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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박광전이 강학을 했던 죽천정
 의병장 박광전이 강학을 했던 죽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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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전(1526∼1597)은 67세의 고령에 군사를 일으킨 임진왜란 의병장이다. 조선 시대의 평균 수명이 약 30세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시의 67세는 평균 수명이 88세 안팎에 이르는 오늘날의 67세와 전혀 다르다.

67세 선비, 의병을 일으키다

박광전이 의병을 일으킨 때는 1592년 7월 20일이었다. 고경명 의병군이 금산 전투에서 전몰한 7월 10일보다 열흘 뒤였다. 의병군에는 전 진보 현감 임계영(1597년 병사), 능성 현령 김익복(1598년 예교 싸움에서 전사), 박광전의 처남 문위세(1600년 병사), 제자 안방준, 제자 정사제(1592년 남원 싸움에서 전사) 등이 참가했다.

의병장은 임계영이 맡았다. 당시 박광전은 고령이기도 했지만 투병 중이어서 전투 참가가 불가능했다. 다만 의병 모집 등 일상적 활동은 가능했다. 당시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띄웠던 격문의 첫머리도 그 점을 증언해준다. 격문은 '임진년 7월 모일에 전 현감 박광전과 임계영 등은 능성 현령 김익복과 함께 삼가 재배하고 여러 고을의 선비와 벗들께 글을 드립니다.'로 시작한다.

가운데에 방이 있고 그 좌우로 마루가 있는 특이한 구조의 죽천정
 가운데에 방이 있고 그 좌우로 마루가 있는 특이한 구조의 죽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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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망하지 않은 것은 하삼도(경상, 전라, 충청)가 있었기 때문인데, 경상도와 충청도는 이미 궤멸되어 왜적의 소굴이 되었고 호남만이 겨우 한 모퉁이를 보전하여 군량 수송과 정예병의 모집이 모두 이 한 도에 의지하고 있으니, 국가를 일으켜 세울 기틀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요즘 왕성(王城)이 위급하다 하여 순찰사는 정예병을 이끌고 바닷길을 따라 올라갈 계획을 세웠고, 병사는 수 만 병사를 이끌고 이미 금강을 넘었으며, 양도(전라 좌 ․ 우도)의 의병도 각각 근왕(勤王)을 위해 본도를 떠났습니다.' 

격문은 당시 전라도 장졸들이 어떤 행보를 취하고 있었는지 증언해준다. 관군이 이미 금강을 넘었다는 대목은 전라 감사 이광이 2만여 군대를 이끌고 한양을 향해 북진한 것을 가리킨다.

전라 감사 이광, 충청 감사 윤선각, 경상 감사 김수의 연합군은 3만에 이르렀지만 불과 1,600명에 불과한 일본군에 참패하여 죽고, 흩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평양을 버리고 압록강을 향해 더 북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사진은 당시의 참혹한 패전을 지켜본 수원 광교산.
 전라 감사 이광, 충청 감사 윤선각, 경상 감사 김수의 연합군은 3만에 이르렀지만 불과 1,600명에 불과한 일본군에 참패하여 죽고, 흩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평양을 버리고 압록강을 향해 더 북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사진은 당시의 참혹한 패전을 지켜본 수원 광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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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6월 5일과 6일에 걸친 수원 광교산 일원 전투에서 이광 군은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부서졌다. 일본군은 1,600명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충청도와 경상도 지원군까지 합해 3만을 헤아리던 이광 군은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한 채 죽거나 흩어졌다. 선조는 이 소식을 듣고 평양을 떠나 의주로 더 멀리 떠났다.

임금을 지키기 위해 선조가 있는 곳으로 북진하는 전라도 의병들

전라 좌도와 우도의 의병이 각각 근왕(임금을 지킴)을 위해 본도를 떠났다는 대목도 당시의 사정을 짐작하게 해준다. 경상도와 달리 전라도는 1592년 4∼5월 일본군의 침입이 없었으므로 이곳 의병들은 향토를 지키는 데 골몰할 까닭이 없었다.

1593년 1월 당시 나주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장 김천일이 3,000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이는 '조선의 현재 병력과 주둔지를 보고하라'는 명나라 군대의 요구에 따라 그해 1월 11일 조선 정부가 명에 보고한 내용이다(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그때 곽재우는 경남 의령에, 김면은 경남 거창에, 성안의는 경남 창녕에, 정인홍은 경남 창녕에 주둔하고 있었다.

김천일을 제향하는 나주 정렬사
 김천일을 제향하는 나주 정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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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창의한 나주의 김천일 의병군이 벌써 도성 인근의 경기도까지 진격한 데 비해 그보다 약간 늦은 담양의 고경명 의병군은 그 대신 6,000에 이르는 많은 의병을 모아 북진하고 있었다. 고경명 의병군은 6월 27일 은진(논산군 은진면)에 당도했다. 그때 왜적이 금산을 정령한 후 전주를 거쳐 호남 전역을 침탈하려 든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고경명 군은 이미 평양까지 피란한 조정을 뒤따라 가 근왕을 하는 일보다 곡창 호남을 지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고경명 군은 7월 1일 은진에서 약 20리(8km) 떨어진 연산으로 회군했다. 6월 22일 군수 권종의 군대를 제압한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는 금산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다. 고경명은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형강(금강의 대청호 쪽 상류)을 건너 와 7월 10일 금산의 왜적을 함께 치자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조헌은 그 날까지 의병을 제대로 모으지 못해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고, 고경명 의병군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더불어 일본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세력이 약하고 전투 능력에서도 뒤떨어진 아군은 일본군을 제압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경명, 유팽로, 안영,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 등 장졸들이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광주 포충사는 1차 금산성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 유팽로, 안영, 고인후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고종후를 제향하는 사당이다.
 광주 포충사는 1차 금산성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 유팽로, 안영, 고인후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고종후를 제향하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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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라도 의병군은 재기를 모색했다. 고경명의 지시에 따라 모병 활동 중이었던 관계로 금산 전투에 참전하지 않아 삶을 유지한 문홍헌이 앞장을 섰다. 문홍헌은 화순의 최경회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7월 26일 광주에서 800여 명으로 기병했다. 이를 흔히 '전라 우의병'이라 부른다.

1차 금산성 패전 이후 재기를 모색한 전라도 의병들

박광전, 임계영 등 전라 좌의병 수뇌부가 창의를 하면서 지역 선비들에게 배포한 격문을 계속해서 읽어본다.  

'지금이 바로 의로운 선비들이 분발해야 할 때입니다. 왜적이 성 아래에 이르러 장정들을 무참히 죽이면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어디에 몸을 두며 가족들은 어느 곳에 둔단 말입니까? 영남이 이미 그렇게 당한 사실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숲속으로 도망쳐 숨으려는 계획도 옳지 않고,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계획도 잘못된 것입니다.

죽는 것이 매한가지라면 어찌 나라를 위해 죽지 않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요충지를 잘 막아 왜적의 기세를 차단한다면 사지에서 살 길을 구하는 것도 이 기회에 이루어지고, 치욕을 씻고 나라를 수복하는 것도 이 시기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라좌도와 전라우도


1018년(현종 9) 이전까지 지금의 전북은 강남도(江南道), 전남은 해양도(海洋道)로 불렸다. 1013년부터는 합쳐서 전라도라 했다.

1407년(태종 7)  전라도와 경상도를 좌ㆍ우도로 나누었다. 전라도는 동쪽 산악 지대를 좌도, 서쪽 평야 지대를 우도라 했고, 경상도는 낙동강을 경계선으로 하였다. 임금이 있는 왕성을 좌우의 기준으로 삼았으므로 남원ㆍ담양ㆍ순창ㆍ용담ㆍ창평ㆍ임실ㆍ장수ㆍ곡성ㆍ옥과ㆍ운봉ㆍ진안ㆍ무주ㆍ광주 등 24개 고을이 전라좌도에 들었다.

관찰사는 별도로 두지 않았고 군사 책임자인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만 각각 배치했다. 1892년(고종 33) 남ㆍ북도 체제로 바뀌었다.

우리 도내에는 필시 누락된 장정과 도망친 군졸들이 있을 것이니, 만약 식견 있는 선비들을 시켜 서로 불러 모아 권장하고 격려하며 힘을 합해 떨쳐 일어나 스스로 군대를 만들어 왜적이 향하는 곳을 감시하여 요충지를 굳게 지키게 한다면, 위로 왕의 군사를 성원할 수 있을 것이요, 아래로는 한 지역 백성들의 목숨을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힘껏 도모하여 영남 사람처럼 되지 맙시다.

영남 사람들은 왜적과 맞선 초기에 한마음으로 막아낼 생각은 않고 머리를 싸매고 도망쳤으니 이것이 비록 황급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 그랬을지라도 오늘날 다시 생각해보면 후회가 될 것입니다. 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집이 불에 타고 처자가 능욕을 당한 뒤에야 선비들이 떨쳐 일어나 많은 적을 베고 잡으니 조금 마음이 든든하지만 또한 이미 늦었습니다. (하략)'

전라 좌의병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7월 20일 보성에서 기병했다. 부장으로는 문위세 휘하에 이충량, 김익복 휘하에 유여환이 활동했다. 특히 무과에 급제한 경력의 전 사천 현감 장윤이 임계영 의병장 부대에 합류하면서 전라 좌의병의 기세는 한결 치솟았다.

장윤 정려, 전남 기념물 75호로 승주읍 서평리 400-7에 있다.
 장윤 정려, 전남 기념물 75호로 승주읍 서평리 400-7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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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라 좌의병은 남원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부사 윤안성으로부터 상당한 군량과 병력을 지원받아 이후의 의병 활동에 적지 않은 활력소를 얻기도 했다.  

기습 공격으로 곳곳에서 전과를 얻은 의병들

'의병의 전략이나 전술은 고경명과 같이 대부대로 정규전을 펼치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는 예외에 속하고 일반적으로 지리와 지세를 이용한 유격전을 펼쳤다. 이는 의병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후방을 교란하여 전의를 상실케 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전라 좌의병도 주로 기습 전술로 적을 공격했다.

'일정한 지역에 주둔하면서 훈련된 소수 병력을 수시로 운용하여 주로 기습에 의한 유격 전술을 펴 전과를 거두었다. (중략) 야간에 볏 짚단으로 병사로 위장하여 적의 시환(화살과 총탄)을 무수히 허비하게 하는 의병술(가짜 병사를 활용하는 전술)을 구사하기도 하고, 지형에 따라 장사진(가로로 군사를 길게 늘여 숫자가 많아 보이게 하는 한편 공격을 당했을 때 적을 포위하기 쉽게 하는 전술), 어관진(에워싸서 징을 치고 불을 밝혀 물고기를 놀라게 해서 잡듯이 적과 싸우는 전술) 등 다양한 전법을 구사하여 왜군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문강공 박죽천 선생 기념사업회「박광전」).'

전라도 의병은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 등의 요청을 받아 1차 진주성 전투, 성주성 회복 전투, 개령(김천) 전투 등에도 참전했다. 좌의병은 특히 성주성 수복과 개령 전투 승리에 큰 힘을 보탰다.

2016년에 중건한 용산서원
 2016년에 중건한 용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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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전의 마지막 활동은 1597년에 이루어졌다. 72세의 고령에 병이 깊었지만 박광전은 정유재란 때에도 의병으로 나섰다. 그해 8월 중순 남원성과 진주성이 함락된 후 천봉산에 피란해 있던 그는 전 판관 송홍렬을 부장, 차남 박근제를 종사관, 박사길과 박훈 등을 선봉장으로 삼아 동복(전남 화순)의 적진을 기습했고, 적벽(화순군 장항리 이서면 동복댐 일원)에서 적을 격파했다.  

하지만 박광전은 그해 11월 18일 노령과 병환, 의병 활동으로 쌓인 육체적 소모를 이기지 못하고 별세했다. 정유재란 의병 활동을 재개한 직후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그였다. 사람들은 그를 기려 1607년 대룡산 기슭에 용산 서원을 창건했다. 1841년(헌종 7)에는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도 내려졌다. 

정말 찾기 어려운 죽천정

죽천정은 찾기가 어렵다. 주소가 보성군 노동면 광곡리 209-4이고, 노동역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정보를 들고도 혼자서는 웬만해서 찾을 수가 없다. 김성일과 영남 의병 도대장 김면 등은 전라 의병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을 성공리에 물리쳤지만, 나는 누구에게 지원을 요청할 것인가?

역장님에게 물으면 될 성 싶지만 실현 불가능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역장은 없다. 근무 중에 자리를 비우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이 폐쇄되는 바람에 영원히 존재를 감추어버렸다.

주소를 길찾기 프로그램에 띄우고 물어보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는 답변이 반복된다. 하지만 죽천정 건물이 없다. 우체국장님을 찾아가서 확인해보니 "죽천정은 여름에는 모습을 감춥니다." 하고 말씀하신다. 겨울이 되어 나뭇가지들이 나목으로 변하면 철길 건너 산비탈에 숨겨두었던 몸을 가까스로 드러내고, 여름이 가까운 때일수록 오롯이 숨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과 반대다.   

<죽천정 위치> 광곡교를 건너 좌회전을 한 후 면사무소까지 이어지는 길을 중간쯤 가면 1층짜리 낡은 건물(폐역)이 있다. 그 건물 왼쪽으로 철길을 거넌기 위해 설치해둔 작은 계단이 있다. 계단을 지나고 철길을 지나 숲속으로 좁은 오솔길이 나 있다. 나무 사이로 들어서면 몇 걸음 걷지 않아 죽천정을 만날 수 있다.
 <죽천정 위치> 광곡교를 건너 좌회전을 한 후 면사무소까지 이어지는 길을 중간쯤 가면 1층짜리 낡은 건물(폐역)이 있다. 그 건물 왼쪽으로 철길을 거넌기 위해 설치해둔 작은 계단이 있다. 계단을 지나고 철길을 지나 숲속으로 좁은 오솔길이 나 있다. 나무 사이로 들어서면 몇 걸음 걷지 않아 죽천정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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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철길 건너 죽천정을 향해 달려간다. 후대인들이 김익복, 문위세, 박광전, 박근제, 박사길, 박훈, 송홍렬, 안방준, 유여환, 이충량, 임계영, 장윤, 정사제 등 전라 좌의병 선조들을 거의 기억하지 않고 있으니 정자조차도 지금처럼 숨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역사 의식을 잃은 채 물질 숭배 사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후손들의 풍조를 한탄하여 저렇듯 모습을 감추려는 것은 아닐까?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목숨과 재산을 내놓았던 선조들에 비해 우리는 그 반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장윤

방이 가운데에 있고 마루가 그 좌우로 배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의 죽천정을 둘러본 후 '장윤 정려'로 간다. 전라 좌의병 최고의 무장 장윤은 1593년 2차 진주성 싸움 때 순절했다. 기념물 75호인 장윤 정려는 순천시 승주읍 서평리 400-7 도로변에 있어 찾기가 쉽다.

혹 읽지 못할세라 나는 표지석 앞에서 눈에 힘을 준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는 것이 선조에 대한 예의이리라. 

전남 기념물 75호인 '장윤 정려'의 표지석
 전남 기념물 75호인 '장윤 정려'의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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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광전, #장윤, #고경명, #김천일, #문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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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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