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내총생산 세계 11위, 1인당 국민소득 2만7천 달러. 대한민국의 위상을 나타내는 숫자들로 책 <결국 사람을 위하여>의 머리글 내용이다. 과거 절대적 가난을 겪은 세대에게는 자랑스러울 수도 있는 지표이며, 절대적 가난보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고통스러운 세대에게는 의미를 상실한 지표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결국 사람을 위하여> 책표지
 <결국 사람을 위하여> 책표지
ⓒ 소이연

관련사진보기

내게는 뚜렷한 표정 없이 다가오는 가치중립적인 숫자들로, 무엇을 느끼든 각자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어서 등장하는 숫자들은 분명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에 의하면, 한국에서 한 해 일하다 사고로 숨진 노동자 수가 1777명(2016년)이라고 한다. 매일 5명 꼴로, 교통사고 사망자 수보다 7배가 많고, 이라크 전쟁에서 사망한 미군의 한 해 평균 사망자 수 450명보다도 훨씬 많다고 하니,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4일 이상의 요양을 필요로 하는 재해자 수 또한 한 해 무려 9만656명. 그것도 산재 승인을 받지 못한 경우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니, 이 슬픔 앞에서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으랴.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해야 한다. 이 슬픔은 계속해 이야기되어야 하고, 우리의 주목을 받아야 마땅하다.

"이러한 사실이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노동자의 이야기일까? 이러한 사회가 과연 지속가능한 사회일까? 왜 우리는 원치 않는 노동과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걸까? 누가 우리를 이러한 삶을 살도록 몰아간 걸까? 아니면 우리가 침묵하고 또 타협하고 있어서 계속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걸까?"

살기 위해 일하다 죽어간 노동자들, 행복해지려고 일하다 불행에 빠진 노동자들. 특정한 사람들만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한국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없는 비탄에 빠질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근거 없는 낙관은 경계해야겠지만, 지금까지 상황을 개선해 온 분명하고도 가시적인 성과들을 모른 체 하는 것 또한 그 노력들에 대한 결례일 테다. 

책은 노동자와 함께 건강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힘써온 활동가들의 삶과 그 활동을 조명한다. 저자는 개인의 구체적 생애를 통해 사회구조를 재구성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생애사를 채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의 생애를 들여다봄으로써, 한국 노동현장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볼 수 있었다.

안전보건의 역사를 정리하는 시작으로서, 노동안전건강 분야의 활동가들의 삶이 그려진다. 원진노동환경연구소 김신범 화학물질센터장, 민주노총 금속노조 박세민 안전보건실장, 지역 단체의 여성활동가인 마산창원산재추방운동연합 이은주 상임집행위원,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이훈구 상임활동가, 이렇게 4인의 활동가들이다.

저자는 이 책이 특별한 보상 없이 활동가로 살아온 분들의 삶에 대한 존중이자 지지를 보내는 한 방법으로 기획되었다고 밝혔다. 그그렇다고 낯간지러운 칭찬 일색이 아닌, 그 분들의 고뇌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하고, 다함께 고민해야 할 주제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들이 활동가의 삶에 매진하게 된 계기는 모두 다르다. 김신범 활동가는 데모하는 순간 인생이 '끝장'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회색분자'를 자처한 적도 있으나, 결국 마음 가는 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겸손한 말이 눈에 들어온다.

"(그 후로) 내가 부족하니까 많이 배워서 나가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연구소에 있었는데, 그게 18년째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이게 다에요, 이 일을 하게 된 건.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정도?"

그의 겸손에 비해, 이들이 이룩한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 피자 배달 30분제 폐지, 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의자를 주게 된 것, 노동 현장과 생산물에서 발암물질을 제거하기 위한 운동과 성과, 노동으로 발생한 병에 대한 산재 인정은 물론 활발한 산업안전보건운동 등.

4인의 활동가의 삶도, 목표와 성과도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곧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투쟁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건강한 노동 환경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그들의 삶을 보며, 나는 이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바로, 시민의 연대다. 이 연대는 노동자가 각자의 노동 현장에서 싸울 수 있는 연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의자를 놓게 만드는 힘이 사회에서 나왔다면, 거기 있는 노동자들 중 누군가가 앉아야 해요. 눈치 보는 것에서 벗어나 갖다 준 의자에 노동자가 앉아야 해요. 싸움이란 남이 도와주는 영역이 있고, 자기가 싸워야 되는 게 있는 거거든요."

또한, 기업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소비자운동으로서의 연대이기도 하다.

"발암물질의 저사용 문제는 소비자들이 관심을 가질 때 확 바뀐다. 기업이 독성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노동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소비자의 눈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다. 소비자운동은 그런 점에서 유독물질 방지를 위해 커다란 역할을 할 열쇠를 쥐고 있다."

나아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연대다.

"노동자는 동시에 지역 주민이기도 하다는 것, 마을이란 인류가 만들어 낸 필수적인 단위라는 것, 노동의 문제란 사실 복합적인 인간의 문제이고, 그것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지역에서도 만나게 된다는 것, 이 모두는 우리에게 건강한 지역, 안전하고 자유로운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탄탄한 시민 연대가 이뤄졌을 때, 건강한 노동환경을 쟁취하고, 사람으로서 존엄이 지켜질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숭고한 노력을 보며, 시민의 연대를 읽어낸 나의 독서가 오독이 아니었기를 바라본다.

대한민국은 촛불의 저력을 증명한 바 있다. 그 촛불은 우리가 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 연대는 우리의 노동 현장은 물론, 내가 사는 공동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결국 사람을 위하여>.


결국 사람을 위하여

정진주 외 지음, 사회건강연구소 기획, 소이연(2017)


태그:#결국 사람을 위하여, #사회건강연구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