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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패전 후 일본이 '국립국회도서관'을 세운 이유에서 이어집니다. 

야마베 겐타로는 역사 연구에서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이 차지하는 위상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벌써 12, 13년 헌정자료실에 다니고 있는데, 실제로 매일매일 읽고 있어도 잇따라 중요한 사료가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정자료실에 다니는 것이 즐겁습니다. (중략) 헌정자료실이 일본의 근대사 연구 발전을 위해 하고 있는 역할은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직원으로 일한 유이 마사오미(自井正臣)는 야마베에 대해 이런 회상을 남겼다.

"그 무렵은 정말 날마다 즐거워 보였다. 규칙적으로 아침 10시 30분경, 감색 보자기에 2, 3권의 책과 원고용지, 필통에 연필을 몇 개나 준비해왔다. 또 조간신문을 한 부 반드시 가지고 왔다. (중략) 10시 30분경부터 오후 4시 무렵까지는 사료를 베끼거나 차 준비를 하면서 정말 자유롭게 공부하고 있었다. 완전히 자신의 연구실 같은 느낌이었다. 스스로 헌정자료실 감옥의 감방장이라 칭했지만, 종종 열람하러 온 사람을 붙잡고 "너, 사료를 만년필로 베끼면 안 된다. 연필로 해라"라거나 "너는 무엇을 하고 있나. 그렇다면 그 책을 읽었는가. 사료 읽기 전에 저것을 먼저 읽어라" 라는 식으로 주의를 주거나 가르쳐서 도서관 직원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명물이자 기인
 
입법부에 속한 국가기관으로 국립국회도서관은, 입법활동 보좌를 위해 세운 의회도서관이다. 1948년에 개관했다. 국가도서관 기능을 겸하고 있다. 국립국회도서관은 도쿄에 본관을 두고, 간사이관과 국제어린이도서관을 분관으로 두고 있다.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입법부에 속한 국가기관으로 국립국회도서관은, 입법활동 보좌를 위해 세운 의회도서관이다. 1948년에 개관했다. 국가도서관 기능을 겸하고 있다. 국립국회도서관은 도쿄에 본관을 두고, 간사이관과 국제어린이도서관을 분관으로 두고 있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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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야마베는 '재야 연구자'로서 독특한 위상을 지녔다. 재야 연구자라는 위상은,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다. 강덕상(姜德相) 같은 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이니치'(在日) 강덕상이 '우리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야마베 겐타로와 만남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강덕상을 처음 만난 야마베는 이런 말을 건넸다.

"너는 조선 사람인데 왜 중국사를 하나? 일본의 근대는 조선 식민지 지배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이니, 일본에 있는 너희 조선인이 조선사를 해야 의미가 있다."

1989년 재일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국립대(히토츠바시대학) 교수가 된 강덕상의 이어지는 회고다.

"우리(강덕상과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는 둘 다 야마베 겐타로의 제자다. 도서관에서 야마베를 따라다니며 자료 모으는 것을 배웠다."

야마베가 도서관에서 어떻게 자료를 수집했길래, 훗날 이름난 학자가 되는 두 사람이 그로부터 자료 수집을 배웠다고 할까? 김효순이 쓴 야마베 겐타로에 대한 글을 옮겨 보자.

"그는 사료 수집의 대가였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사료 수집의 노하우를 배웠다는 후학들이 적잖다. 날마다 국회도서관에 딸깍거리는 게다를 신고 가서 수없이 문헌 대출을 신청했다. 결국 도서관 직원들이 질려서 아예 서고 출입을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했다. 나아가 도서관 한구석에 개별 공간을 마련해줘 개인 서재처럼 쓰도록 했다. 그에게 우편물을 보낼 때 주소 칸에 '국회도서관 야마베 겐타로'라고 쓰면 배달이 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히 국회도서관의 명물 대접을 받은 셈이다."

1차 사료로 증명한 역사적 진실
 
조선 근대사 연구의 개척자로 알려진 야마베 겐타로는 기인이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사회에 나와서도 청소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택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야마베의 기인 같은 풍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 야마베 겐타로 조선 근대사 연구의 개척자로 알려진 야마베 겐타로는 기인이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사회에 나와서도 청소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택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야마베의 기인 같은 풍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 서해문집 <역사가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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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후배들에게 '공짜'로 자료 수집 노하우를 전한 건 아니다. 야마베에게 푼돈을 '뜯긴' 후배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서관에 관련 문헌을 조사하러 나온 젊은 연구자들은 그에게 수시로 잔돈을 뜯겼다. 미야타 세쓰코(宮田節子)의 회고에 따르면, 야마베는 귀가하려고 도서관을 나서기 전에 차비가 없다며 10엔을 요구하곤 했다. 사는 데까지 가려면 20엔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얻어 쓰는 주제에 어떻게 다 타고 가느냐, 중간쯤에 내려서 걸어간다"라고 답했다. 그러다 <일한병합소사> 출판 기념회 자리에서 의외의 사실이 공개됐다. 야마베가 자신은 옷 안주머니에 항상 1만 엔을 갖고 다닌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평소에는 수중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쓰지 않는다고 밝혔다. 연구자란 언제, 어디서, 어떤 사료를 마주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비상금으로 갖고 다닌다는 것이다. 1만 엔은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수시로 대선배에게 푼돈을 뜯겼던 후학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자료 수집의 대가인 야마베는, 특히 1차 사료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1차 사료를 찾아라. 살아 있는 사료, 손대지 않은 사료를 찾아 공부하라!"

'논문은 사료로 말해야 한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던 야마베는, 자신의 지론처럼 엄격한 연구자였다. 그는 이런 엄격함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던 모양이다. 자신이 애써 모은 사료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거나 공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서관의 기인'답다.

앞서 감옥에 있을 때 야마베가 청소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출소 후에도 야마베는 자신의 집을 전혀 치우지 않았다. 도쿄 요요기(代々木)와 쵸후(調布)에 살았던 그는, 온갖 쓰레기 더미 속에서 고양이 30마리와 함께 살았다. 손님이 오면 방 한구석을 치우고 DDT를 뿌리고 앉으라고 했다. 머리와 수염을 다듬지 않았고, 옷차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미스즈서방(みすず書房) 편집자 오비 도시토(小尾俊人)는, 이 시절 야마베 겐타로를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수염은 깎지 않고, 손에는 보자기, 늘 게다(나막신)를 신은 차림으로 나타나 자료조사에 몰두하는 야마베 씨, 처음으로 아사가야(阿佐ケ谷)의 댁을 방문했을 때 인상이 선명하다. 책은 선반이 아닌 거실 바닥에 잔뜩 깔아놓고, 그 위에 침구와 식기도 놓여 있었다. 고양이가 십여 마리 그곳에 동거하고, 야릇한 냄새도 풍겼다. 그런 생활의 연상과는 전혀 대조적으로 원고의 글자는 한 칸 한 칸 단정하게 아름답고 멋있었다. 사실(事實) 앞에서의 겸허함, 명쾌한 판단, 산뜻한 문장, 순간의 유머, 그런 야마베 씨였다."

혹자는 야마베가 쓰레기 집에서,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 진실을 추적해, 누가 '역사의 쓰레기'였는지 끝내 증명했다.

고양이와 어린이를 사랑한 미식가
 
야마베 겐타로는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韓國倂合)에서 중전 민씨 사체 능욕설을 언급했다. 1895년 10월 8일 중전 민씨는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당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 낭인은, 중전 민씨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에 있는 녹산에서 불태웠다.
▲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야마베 겐타로는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韓國倂合)에서 중전 민씨 사체 능욕설을 언급했다. 1895년 10월 8일 중전 민씨는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당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 낭인은, 중전 민씨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에 있는 녹산에서 불태웠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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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그는 당뇨와 폐결핵으로 도쿄 구기야마 병원에 입원했다. 2년 후인 1977년 4월 16일 오후 9시 20분, 야마베는 구기야마 병원에서 회맹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77년 4월 28일 오후 2시, 그가 살던 히가시(東久) 구루메(留米) 단지 집회소에 300여 명이 모였다. 열흘 전 세상을 떠난 야마베 겐타로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언뜻 사회성 없어 보이는 야마베였지만, 많은 사람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그가 고양이를 30마리나 거두어 키웠다는 점도 이채롭다. 또한 야마베는 '미식가'였던 걸로 알려져 있다. 하루에 아이스크림을 40개나 먹었다는 일화가 있고, 말년에 구기야마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찹쌀떡을 먹기 위해 병원을 몰래 빠져나가기도 했다. 야마베가 세상을 떠난 후 추모 문집으로 출간된 책은, 야마베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구 지껄이는 잡담 속에서도 사실과 인간에 대한 면도날 같은 날카로운 경구(警句)를 날리고, 지식과 책을 사랑하고, 등산을 유일한 취미로 삼고, 고양이를 사랑한 그 품격을 그리워하며 기억할 것이다."

야마베 겐타로는 일제가 행한 조선통치의 실태를, 자료와 통계를 바탕으로 규명했다. 일제가 공표한 자료 중에는 '분식'(粉飾)된 자료가 많아, 통치자가 사용한 자료와 비밀사료를 주로 활용했다.

을미사변 당시 '중전 민씨 시체 능욕설'도 야마베 겐타로의 연구로부터 조명받았다. 야마베는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韓國倂合)에서 한국통감부 고위 관료가 쓴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蔵) 보고서>를 인용하며, 부랑배들이 왕비의 시체를 능욕했던 내용을 언급했다.

야마베는 '중전 민씨 시해가 일제가 조선에서 범한 죄악 중 가장 엄청난 행위'이며, '을미사변에 대해 지금까지 적힌 것은 전부 거짓투성이라고 해도 좋다'라고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했다.

그가 폭로한 일제의 만행과 바보짓
 
1977년 4월 16일 야마베는 도쿄 구기야마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책과 고양이를 사랑한 그가, 유일한 취미로 삼았던 것이 등산이다. 나카츠카 아키라의 오사카 집에서 기이산지로 산행을 떠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 산행을 앞둔 야마베 겐타로 1977년 4월 16일 야마베는 도쿄 구기야마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책과 고양이를 사랑한 그가, 유일한 취미로 삼았던 것이 등산이다. 나카츠카 아키라의 오사카 집에서 기이산지로 산행을 떠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 씨알누리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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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한일 교류사를 연구한 이수경 교수는, 야마베 겐타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1977년 타계한 야마베가 남기고 간 역사학자의 '양심'이야말로 진정한 한일 관계의 얽힌 역사를 풀어나갈 수 있는 내일을 위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 식민통치에 직접 관여한 대다수 일본인 고위 관료는, 일본 패전 후에도 조선 통치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라는 것은 영국의 인도 지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한 적이 없다.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하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한 것뿐이다."

야마베 겐타로는 일본이 조선 통치 과정에서 '선의(善意)의 악정(惡政)을 했다'라거나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을 "참으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라고 비판했다.

야마베는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조선인의 생활이 같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일본이 통치 과정에서 행한 '바보짓'도 낱낱이 나열했다. 군인 출신의 조선총독 임명, 신사 참배 강요, 군사비 부담, 조선인 징병과 창씨개명... 결국 일본의 '선의'는 증명할 수 없고, '악정'만이 남았다는 것이 야마베의 '결론'이다.

한국의 불행은 조선의 식민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야마베는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인에게 조선 통치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그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를 썼다.

그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일까?
 
야마베는 세상을 떠난 다음, 후지와라 가문 묘소에 묻혔다. 후지와라 다카요는 야마베의 아내다. 야마베와 후지와라 두 사람의 묘비는, 히로시마시에 있다.
▲ 야마베 겐타로와 후지와라 다카요의 묘비 야마베는 세상을 떠난 다음, 후지와라 가문 묘소에 묻혔다. 후지와라 다카요는 야마베의 아내다. 야마베와 후지와라 두 사람의 묘비는, 히로시마시에 있다.
ⓒ 씨알누리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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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전반기를 '사회주의 운동가'로 산 야마베는, 생애 후반부는 도서관의 책과 사료에 파묻혀 '역사 연구자'로 살았다. '도서관'에 많은 신세를 졌기 때문일까? 후학 중 한 사람이 야마베에게 이런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선생님만큼 평생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일제 때는 감옥에 들어가 보호받고, 전후에는 국회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고, 돈이 없으니 세금을 낸 적도 없으니까요."

'도서관 인물사'는 도서관장이나 사서처럼, 도서관에서 '일한 사람'만의 역사일까? '이용한 사람' 이야기는 '도서관 역사'에 포함되지 않는 걸까?

야마베 겐타로 이야기는 일본인이, 일본 도서관에 남긴 이야기다. 일본의 치부를 들췄다는 점에서, 그는 일본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할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한국인보다 우리 근현대 역사를 뜨겁게 연구했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도서관을 열렬히 이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야기는 강렬한 흥미를 일으킨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에게 그는 '진상 이용자'였을 수 있다. 그런 그가 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 사서도 놀랍다. '도서관'이 없었다면, 야마베는 역사 연구자로서 자신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이다. 도서관 서가를 헤매며 수많은 자료를 뒤진 그의 이야기는, 국적을 떠나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자료를 통해 그는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 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파장을 가져올까? 야마베는 진실을 추구했으되, 외면받는 삶을 살았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의 잘못을 낱낱이 규명한 야마베는 어떤 사람일까? '도서관의 기인'으로 살았던 야마베는 상당수 사람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일본의 보수 우익은 일본의 치부를 드러낸 그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우리에게 야마베는 어떤 사람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태그:#야마베 겐타로, #국립국회도서관, #역사가, #도서관이용자, #조선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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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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