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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성 남문
 나주성 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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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시 남내동 2-20의 나주 읍성(羅州邑城)은 고려 시대에 쌓은 돌성으로 사적 337호다. 1457년(세조 3) 규모를 확장했고, 임진왜란 후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쳤다. 둘레가 3,126척(약 940m), 높이가 9척(약 2.7m)이다.

나주 읍성의 주소를 흔히 남내동 2-20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곳에 남고문(南顧門)이 있기 때문이다. 남문 터에 1993년 복원된 남고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옆에서 보면 지붕이 '八'자 모양으로 지어진(作) 팔작(八作)지붕의 전형을 보여준다.

남고문에서 시내로 들어서면 사적 483호인 나주목 관아(官衙) 앞 광장에 닿는다. 요즘 말로 하면 시청 앞 광장인 셈이다. 광장에 2층 정자가 서 있다. 둘레로 아무런 건물이 없어 보기에 시원한 이 정자는 문화재자료 86호인 정수루(正綏樓)이다. 이름에 들어 있는 綬(끈 수)가 좀처럼 쓰이지 않는 글자인 탓에 어떤 자료에는 정'수'루를 정'완'루로 읽어놓기도 한다. 綬가 緩(느릴 완)과 비슷해서 오독을 한 탓이다. 

정수사. 나주관아의 문으로 우복룡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정수사. 나주관아의 문으로 우복룡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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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동 13-18의 정수루는 관아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보다 더 강렬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정자에 얽힌 두 인물 때문이다. 이 정자를 지은 사람은 1603년(선조 36)에 목사로 부임한 우복룡이고, 정자 2층의 북을 처음으로 나주에 탄생시킨 사람은 김성일이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조금 전인 1590년 3월에 출발하여 일본에 갔다가 1591년 3월에 귀국한 통신사의 부사다. 그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한 황윤길에 맞서 일본이 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 인물로 흔히 알려져 있다(『선조실록』 1590년 3월 6일자에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이 출발했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1591년 3월 1일자에는 '통신사 황윤길 등이 돌아왔는데 왜사 평조신 등과 함께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수루에 북이 매달려 있는 까닭

김성일이 나주에 온 것은 1583년이었다. 목사로 부임한 그는 나주가 아주 거대한 읍인 까닭에 백성들의 어려움이 관청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궁리 끝에 그는 큰 북을 매달아놓고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은 그것을 치라고 했다. 그렇게 하여 김성일은 선정을 한 나주 목사로 이름을 남겼다. 현재 정수루 2층에 북을 매달아놓은 것은 당시 김성일이 보여준 목민관다운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자는 뜻일 것이다.

경북 안동 김성일 종택 전경
 경북 안동 김성일 종택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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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룡은 누구인가?  『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자는 '왜란 초기에 수령들이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으나 (경북 예천의 용궁 현감) 우복룡은 홀로 관할 지역을 떠나지 않고 군사 1,000여 명을 모집하였다가 적을 만나 패하여 흩어졌다. 그러나 다시 수백 명을 모아 밤에 예천의 적군 부대를 습격하여 적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면서 '우복룡을 안동 부사로 삼으니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라고 증언한다.

그런데 우복룡에게는 놀라운 괴담이 따라다닌다. 괴담은 류성룡의 『징비록』에까지 실려 있다. 『징비록』에 나오는 우복룡 괴담의 요지는 그가 의병 200여 명을 죽인 뒤 반란군 200여 명을 죽였다고 허위 보고하여 출세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류성룡이 증언을 하고 있으므로 믿지 않을 수도 없지만, 너무나 황당하여 믿기도 어려운 우복룡 괴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용궁 현감 우복룡이 고을 군대를 거느리고 가던 중 (경북) 영천 길가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경북 경산) 하양 군사 수백 명이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군사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우복룡이 괘씸히 여겨 "너희들은 반란군이로구나!" 하고 꾸짖었다. 

하양 군사들은 (군대의 이동을 명령한) 병사의 공문을 내보였다. 하지만 우복룡은 그들을 포위한 다음 모두 죽였다. 경상도 순찰사는 김수는 우복룡이 큰 공을 세웠다고 보고했다. 우복룡은 안동 부사가 되었다.

그 뒤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와 과부들은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울면서 원통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우복룡은 이미 이름이 높던 터라 아무도 그들을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용궁현청이 지금의 면소재지가 아니라 향교 옆에 있었다. 사진은 우복룡이 현감으로 있었던 경북 예천 용궁의 향교 전경이다. 현청은 남아 있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용궁현청이 지금의 면소재지가 아니라 향교 옆에 있었다. 사진은 우복룡이 현감으로 있었던 경북 예천 용궁의 향교 전경이다. 현청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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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16일 김천일은 송제민, 양산룡, 양산숙, 임권, 이광주, 서정후 등과 함께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6월 3일 김천일 의병군은 서울을 향해 북진하는 출병식을 열었다. 장소는 나주시 과원동 109-5의 '나주 금성관'으로, 이 건물은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건립된 객사였다. 중앙 정부의 관리가 출장을 왔을 때와 외국 사신이 체류할 때에 묵는 숙소 금성관은 그렇게 하여 임진왜란의 현장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때는 8,000 군사를 이끌고 북상했던 전라 감사 이광이 공주에서 군대를 해산해버린 뒤였다. 수군을 이끈 이순신과 곽재우·김면·정인홍 등 경상우도 의병들의 분투 덕분에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6월말까지 일본군은 전라도에 침입하지 못했다. 덕분에 이광은 근왕(勤王), 즉 임금을 모시기 위해 출정한다는 거대한 명분을 내걸고 당당하게 북상할 수 있었다. 그랬던 이광이 공주에 이르러 임금이 북쪽으로 피신했고, 한양조차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군대를 해산해버린 것이었다.

도망가는 왜군 쫓아 경상도까지 내려간 노병

분개한 나주 의병은 단독으로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왜적이 경상도와 충청도를 지나 한양과 함경도로 쳐들어갔으므로 전라도에 머물 까닭도 없었다. 담양의 고경명 의병군에는 서신을 보내어 먼저 북상한다는 의지를 알렸다. 공주를 지날 때 김천일 의병군의 숫자는 1,000명을 헤아렸다.

김천일 의병군이 출정식을 열었던 나주 금성관
 김천일 의병군이 출정식을 열었던 나주 금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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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의병군은 독산성에 진을 쳤다. 김천일은 일찍이 수원 부사를 지낸 적이 있어 일대의 지리에 밝았다. 이곳에서 김천일은 유격전을 펼쳐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이 무렵은 전라도 이광, 충청도 윤선각, 경상도 김수 감사의 3만여 연합군이 1,600명에 불과한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한 뒤라 경기도 일대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분조(제 2의 조정)를 이끌고 이천에 와 있던 광해군은 김천일의 분전을 듣고 방어사(종2품 병사 바로 아래의 직책)에 임명했다.

이후 김천일은 점점 군대의 규모가 커지자 7월 하순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 도성 주변의 적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김천일 의병군의 규모는 3,000명을 헤아렸다(1593년 1월 11일자 『선조실록』). 전라 병사 최원의 관군 4,000명과 우성전 의병장의 병사 2,000명도 뒤이어 강화도로 들어왔다.

김천일은 강화도에 약 여덟 달 동안 주둔했다. 선조는 김천일에게 정3품 장예원 판결사 벼슬과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창의사는 전국 의병장 중 처음으로 김천일이 내려진 칭호였다. 김천일 의병군은 사기가 더욱 충천해졌다.

일출을 바라보고 있는 김천일 동상
 일출을 바라보고 있는 김천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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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일, 최원, 우성전, 경기 수사 이빈, 충청 수사 변양준 연합군은 8월 2일 한강 북안 양화나루 일대의 왜군을 공격하여 200여 적병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장단, 화장포, 김포 등지에서는 패하기도 하고,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기도 했다.

1593년 1월 8일 명나라 지원군과 조선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했다. 2월 12일 권율 도원수 지휘의 행주산성 전투를 외곽에서 지원한 김천일은 57세의 고령에 병까지 앓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4월 10일 이후 한양을 버리고 경상도로 남하한 일본군을 추격하여 경남 함안까지 내려갔다.

도요토미의 보복심으로 시작된 진주성 싸움

2차 진주성 싸움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2차 진주성 싸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보복심 때문에 빚어진 전투였다. 여기서 보복심은 1차 진주성 싸움에서 대패를 한 데 대한 앙갚음 심리를 말한다.

1차 진주성 싸움은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벌어졌다. 진주 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조선의 군·관·민은 3,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결사항전 끝에 3만 명에 이르는 대적을 격파했다. 그 탓에 일본군은 곡창 지대인 호남에 들어가지 못했고, 군량미를 공급받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굶주림, 추위, 조선 수군, 의병, 명나라 지원군 등이 일본군 패퇴의 원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주성 대패에 대한 보복심은 예상할 만한 일이었다.

정열사 : 김천일 사당
 정열사 : 김천일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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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6월 19일, 작년의 1차 진주성 싸움 패전이 전쟁 전체의 판세에 결정적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만 명이 넘는 일본군을 진주로 보냈다. 진작부터 공개적으로 전군을 동원해 보복전을 치르겠다고 선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점령 후)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적군 10만과 아군 6,000명의 혈투…. 전투가 성립될 수 없는 규모의 차이였다. 진주성 안 촉석정충단비의 안내판은 '보복전을 시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특명을 내려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의 대군을 편성,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이때 삼장사(三壯士)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진주성 내 촉석정충단비의 내용


이 비는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19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 김천일, 황진, 최경희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의 비석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육지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군대가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왜적을 제압하자, 수세에 몰린 적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아군의 10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 싸움(1592년 10월 5일∼10일)이다.

그들은 이에 대한 보복전을 시도, 풍신수길의 특명에 의해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 12년(1686)에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웠다.

10만 대 6천의 대결

너무나 '압도적인 적세'였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6월 19일 전투가 개시된 이래 6월 29일까지 11일 동안이나 함락당하지 않고 대항해 싸웠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적들과 싸우다 삶을 마친 선조들의 의기 앞에 오로지 숙연해질 뿐이다.

촉석루는 김천일, 김천일의 아들 김상건, 최경회,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 2차 진주성 싸움 중 전사한 강희보의 동생 강희열, 성수경 등 최후까지 분전한 장졸들이 스스로 몸을 남강에 떨어뜨려 목숨을 버린 곳이다. 논개도 이곳에서 왜장을 유인한 후 마침내 남강 시퍼런 물길 속으로 가냘픈 목숨을 던졌다.

적은 '창고에 들어가 있으면 안전하다'면서 성내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속여 사람들이 그 안에 모이자 모두 불태워 죽였다. 적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닭과 개까지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죽였다.

정열사비(旌烈祠碑, 기념물 48호) : 김천일이 순절한 지 34년 뒤인 1626년(인조 4) 사당 정열사 앞에 세워졌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네모난 형태의 머릿돌을 올렸다. 머릿돌에는 용을 생동감 있게 조각해 놓았고, 비문에는 김천일의 의병 활동을 자세히 적고 있다.
 정열사비(旌烈祠碑, 기념물 48호) : 김천일이 순절한 지 34년 뒤인 1626년(인조 4) 사당 정열사 앞에 세워졌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네모난 형태의 머릿돌을 올렸다. 머릿돌에는 용을 생동감 있게 조각해 놓았고, 비문에는 김천일의 의병 활동을 자세히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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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를 마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외삼문 왼쪽에 '文烈公(문열공) 金千鎰(김천일) 先生(선생)' 동상이 서 있다. '장군'이 아니라 '선생'이다.

선생은 누구인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는 '도를 깨달은 자, 성현의 도를 전하고 의혹을 풀어주는 자, 국왕이 자문할 만큼 학식을 가진 자 등을 선생으로 존칭했다'면서 '통일 신라 시대까지의 사실을 전하는 각종 기록에서 선생으로 불린 인물로는 강수 선생과 백결 선생이 있다'라고 풀이한다. '국가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교육의 기능이 강화되자, 선생이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지칭하는 어휘로 의미 변화'를 일으켰지만 본래 선생은 공자 등 불세출의 현인들에게 쓰인 호칭이었다는 뜻이다.

김천일 동상이 얼마나 낡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판
 김천일 동상이 얼마나 낡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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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앙대로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충렬공 송상현 선생 상'과 대구 망우당 공원에 건립되어 있는 '紅衣將軍(홍의장군) 郭再祐(곽재우) 先生(선생) 像(상)'도 '선생'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그 분들이 처음부터 무장이 아니라 선비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장군' 대신 '선생'을 썼다고 오해할 일이 아니다. 두 분 모두 동상에 '선생'으로 모셔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최고의 존칭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극존칭인데 '김천일 선생 상'은 낡고 남루

송상현과 곽재우의 동상은 '선생'이라는 극존칭에 어울릴 만한 풍채를 지녔다. '문열공 김천일 선생' 상은 어떤가? 동상을 바라보노라니 마음에 충격이 솟구친다. 동상은 현판부터가 폐품 수준이다. 글자 밑의 바탕이 벗겨지고 더렵혀져 차마 보기에 민망하다. 관공서나 회사의 현판, 개인 주택의 문패 중 김천일 선생 동상의 것만큼 홀대받고 있는 예는 보지 못했다.

동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녹색인지 황색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황록색이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빛이 뒤섞이고 바래고 탁해졌다. 묵은 때가 덕지덕지 붙은 모습이 전쟁 중의 고생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동상 아래에 붉은 배롱나무라도 만발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그마저 없으면 동상 일대의 살풍경에 놀란 답사자들의 '소리 없는 비명'으로 이 골짜기가 가득 들어찼으리라.

배롱나무, 즉 '나무 백일홍'의 백일홍은 백일 동안 붉게 꽃을 피운다는 뜻이다. 백은 '온'이다. '온' 대한민국의 우리들은 모두들 이 꽃보다도 못한 것인가? 극진히 섬기겠노라 말만 하고, 실제로는 이렇게 방치하고, 선열들의 삶을 본받을 생각과 의지는 전혀 없는 사람들, 그것이 의병장 김천일을 '선생'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의 정체성인가? 

정렬사를 떠나 다른 임진왜란 유적을 찾아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또 김천일 '선생'과 같은 참상을 보게 될까 두렵다. 역사 앞에서, 나는 두렵다.

낡고 남루한 김천일 동상을 보완하기라도 하려는 듯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활짝 터뜨리고 있다.
 낡고 남루한 김천일 동상을 보완하기라도 하려는 듯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활짝 터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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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천일, #정렬사, #정수루, #남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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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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