메니아는 소련 해체 1년 전인 1990년 이미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코카서스 국가 중 가장 빨랐죠.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과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주변 지역까지 장악하는 승리를 거두었죠. 하지만 그 뒤 대부분의 옛 소련 국가와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는 경제 위기를 겪었습니다.

특히 아르메니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비용까지 들여야 했고, 결과적으로 주변국의 제재를 받게 되었으니까요. 결국 대통령이 사임하고, 총리와 국회의장 등이 암살당하는 정치적인 혼란까지 이어졌습니다.

분쟁 지역은 아니지만, 나히츠반 지역 역시 불안의 요소였습니다. 나히츠반은 아제르바이잔 본토와는 떨어져 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입니다. 아르메니아 남부와 국경을 접하고 있죠. 덕분에 아르메니아에게는 안보상 불안한 요소일 수밖에 없었죠.
 
아르메니아 정부청사와 국기
 아르메니아 정부청사와 국기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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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변국과 분쟁을 겪고 있다보니, 아르메니아가 의지할 수 있는 국가는 러시아 뿐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겪었지만, 직접 군사적 위협이 되는 주변국에 비해서는 손을 내밀 수 있는 상대였죠.

튀르키예와의 사이에는 학살의 기억이 남았습니다. 아제르바이잔과는 여전히 전쟁의 기억이 있죠. 결국 이들보다는 러시아를 택한 것입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아르메니아가 러시아나 이란의 정치 노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르메니아는 자유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습니다. 유럽이나 서방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해 왔죠.

2018년에는 시민 혁명도 경험했습니다. 당시 아르메니아의 세르지 사르키샨 대통령은 의원내각제로 헌법을 바꾸고, 스스로 총리가 되어 정권을 연장하고자 했습니다. 러시아의 푸틴과 같은 방식입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시민들은 반발했습니다. 시민 혁명이 벌어졌죠. 그렇게 야당 지도자 니콜 파슈난이 총리직에 올랐고, 현재까지 집권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22년 <이코노미스트>지가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에서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 국가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물론 러시아나 튀르키예보다도 높은 점수를 기록했죠.
 
예레반 공화국 광장
 예레반 공화국 광장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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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르메니아는 지금까지도 어떤 모순을 안고 있는 셈입니다. 아르메니아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국가입니다. 서방 세계에 가까이 가고자 노력하는 국가죠. 하지만 주변국과 분쟁을 겪고 있는 아르메니아에게 남아 있는 현실적인 선택지는 러시아와 이란 뿐이었습니다.

오늘도 예레반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추모비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학살 당시 사라진 마을의 이름을 적은 벽이 서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마을의 이름입니다. 그 추모비 앞에는 러시아에서 보낸 조화만이 서 있었습니다.

언급했듯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짧은 전쟁을 벌였습니다. 서방 세계는 양국에 휴전을 촉구했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습니다. 튀르키예가 아제르바이잔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상황에서, 쉽게 반대편에 설 수 없었던 것이죠. 결국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종결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 역시 러시아의 길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한 규탄이, 결코 반성하지 않는 역사적인 상처나 여전히 불씨가 남은 영토 분쟁보다 우선할 수 있을까요.
 
아르메니아 대학살 기념비 앞 러시아의 조화
 아르메니아 대학살 기념비 앞 러시아의 조화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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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때 해소되지 못한 역사는 그렇게 더 복잡한 문제를 남긴 셈입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도, 영토 분쟁도 분명 복잡한 문제입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어려운 문제죠.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복잡한 문제이니, 그저 외면해 버리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손쉽게 칼로 쳐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심하고 정밀한 접근은 버겁고 복잡하다고 말합니다. 정치인의 선언이나 합의문 몇 장으로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것에 자원을 낭비할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죠.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사례가 보여주듯, 쉬운 해결은 결코 쉬운 결과를 낳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켜켜이 쌓인 모순만을 남기게 되죠. 자유와 평화를 누구보다 갈망하지만, 그를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 같은 모순을 남깁니다.
 
어머니 아르메니아 상
 어머니 아르메니아 상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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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책임은 방관하고, 상대방은 모두 똑같은 적으로 설정하고, 서로의 선의를 불신하고, 한 마디 선언으로 쌓인 감정이 모두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언젠가 더 어려운 선택지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겠지요.

아르메니아 대학살 문제도, 코카서스의 영토 분쟁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때 들이지 못한 노력이, 이제는 모순과 갈등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튀르키예와 러시아, 그리고 아르메니아라는 더욱 복잡한 변수가 되어 돌아온 것이죠. 우리의 과거사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의미 없어 보여도, 세심하고 정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들일 수 있는 노력을 최대한 들여야만 합니다. 서로의 선의를 믿어야 하고, 믿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선언이나 결심으로 쉽게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지 말아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지만, 오히려 저는 그것이 가장 쉬운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아르메니아, #예레반, #코카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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