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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우니 여름이지 했었는데 올 여름은 정말이지, 더위와 전쟁을 치르듯 무지 뜨거웠다. 이럴 땐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느니 불더위를 식혀주는 한 차례의 소나기처럼 하루 코스라도 무조건 떠나는 게 상책이라 가까운 지인들과 전라도 여행을 나서게 되었다.

지난 8월 2일 오전 8시 10분에 창원시 마산합포구서 출발한 우리 일행이 남원 황산대첩비지(사적 제104호, 전북 남원시 운봉읍 가산화수길 84) 입구에 위치한 어휘각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20분께. 하얀 개망초 꽃들이 피어 있는 정겨운 길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어휘각은 한동안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한이 응어리져 있는 곳이다.

  황산대첩비지(사적 제104호) 어휘각. 황산대첩에서 공을 세운 여덟 원수와 네 종사관의 이름이 암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정으로 쪼여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황산대첩비지(사적 제104호) 어휘각. 황산대첩에서 공을 세운 여덟 원수와 네 종사관의 이름이 암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정으로 쪼여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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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장군이 고려 제32대 우왕 6년(1380)에 이곳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던 황산대첩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전투다. 승전 다음 해 이성계는 싸움에 참가한 여덟 원수와 네 종사관의 이름을 어휘각 암벽에 새기게 하여 그들의 공이 컸음을 알리게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혼을 말살하고자 했던 조선총독부가 철정으로 쪼아 버려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성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10년(1577)에 세운 황산대첩비 또한 안타깝게도 일제에 의해 비문이 정으로 쪼이고 비신도 파손되었는데, 1977년에 파괴된 비석 조각들을 모아 파비각(破碑閣)에 안치해두었다. 파비각 앞에 서 있노라니 한동안 나라를 잃은 수치심에 고개가 숙여지고, 일제의 만행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분이 치밀어 오르면서 슬펐다.

 파비각. 한동안 나라를 잃은 수치심에 고개가 숙여지고, 일제의 만행에 울분이 치밀어 올라 슬펐다.
 파비각. 한동안 나라를 잃은 수치심에 고개가 숙여지고, 일제의 만행에 울분이 치밀어 올라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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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산대첩비지.
 황산대첩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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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비지를 뒤로하고 우리는 양림길로 가서 백반정식을 하는 음식점에 들어가 소주를 곁들여 점심을 했다. 술은 묘한 힘이 있는 것 같다. 술을 적당히 마시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면서 단조롭다고 여겨지던 삶이 또 다른 색깔로 다가와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대한 애정이 생기기도 하니까 말이다.

진정한 휴식과 춘향의 사랑이 있는 광한루원으로

오후 2시 30분께 우리는 춘향전의 무대이기도 한 광한루원(명승 제33호, 전북 남원시 요천로 1447)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원인 광한루원에는 광한루, 삼신산, 오작교, 춘향사당, 월매집 등 볼거리가 많은데, 무엇보다 내가 매료되었던 점은 잠시 세상사의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진정한 휴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광한루원이라는 거다.

 작은 다리로 이어져 있는 삼신산.
 작은 다리로 이어져 있는 삼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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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부사 장의국은 남원시 일대에 흐르는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의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이곳에 만들었다. 그리고 선조 15년(1582)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송강 정철이 그 연못 한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중국 전설 속의 삼신산을 섬으로 만들어 영주산, 봉래산, 방장산이라 일컬었다.

더욱이 섬과 섬이 작은 다리로 이어져 있어 세 개의 섬을 오가며 한가하고 여유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삼신산이다. 우리들 삶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욕심을 하나씩 하나씩 버려 일상의 온갖 시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래서 삶의 한가로움을 진정 누릴 줄 알게 된다면 이곳이 신선이 산다는 이상향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광한루원 오작교.
 광한루원 오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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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신산에서 바라본 남원 광한루(보물 제281호).
 삼신산에서 바라본 남원 광한루(보물 제2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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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가로질러 설치한 사랑의 돌다리, 오작교 또한 광한루원의 또 하나의 매력이다. 무지개 모양으로 네 개의 구멍을 내어 양쪽 물이 통하게 해 놓은 오작교는 일 년에 한 번 칠월 칠석날에 은하 서쪽에 있는 직녀와 동쪽에 있는 견우가 만날 수 있게 까마귀와 까치들이 몸을 이어서 다리를 놓는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하지만 광한루원 오작교는 견우와 직녀의 전설보다는 신분을 넘어선 이몽룡과 춘향의 아름다운 사랑을 들려주는 듯했다. 사실 춘향전의 사랑과 정절의 의미는 로맨스라는 시각 말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면 더욱 감동적이다. 그 당시 신분적 한계를 깨부수면서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봐도 운치 있는 광한루(보물 제281호)는 원래 광통루라 불렸다. 조선 시대 황희 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었던 누각이다. 훗날에 조선 초기의 손꼽히는 유학자인 정인지가 이곳을 거닐다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선녀 항아가 살고 있는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흡사하다 하여 광한루라 이름 붙였다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에 다시 지은 것이다.

돌담이 아름다운 절집, 곡성 태안사로

 태안사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승탑들이 보이는데,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신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과 거북받침돌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광자대사탑비(보물 제275호)도 있다.
 태안사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승탑들이 보이는데,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신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과 거북받침돌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광자대사탑비(보물 제275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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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게 덜컹거리는 길을 올라가 태안사(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에 이른 시간은 오후 4시 10분께.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던 동리산 태안사는 적인선사 혜철 스님이 세웠다고 전해지며, 한때 송광사와 화엄사 등을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상당히 큰 절집이었다 한다.

일주문(전남 유형문화재 제83호)을 지나가면 바로 승탑들을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 작품으로 태안사의 2대 조사인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사리를 모신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그리고 비문을 새긴 몸돌은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 남아 있고 거북받침돌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광자대사탑비(보물 제275호)도 있다.

 적인선사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신 적인선사탑(보물 제273호).
 적인선사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신 적인선사탑(보물 제2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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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인선사탑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소박하고 정겹다.
 적인선사탑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소박하고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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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신 적인선사탑(보물 제273호)을 보러 갔다. 돌담 사이로 난, 그 길이 얼마나 소박하고 정겨운지 다시 한 번 더 가고 싶어진다. 태안사는 한국전쟁 때 대웅전 등 15채의 건물이 붙타 지금 있는 건물 대부분이 복원한 것이라 안타까웠지만, 능소화, 상사화, 루드베키아 등 돌담이나 탑과 어우러져 있던 예쁜 꽃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 절집이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으로 신라 석조승탑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적인선사탑은 탑의 기단부부터 지붕돌과 탑 꼭대기 부분에 있는 장식인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팔각을 고수하고 있다. 몸돌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전체적인 조형미가 뛰어나고, 조각 또한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녀 몹시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땡볕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앉아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불자 몇 분의 신실함이 우리들에게도 전해져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태안사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170호).
 태안사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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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광자대사 승탑 앞에 있던 것을 연못 가운데로 옮겨 놓은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170호)을 뒤로하고 우리는 태안사의 시원한 계곡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못내 부러워하면서 덜컹대도 왠지 기분 좋은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태그:#광한루, #황산대첩비, #태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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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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