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녁 먹을 무렵 "선생님 목 아프니까 조용히 해라"는 뜬금없는 말로 아빠인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던 아들 강민이, 저녁공부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또 한 마디 내던진다.

 

"오늘부터 내가 선생님이다."

"오늘부터 강민이가 선생님이라고? 그래, 알았어."


왜 느닷없이 자기가 선생님이라고 하는지 의아해 하면서도 나는 선뜻 그러자고 했다. 아들이 하겠다는 걸 어느 부모가 막겠는가? 더구나 나쁜 것도 아니고 '선생님'하겠다는데.


아빠와 저녁공부를 마치면 강민이는 세수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런데 강민이가 잠들기까지 우리 부부에게는 한 가지씩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내는 동화책을 읽어 주어야 하고, 나는 옛야기(옛날이야기)를 하나 해줘야 한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아내의 몫이지만, 어떤 책을 읽을지는 강민이가 결정한다. 오늘 읽을 책은 강민이가 좋아하는 커다란 공룡 책이다. 오늘따라 몸이 좀 피곤한 아내는 커다란 책을 보고 지레 겁을 먹는다.

 

"이걸 다 읽어? 강민아, 책이 너무 크다. 오늘은 조금만 읽자."

"안돼! 다 읽어야 돼!"


엄마와 아들 사이에 한동안 서로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더니 결국 앞 부분 몇 장만 읽는 것으로 합의를 보는 것 같다. 아내가 동화책을 읽기 시작한다. 오늘은 책의 첫 부분에 굵은 글씨가 나왔기 때문에 강민이가 먼저 읽게 되었다. 책의 굵은 글씨는 항상 강민이가 읽는다.


"쿵쿵쿵…, 두두두…."

 

강민이가 제법 분위기를 잡으면서 읽는다. 발음도 정확하다. 강민이가 책을 읽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가나다라'도 모르던 녀석이 어느새 글을 배워 책을 읽다니. 강민이가 굵은 글씨를 읽고 나자 아내가 다음 구절을 읽는다.

 

"지금부터 8천만 년 전 마멘치사우루스 마을에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요."


아내가 동화책을 읽는 동안 강민이는 마치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도 되는 듯 진지하게 듣는다. 가끔씩 질문도 해 가면서.


강민이가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은 '왜?'이다. 강민이는 늘 '왜?'를 입에 달고 다닌다. 엄마 아빠가 무슨 말만 하면 '왜?'하고 묻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많이 하는 질문이 '누가 이겨?'이다. 강민이의 관심은 늘 누가 더 힘이 센지 누가 이기는지에 집중된다. 특히나 오늘처럼 공룡 이야기책을 읽을 때면 이런 관심과 질문 횟수는 더욱 많아진다. 아내는 책을 읽는 동안 쏟아지는 강민이의 질문에 답하느라 진땀을 뺀다.


동화책 읽기가 끝나면 강민이는 "아빠, 옛야기"하고 소리친다. 아내가 동화책을 읽는 동안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고민하지만 신통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지금까지 하던 대로 어제 했던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만 조금 바꾸기로 했다. 얼마 전에 직접 동화 한 편을 창작한 후로는 그 줄거리에다가 등장인물만 바꿔가면서 옛야기 시간을 때우고 있다.


일곱 살인 아들 강민이는 잠자기 전에 꼭 아빠한테 옛야기(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야기 소재도 많았고(토끼와 거북이, 흥부 놀부, 귀신이야기시리즈, 도깨비 이야기 등) 또 내 이야기를 귀를 쫑긋하고 듣는 아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힘든 줄 몰랐다. 이야기 듣는 아들보다 이야기 하는 내가 더 즐거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들에게 '옛야기' 들려주는 게 힘겨운 노동으로 다가왔다. 이야기 거리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때워나가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귀신이야기도 다 써먹었다. 철수와 영희 시리즈도 더 이상 짜낼 게 없다. 흥부와 놀부, 토끼와 거북이는 벌써 재탕에 삼탕까지 해 먹었다.


밑천은 이미 다 드러났는데 하루에 한 번씩 어김없이 찾아오는 '옛야기' 시간. 어쩔 수 없이 나는 무디어지고 말라버린 나의 문학적(?) 상상력을 끄집어내어 직접 '창작'에 나서게 되었다. 나의 모든 지식과 상상력을 다 동원하여 며칠간을 끙끙거린 결과 한 편의 창작동화가 완성되었고, 그날 저녁 나는 아들에게 순수 창작동화 한 편을 들려주었다.


"강민아, 아빠가 옛야기 해줄게. 옛날에 우물가에 개구리가 하나 살고 있었거든?"

"응."

 

"그런데 그 개구리가 우물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무슨 노래?"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


"근데 우물가 건너편에 있던 뱀이 개구리의 노래를 듣게 된 거야."

"…."


"어, 이게 무슨 소리야. 개구리 노랫소리 아냐? 배고프던 참에 잘 됐다. 잡아먹어야지."

"…."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슬금슬금 개구리 옆으로 다가갔어."

 

이때 아들 녀석 침을 한 번 꼴깍 삼킨다.


"그런데 개구리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거야. 개굴개굴 개구리…"

"…."


"살금살금 개구리 옆으로 다가간 뱀이 커다란 입을 벌려서 개구리를 막 삼키려는 순간…."

"…."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나~았게?"

 

클라이막스를 들려주기 전 아들에게 슬쩍 질문을 던진다. 아들의 관심과 궁금증을 극대화 시켜보자는 전략이다.


"어떻게 되었는데?"

 

결과가 궁금했던지 아들 녀석은 나에게로 몸을 바싹 붙이며 되묻는다. 일단은 내 전략이 성공한 것 같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쩍 벌리는 순간, 모기 한 마리가 뱀 콧구멍으로 들어간 거야."

"그래서?"


"그래서 뱀이 재채기가 난 거야. 에취 에취. 아이고 가려워. 내 콧구멍에 누가 들어간 거야? 누구야?"

"히히히히히."

 

아들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린다.


"뱀이 재채기하는 소리를 듣고 개구리는 뱀이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온 것을 알았어. 깜짝 놀란 개구리는 얼른 우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지. 그래서 개구리는 뱀에게 잡혀먹히지 않고 살아났대요. 옛야기 끝."

 

"재밌다. 또 해줘."


그날 아들 녀석은 아빠의 창작동화를 아주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앵콜까지 신청했다. 기대 이상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옆에 누운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내 창작 실력이 괜찮은 모양이지. 이 길로 한 번 나가볼까?"

"좋으실 대로 하세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물어본 말이었는데, 어이없다는 듯한 아내의 반응에 나는 깨끗이 마음을 비웠다.


옛날이야기가 끝나면, 우리 부부는 강민이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한다.

 

"강민아, 잘 자."

 

그러면 강민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빠 잘 자. 아빠 사랑해."


그런데 오늘은 강민이가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한테 '잘 자' 그러면 안 되거든."


아차, 그러고 보니 실수다. 오늘부터는 강민이가 선생님인데.

 

"강민아, 미안해. 아니 죄송해요, 선생님."


나는 황급히 아들 선생님께 사과드리고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히 주무세요."


그러자 아들 선생님도 아빠에게 인사를 한다.

 

"응, 아빠도 안녕히 주무라!"


태그:#옛날이야기, #책읽어주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