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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 캐릭터의 진수를 보여줬던 <겨울새> 주경우역을 맡은 윤상현(맨 왼쪽)
 '찌질' 캐릭터의 진수를 보여줬던 <겨울새> 주경우역을 맡은 윤상현(맨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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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은 유난히 드라마 시장이 어려웠던 한 해였다. 끝을 모르고 치솟는 주연배우들의 출연료 탓에 제작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반대로 광고 수익은 줄어들어 방송국, 제작사 가릴 것 없이 저마다 어려움에 아우성쳤다.

몇 년 동안 아시아를 달궜던 한류 붐도 서서히 그 열기가 식어갔다. 결국 관계자들은 자구책 마련에 나섰고, 주연배우 출연료 상한제 도입이 추진되는가 하면 몇몇 배우들은 자진해서 출연료를 깎기도 했다. 최근까지 드라마가 방송되던 몇몇 시간대는 비교적 제작비가 적게 드는 예능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힘든 한 해였지만 그 와중에도 드라마는 그치지 않고 계속 만들어졌고, 방영됐다. 그중에는 시청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성공한 드라마가 있는가 하면, 시청자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받은 실패한 드라마도 있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감독의 빼어난 연출? 이름 있는 작가의 눈물 쏙 빼는 극본? 명배우의 물 오른 연기? 물론 이런 것들도 다 중요하다. 하지만 드라마상에서 설정되는 캐릭터를 빼고 드라마의 성공을 논할 순 없을 것이다.

캐릭터를 보면 드라마를 알 수 있다. 하나의 좋은 캐릭터가 만들어지려면 먼저 극본이 좋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극본을 소화하는 배우의 연기가 좋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걸 화면에 담아내는 감독의 연출력이 뛰어나야 한다. 결국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을 때, 비로소 그럴싸한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다.

따라서 시청자들이 배우의 이름 대신 극중 인물의 이름을 더 많이 알 때, 드라마의 제목보다 캐릭터를 먼저 떠올릴 때, 그 드라마는 성공한 드라마라 평할 수 있다.

2008 브라운관, '찌질이' 캐릭터가 접수

2008년 방송된 수많은 드라마 중 단연 돋보였던 캐릭터들을 선택하라면, 단연 '찌질이' 캐릭터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찌질이'. 약간 모자란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캐릭터들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짜증을 유발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측은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또 이들은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해 다음 회를 꼭 보게 만드는 그런 매력을 뽐내기도 한다.

올 초 방영된 MBC 주말드라마 <겨울새>의 주경우(윤상현 분)는 마마보이와 의처증으로 대변되는 '찌질이'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부동산업을 하는 억척스러운 홀어머니(박원숙 분) 밑에서 곱게 자란 주경우는 뭐든지 어머니 말대로 한다. 자기 뜻이나 의지가 없다.

어려서부터 어머니한테 억압받으면서 자란 탓에 성격이 삐뚤어지고 괴팍하다. 평소에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지만 순간 감정이 치솟아 오르면 난폭해진다. 화를 냈다가 울고, 웃다가 폭력을 행사하는, 감정선이 복잡한 캐릭터를 배우 윤상현은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실제로 <겨울새>의 시청률은 10%대 초중반으로 경쟁작인 SBS <조강지처 클럽>에는 늘 뒤졌으나, 시청자들은 "아드님(극 중 박원숙이 윤상현을 부르는 호칭) 때문에 드라마를 본다"며 윤상현의 연기를 극찬했다.

대한민국 대표 '찌질이'하면 역시 <조강지처 클럽>의 한원수(안내상 분)를 빼놓을 수 없다. 악랄한 찌질남의 대표주자 한원수를 연기한 덕분에 배우 안내상은 가족들과 같이 외출하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극중 한원수는 조강지처 나화신(오현경 분)과 부부 사이다. 그런데 어느날 모지란(김희정 분)과 바람을 피우게 되고, 그녀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화신에게 온갖 패악을 부린다. 이 과정이 아주 가관이다. 결국 견디다 못한 화신이 집을 나가고, 뜻대로 지란과 같이 살게 된 원수. 그런데 여기서부터 점차 그의 찌질 연기는 빛을 발한다.

집을 뛰쳐나간 화신은 구세주(이상우 분)의 도움을 받아 디자이너로 화려하게 변신, 당당한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게 되고 이 모습을 지켜본 원수는 다시금 화신에 대한 사랑이 싹트며 이젠 지란과 헤어지려 한다.

그러면서 지란을 내쫓기 위해 부리는 패악은 이전에 화신에게 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런 상식이 결여된, 비정상적인 악랄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안내상은 전에 없던 오버스러움을 곁들여 한원수라는 인물을 어딘가 모자란, 바보 같은 캐릭터로 버무려낸다. 그런 연기를 주문한 문영남 작가도 대단하지만, 끔찍하리만큼 잘 표현한 안내상의 연기 내공도 대단하다.

'찌질이' 주경우·한원수·박재성 계보 잇는 정교빈

2008 찌질 캐릭터의 계보를 잇고 있는 <아내의 유혹> 정교빈역을 맡은 변우민.
 2008 찌질 캐릭터의 계보를 잇고 있는 <아내의 유혹> 정교빈역을 맡은 변우민.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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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워킹맘>의 봉태규는 무능력하고 뻔뻔한, 철면피 찌질남 박재성을 기가 막히게 연기했다. 직장 상사 최가영(염정아 분)을 임신시켜 결혼에 골인한 재성은 뻔뻔스러움과 바람기를 겸비한 캐릭터로 시청자로부터 원성을 샀다.

이혼한 아내의 집에 들어가 자신의 아이들과 가사를 책임지는 입주 도우미가 되었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은 봉태규 특유의 코믹스러운 이미지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튀지 않았다. 이런 봉태규의 능청스러운 찌질남 연기로 <워킹맘>은 대작들과 경쟁하는 속에서도 순항할 수 있었다.

최근 첫방을 내보낸 SBS <아내의 유혹>은 최근 무섭게 상승세를 타고 있다. 시청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 시간대(저녁 7시 20분 방영)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나날이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며칠 전 시청률 20%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소 빤한 설정의 통속극을 잘 살려내고 있는 건 장서희, 변우민, 김서형 등 주연배우들의 두드러진 캐릭터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조강지처 구은재(장서희 분)를 배신하고 그녀의 친구 신애리(김서형 분)와 바람난 남편 정교빈을 연기하는 배우 변우민의 연기력은 시청률 상승의 일등공신이다. 독하면서도 우유부단하고 어눌한 찌질남을 실제인양 연기하는 변우민의 연기는 시청자를 TV 앞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까칠 캐릭터에 열광

극 초반 비호감을 극복하고 많은 인기를 끌었던 <엄마가 뿔났다>의 고은아.
 극 초반 비호감을 극복하고 많은 인기를 끌었던 <엄마가 뿔났다>의 고은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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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찌질이 캐릭터와 함께 올 한 해 브라운관에서 빛났던 캐릭터가 있다면 단연 '까칠' 캐릭터를 꼽을 수 있겠다.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자신이 최고라고 믿는, 그래서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기만 아는 독불장군 스타일의 캐릭터가 올 한 해 브라운관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중에서 SBS <온에어>의 오승아(김하늘 분)는 드라마 방영 기간은 물론 종영 이후에도 단연 화젯거리였다.

톱스타 오승아를 네 글자로 표현하는 데 있어 '오만방자', '안하무인'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있을까? 마음에 안 드는 후배한테 물을 끼얹고, 감독이건 작가건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오승아의 모습은 시청자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칫 단순히 건방진 톱스타로 비춰질 수 있는 오승아란 캐릭터를 시청자에게 사랑받는 진짜 국민요정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디테일한 감정 연기를 잘해낸 김하늘의 공이라 할 수 있겠다. 덕분에 김하늘은 오랫동안의 침체기에서 벗어나 다시금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이름 석 자 그 자체로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 된 김수현 작가의 화제작 <엄마가 뿔났다>의 고은아(장미희 분) 역시 까칠 캐릭터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가정 형편이 기우는 집에서 들인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겨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 캐릭터는 사실 흔하다. 너무나도 많이 그려진만큼 이 캐릭터는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다고 봐야겠지만, 김수현 작가와 배우 장미희는 그렇기 때문에 자칫 평면적일 수 있는 고은아란 인물을 생생하게 입체적으로 잘 그려냈다.

극중 주변인물들이 그녀를 평가함에 있어 '철이 덜 들었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그녀의 정신연령이 다분히 유아기적 상태임을 암시한다. 좋게 말하면 때묻지 않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며느리(이유리 분)에게 상처가 될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는다. 그런데 이게 어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다른 드라마에서처럼 며느리를 구박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며느리를 내쫓기 위함도 아니다.

그냥 그때 그때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다. 상대가 상처받을 거란 건 안중에도 없다. 시청자가 싫어할 법도 한데, 오히려 고은아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 됐다. 까칠하고 오만하지만 의외로 허점과 빈틈이 많은, 아주 재미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학력 위조 의혹으로 주춤했던 장미희는 이 드라마로 완벽하게 일어섰고, 광고 시장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매력적 캐릭터가 드라마 성패 좌우한다

'까칠'캐릭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까칠'캐릭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 i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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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 캐릭터를 논하면서 '강마에'를 빼놓을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이, 배우 김명민보다,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 제목보다 더 유명해져 하나의 사회적 신드롬으로 확산된 강마에의 인기 비결은 단연 까칠함에 있다.

그냥 까칠하기만 한 게 아니다. 독선적이고 오만하다. 오케스트라 단원을 스스럼없이 '내 것'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신랄하다. 달변가이면서 독설가다. 자신의 단원을 거리낌 없이 '똥덩어리'라고 부르며 모욕을 준다.

그런데 또 이런 까칠함 속에는 따뜻한 내면이 숨어 있다. 지휘자인 자신을 제외한 모든 단원들을 물갈이하려는 시장의 요구에 반대하며 그들을 지키려 애쓴다.

재능이 뛰어난 제자(장근석 분)가 자신처럼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더 좋은 곳으로 떠나보내려 한다. 지휘에 있어서도 그는 오만하고 독선적이지만 잘못된 길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의 판단은 언제나 옳다.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뛰어난 리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청자는 강마에에 빠져들었다.

최근 종영한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의 손규호(엄기준 분)는 드라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였다. 비록 드라마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엄기준은 주연인 송혜교나 현빈보다 더 많은 관심과 집중을 받았다.

아버지는 대선을 준비하는 국회의원, 그 자신은 작품만 했다 하면 대박을 터뜨리는 인기 감독, 뭐 하나 부러울 게 없어 연애도 시시하고, 저 잘난 맛에 사는 손규호란 까칠한 인물은 그래서 늘 어딘가 외롭고 허전해 보인다. 술에 취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속내를 털어놓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정지오(현빈 분)를 누구보다 많이 생각하고 의지한다. 연애에 있어서도 때론 한없이 순정파가 된다. 배우 엄기준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올 한 해 드라마에선 유독 찌질한 캐릭터와 까칠한 캐릭터가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런 캐릭터들의 특징은 상당히 입체적이며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기존의 선악구도, 단순한 이분법적 캐릭터에서 벗어나, 밉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멋있지만 허점이 많은 매력적인 캐릭터. 그것은 이제 시청자들이 평면적이고 단조로운 캐릭터에 싫증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존재는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한다. 상투적인 인물 만들기에서 탈피하기 위한 작가, 배우, 감독의 노력이 모두 필요한 때다. 이런 드라마의 내적 구성을 다지는 일 또한 어려운 드라마 현실을 타개하는 하나의 개선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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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드라마캐릭터, #찌질이, #까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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