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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 대웅전. 지붕을 보는 순간 임진왜란 때 왜장들 투구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동국사 대웅전. 지붕을 보는 순간 임진왜란 때 왜장들 투구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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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1910년) 이후 일제치하(36년)에서 전국에 일본식 사찰이 500여 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모두 없어지고 유일하게 남은 것이 군산의 동국사(주지 종명 스님). 1909년 일본 승려에 의해 개창된 동국사는 치욕의 역사를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지난 10일 군산시 금광동 월명산 아래 자리한 동국사를 찾았다. 사찰로 향하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는데 중고생 시절 추억들이 시나브로 떠올랐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급우들과 일제가 세운 월명산 보국탑(報國塔) 부근에서 놀다가 동국사 범종 소리를 듣고 붉게 물드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기 때문.

시내 중심가에서도 자동차를 구경하기 어려웠던 1960년대. 그때만 해도 동국사 범종 소리 여운이 30리(12km) 밖 대야(大野) 면사무소에서도 들렸다 한다. 그렇게 시민과 함께 해온 범종 소리도 소음공해로 1980년대 중반 사라져 이제는 아련한 추억의 소리가 되었다.  

옛날에 동국사 범종은 아침저녁으로 각각 28번과 33번을 쳤는데 울림이 충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쳐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고 한다. 마침 부근에 동국사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군산형무소가 있어서 죄수들이 범종 소리를 듣고 위안을 삼는다고 했다.

'왜장의 투구' 연상시켰던 대웅전 지붕

사찰 입구 오른쪽 기둥에 새겨진 ‘金江寺와 왼쪽 기둥에 새겼으나 흔적을 알아보기 어려운 일본 천왕 연호 ‘昭和’
 사찰 입구 오른쪽 기둥에 새겨진 ‘金江寺와 왼쪽 기둥에 새겼으나 흔적을 알아보기 어려운 일본 천왕 연호 ‘昭和’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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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바랜 대문기둥 두개에 음각해 놓은 글씨가 발목을 잡았다. 오른쪽 기둥에는 한자로 '금강사'라 새겼고,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라 쓴 현판이 걸린 왼쪽 기둥 글에서는 일본 천왕 연호인 '昭和(쇼와)'를 지우는 것으로 반일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 에도(江戶)시대 건축양식으로 지었다는 대웅전과 스님들이 거주하는 요사.
 일본 에도(江戶)시대 건축양식으로 지었다는 대웅전과 스님들이 거주하는 요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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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 발을 들여놓으니까 우람한 대웅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단층 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의 대웅전은 일본 에도시대 건축양식이라고 하는데 외관이 무척 단조로웠다. 지붕 물매는 75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건물 외벽에 창문이 많으며, 용마루는 일직선으로 한옥과 대조를 이루었다.

창건 당시 일본에서 구워온 기와를 올렸다는 지붕은 임진왜란 때 왜장의 투구를 연상시켰다. 흑백의 조화가 으스스할 정도로 담백했으며 100년 전 건물임에도 본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사찰 이곳저곳에서 왜색 냄새가 짙게 풍겼다.

대웅전(2003년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온다습한 일본의 건축적 특성을 잘 보여 주었다. 처마는 일반적인 한국의 사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단청이 없는 게 특징.

대웅전 법당. 49제를 지내고 있는데요. 기둥과 천정 등 기본 뼈대는 초창기 그대로지만, 불상, 탱화 등은 해방 후 새로 봉안된 것이라고 합니다.
 대웅전 법당. 49제를 지내고 있는데요. 기둥과 천정 등 기본 뼈대는 초창기 그대로지만, 불상, 탱화 등은 해방 후 새로 봉안된 것이라고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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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에 모셔진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은 지난 9월 5일 보물 제1718호로 지정되었다. 정확한 조성시기(1650년)와 조성주체, 소요 물목 등이 조성발원문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상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단다.

대웅전 출입 공간인 정면 앞칸 바닥이 시멘트로 마감된 것은 법당에서 신발을 벗지 않고 선 채로 예배를 드리는 일본 불교 전통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바닥과 요사 선방 등에도 원래 다다미가 깔렸었으나 모두 걷어냈다고 한다.

대웅전 뒤편에는 원래 납골당이 붙어 있었는데 1960년대에 모두 헐어냈다고 한다. 당시 납골당 유골들을 수습해서 금강에 뿌렸는데 이 소식을 들은 후손들이 찾아와 대성통곡하며 사찰 앞마당 흙을 담아갔단다. 북녘땅 흙을 주머니에 담아오던 우리의 이산가족들이 떠올랐다.

일본 교토에서 주조해서 들여왔다는 범종.
 일본 교토에서 주조해서 들여왔다는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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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은 1919년 일본 경도에서 고교재치랑(高橋才治郞)이 주조해서 가져왔다고 한다. 명문(銘文)에는 사찰 창건 유래와 시주한 사람들 명부가 적혀 있는데 당시 군산의 대농장주 이름도 몇 명 들어 있었다 한다. 천황의 은덕이 전 세계에 영원히 함께하길 기원하는 시(詩)도 음각되어 있었다고.
 
종각에 걸린 범종도 지면과 거의 맞닿아 있는 한국의 범종과 달리 종각 지붕에 높다랗게 매달려 있어 특이했다. 범종각 주변에 놓인 다양한 모양의 석불상에선 주술과 밀교성격이 강한 일본식 불교가 그대로 읽혀졌다.

동국사가 위치한 자리가 지금은 구도심권이 되었지만, 대웅전이 창건되던 1913년에는 인적이 뜸한 산속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국사 앞길은 한적하다 못해 음침하고 무서워서 여학생은 물론 어른들도 혼자 다니기를 꺼렸기 때문.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군산은 경술국치(1910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사청(일제가 각 지방에 설치한 통감부 지방 기관)이 영화동에 자리하고 있어서 현재의 중앙로를 경계로 영화동이 중심지였고, 1920년대 후반에 부청을 중앙로 사거리로 옮기면서 도시 개발도 동국사 부근까지 확대된다.

1932년 일본인 장례식 사진에 담긴 사연

일본인 의사 나까야마 어머니 장례식 장면, 나까야마는 부자였고, 조선인들과 유대도 좋았다고 합니다.(사진: 동국사 종걸 스님)
 일본인 의사 나까야마 어머니 장례식 장면, 나까야마는 부자였고, 조선인들과 유대도 좋았다고 합니다.(사진: 동국사 종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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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79년 전 일본인 장례식 장면이다. 금강사(동국사)에서 장례를 치르고 문상객들과 상주, 스님들이 경내에 모여 촬영한 사진이다. 경건하기에 앞서 호사스럽게 느껴지는데, 조화, 만장(만사), 문상객, 옷차림 등을 볼 때 고인이 군산의 유지였던 것으로 보였다. 

사진을 제공해준 동국사 종걸(57세) 스님은 1900년대 초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군산에 간호부와 약제사 등 직원을 여섯이나 두고 '군산병원(群山病院)'을 개원한 '나카야마(中山)' 원장 모친 도쓰카(戶塚悉子) 여사 장례식(1932년)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물매가 급한 대웅전 지붕과 문상객들 뒤편으로 지금 모습과 같은 요사가 보여 금강사 경내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개업집, 결혼식장, 장례식장 등에 보내는 조화가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되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를 더했다.

마음을 짠하게 했던 것은 일본 시즈오카에 사는 고인(도쓰카)의 손자 다다오(55)씨가 할아버지 병원이 있던 장소와 약제사였던 조선인 임진호(任鎭鎬)씨 자손을 찾아 군산을 세 차례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는 것. 병원 자리는 중앙로 1가 옛 경찰서 부근으로 밝혀졌다.

약제사 임씨와 원장 나카야마는 해방 후에도 서신과 가족사진을 주고받으며 교환방문도 했었다고. 종걸 스님이 군산경찰서에 의뢰했으나 임씨 자손들이 10여 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는 답변만 돌아왔단다. 다다오씨는 지난 추석에도 동국사에서 사흘을 머물다 갔다고 한다.   

1909년부터 동국사가 걸어온 길

1920년대 후반 동국사 대웅전과 요사. 도쓰카 여사 손자 다다오(55세)씨가 가져온 사진이라고 합니다.(사진: 종걸 스님)
 1920년대 후반 동국사 대웅전과 요사. 도쓰카 여사 손자 다다오(55세)씨가 가져온 사진이라고 합니다.(사진: 종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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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자재를 일본에서 가져와 지은 동국사(東國寺)는 대한제국이 사법권을 강탈(기유각서)당하던 1909년 6월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우찌다(內田佛觀) 스님이 군산 외국인 거주지 1조통에 세운 금강선사(금강사)에서 출발한다. 당시 금강사는 '포교소'였다.

우찌다 스님을 선응불관(善應佛觀)으로 표기하는 분들도 간혹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사용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우찌다 스님은 1913년 군산지역 대농장주 구마모토(熊本利平)와 미야자키(宮岐佳太郞) 등 신도 29명이 시주해서 마련한 지금의 자리(군산시 금광동 135-1)에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한다. 관련기록이 없어 소문만 떠돌았으나 2005년 동국사 스님들이 범종 명문을 탁본해 밝혀냈다.

1919년 당시 일본인 주지 나까오까(長岡) 스님이 쓴 명문에는 "천황의 은덕이 영원히 미치게 하니,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복락이 일본이나 한국이나 같이 굳세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어 당시 이 사찰의 격이 어땠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군산시사(137쪽)에 따르면 금강사가 들어서기 2년 전(1907년) 군산시 인구는 5859명. 그 가운데 일본인이 2956명으로 절반이 넘는다. 이는 일제가 호남 곡창지대의 관문인 군산에 얼마나 눈독을 들였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통계이다.

3대 주지 아사노 스님. 촬영 장소는 동국사 화단으로 보였습니다.(사진: 종걸 스님)
 3대 주지 아사노 스님. 촬영 장소는 동국사 화단으로 보였습니다.(사진: 종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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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다 스님은 1915년 12월 28일 총독부에 '사찰창립원'계를 제출했으나 반려되고, 이듬해(1916년) 10월 2일 정식 사찰(금강사) 허가를 받는다. 당시엔 포교소든 사찰이든 규격을 갖춰 일본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는 자기 나라에도 없는 사찰 허가제를 만들어 시행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군산에 여덟 개(동본원사, 서본원사, 안국사 등)의 일본식 사찰이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 금강사는 일본인 스님 넷이 차례로 주지를 맡았다. 2대~4대 주지 이름과 취임 연도는 다음과 같다.

1909년 포교소를 세우고 7년에 걸쳐 사찰의 기틀을 다진 우찌다 스님이 1916년 입적하자, 1917년 1월 18일 일본 조동종의 나까오까(長岡玄鼎) 스님이 2대 주지가 되어 1933년 12월 27일까지 사찰을 운영한다. 

1933년 12월 27일 나까오까 주지가 입적하고 아사노(淺野哲禪) 스님이 3대 주지로 취임한다. 이어 1937년 10월 5일에는 기무라(木村久郞) 스님이 4대 주지로 취임한다. 당시 동국사 주지들은 총독부의 명을 받아 만주 일본군 부대로 위문과 격려 연설을 하러 다녔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관보(1941년 12월 27일)는 금강사 4대 주지 기무라가 군산에 3개의 포교소를 개설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개복포교소'(군산부 개복정 1-15), '해망포교소'(해망정 山 4), '대조포교소'(군산부 남둔율정 360) 등이다. 

해방 후 '금강사'를 '동국사'로 바꿔

동국사 경내에서 사찰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종걸 스님.
 동국사 경내에서 사찰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종걸 스님.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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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라는 절 이름은, '조동종의 일본 사찰로 창건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우리나라(海東國) 절이다!'라는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동국사 총무 종걸(宗杰) 스님은 "일제강점기에 500개 가까운 일본사찰이 지어졌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국사만 남아 가슴 아팠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며 "동국사는 한국 근대사의 칼날 같은 세월의 한 페이지였다"라고 말했다.

종걸 스님은 이어 "한국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유일한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가 전통유형문화재와 근대문화 등록문화재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으며 보물로도 지정된 만큼 치욕과 질곡의 역사현장을 잘 보존해 미래의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은 시인도 18세 되던 해인 1951년 동국사 혜초(慧超) 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출가하면서 인연을 맺는데, 그의 자전적 소설 <나의 山河 나의 삶>, <만인보> 등에 '동국사'가 자주 등장한다.

고은은 자전적 소설에서 "군산 북중학교 교사 시절 혜초 스님의 불꽃 튀는 설법을 1시간쯤 듣고 멍청해졌으나 마음의 근원에서 기쁨이 일어나 틈만 나면 동국사를 찾았다"라고 회고하며 "새 기운이 넘치는 절"로 묘사하고 있다. 

금강사는 해방(1945년)과 함께 미 군정에 몰수된다. 그러나 1947년 불하받아 사찰 기능을 재개하면서 이름도 '동국사'로 개칭한다. 1955년에는 '불교 전북종무원'에서 인수, 김남곡 스님(1913~1983)이 공식으로 '동국사(東國寺)' 등기를 내고, 1970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에 등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귀한 자료를 제공해준 군산 동국사 '종걸 스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동국사, #금강사, #종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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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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