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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위
 민방위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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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인 4월 1일, 1년차 민방위 교육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였지만 사람들이 고분고분 따른 결과로 예정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담당자는 선심이라도 쓰듯이 으스대며 "말 잘 들으면 이렇게 일찍 끝내준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더군요.

6년간의 지루하고 고달픈 예비군 훈련이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민방위 교육훈련소집통지서를 받고는 기가 찼습니다. 언제까지 '적의 무력침공과 공습에 대비한 민간방위활동, 전쟁대비활동'이란 명목의 준군사훈련에 용기가 없어 양심적 병역 거부도 못한 저를 동원하려는 건지 답답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육훈련에 참가합시다'라는 구호 아래 공지에는 "현행 비상소집 훈련대상은 민방위대원 5년차 이상부터 만 40세까지입니다"라고 나와 있더군요. 40년간 뭐하나 해준 거 없는 듯한 국가가 개인은 철저히 이용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런 답답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자전거에 싣고 이른 아침부터 민방위 교육장으로 내달렸습니다. 인천시의 막개발로 오랜 갈등을 빚고 있는 가정오거리를 지나 율도 입구를 지나 석남1동 주민센터에 이르니 체육공원 지하에 자리한 민방위 교육장이 보였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통제 방법은 지정좌석제

민방위 교육장
 민방위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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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위 장비 전시대
 민방위 장비 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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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위 교육훈련 대상자들은 '교육 10분 전 입실'이라는 안내에 맞춰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습니다. 그들을 쫓아 지하에 내려가니 다소 어두운 형광 불빛 아래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고 교육장 앞 복도에는 민방위 장비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볼품없는 것들이었는데 가장 눈에 띈 것은 '국민방독면'이었습니다. 2006년 당시 정부가 지하철역 등에 보급한 방독면 가운데 41만 개가 '불량'으로 판정되어 사회적 물의를 빚은 바 있습니다. 민방위 교육장에 전시된 '국민방독면'은 불량제품은 아니겠지만, 허술한 정부의 국민방독면 보급사업으로 돈을 챙긴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파마머리에 화장을 하고 아이보리색 민방위복과 완장을 찬 마네킹도 눈에 띄더군요.

전시장비를 구경하는 사이 공익근무요원들이 나와 자리를 잡더니, 좌석번호가 적힌 교육확인표 용지를 나눠주면서 신분증을 대조해 본인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늘어선 줄을 따라 교육확인표 용지를 받아 인적사항을 기재하고는 교육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여기서도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해야 하더군요.

교육장은 널찍한 지하 강당이었는데 프리젠테이션을 하려는지 빔프로젝트와 노트북이 무대 앞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교육관은 교육확인표를 작성 중인 사람들로 하여금 교육장 안 해당 좌석에 앉으라고 재촉했습니다. 교육확인표를 꼭 가지고 있어야 하고 교육 중에 해당 좌석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또한, 전날 민방위 훈련을 예로 들며 몰래 빠져나가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훈련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알쏭달쏭한 경고는 의례적으로 하는 말인데, 사람들은 이 말에 꼼짝달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번거로운 민방위훈련을 또 받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 때문입니다. 둘러보니 모두 하나같이 교육확인표를 손에 꼭 쥐고 있었습니다.

"교육 중 자리 이탈 시 불참 처리!"

좌석을 벗어나면 또 민방위 훈련 받아야 한다??
 좌석을 벗어나면 또 민방위 훈련 받아야 한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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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위 교육확인표
 민방위 교육확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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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관은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자 국민의례를 하겠다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어색한 국민의례 끝에 애국가를 부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신성한(?) 의식이 끝난 뒤 본격적인 민방위 교육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첫번째은 자연요법에 의한 개인 건강관리와 관련된 것이었고, 두번째는 화재안전, 세번째는 전기안전, 네번째는 응급처치에 대한 동영상이 상영되었습니다. 강사가 다소 지루한 프리젠테이션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는데 교육내용들은 그다지 와닿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예비군훈련 받을 때 실시하는 정신교육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굳이 민방위 교육훈련에서 하지 않아도 되는 교육을 해대는 통에,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 청하는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지루한 강의 대신 책을 읽을까 했는데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소리 때문에 그럴 수도 없더군요. 그나마 잠을 잔다고 뭐라 하는 이가 없어 다행이었습니다.

지하벙커에서 꼼짝없이 3시간을 보낸 뒤에야 '본인소지용 민방위 교육확인표'를 받고 바깥세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민방위 훈련을 끝낸 이들은 훈련을 받으러 들어갈 때처럼 담배를 빼어 물고는 각자 어디론가 바삐 사라졌습니다. 만우절처럼 매년 반복되는 아무것도 아닌 민방위 훈련을 받고 난 뒤의 허탈함을 담배연기에 뿜어대면서 말입니다.

1년차 민방위 교육훈련을 받아 보니 시간만 축내는 훈련을 즐겁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그냥 선잠을 자는 데 만족하는 게 가장 속 편할 듯싶습니다.

민방위 교육확인표를 작성하는 사람들
 민방위 교육확인표를 작성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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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위 교육확인표를 받자마자 사람들은 교육장을 신속히 빠져나갔다.
 민방위 교육확인표를 받자마자 사람들은 교육장을 신속히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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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민방위, #교육훈련, #군사훈련,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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