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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사건은 그 폭력 피해의 양태나 규모 면에서 매우 심대한 인권침해가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은 사건이기도 했다. 세상의 무관심이 이어지자 이를 찢고 피해자들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와 비견되곤 하는 그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또한 '지옥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비가시화된 형제복지원 폭력 피해의 진상을 <절멸과 갱생 사이>에서 사려 깊게 다루고 있다.

인신매매 국가의 민낯

흔히 '시설'이라 불리는 수용 시설의 인권침해의 상상력은 장애인이나 정신질환 환자들에게 국한되곤 하지만, 그 기원은 꽤 오래다. "한반도에서 '부랑인'이라는 법주의 출현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결부된 인종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의도와 관련"되어 있었다. 1917년 최초로 강제 격리된 대상은 '부랑인 나환자'였다. 감염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는 나환자들을 격리하고 가두는 인권침해를 묵인하게 했다.

일제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람들은 병들고 헐벗고 굶주리게 되었다. 집과 고향과 가족을 잃은 상당수가 '부랑인'이 되었지만, 국가는 이를 적극적으로 돌보지 않았다. 국가는 이들을 보호할 책무를 민간에 떠넘기고 열악한 시설에 가둠으로써 사회를 정화한다고 선전했다. 먹고 살 길이 없어 길에서 살아가던 걸인, 껌팔이, 앵벌이, 노변 행상, 넝마주이 등을 '부랑인'이라 명명하고, 이들을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저해'하는 '사회악'으로 몰아세워 대대적인 단속과 격리에 들어간다. 이렇게 잡아들인 '부랑인'을 가장 큰 규모로 수용한 곳이 바로 형제복지원이었다.

1960년 형제육아원으로 시작한 형제복지원은 전후 구호활동의 역할을 수행하던 수용시설이 민간복지시설로 재편되는 1970년을 기점으로 급속 팽창해, 1986년에는 3100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시설이 되었다. 1975~87년까지 약 4만 명을 수용했으며, 이 기간 동안 밝혀진 것만 513명의 무고한 목숨이 희생되었다.

사회정화를 목적으로 '부랑인'을 잡아 가두었다지만 이들의 상당수는 부랑인이 아니었다. 상부로부터 할당된 실적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경찰은 멀쩡한 사람들(상당수가 아이들)을 부랑인으로 조작해 수용시설에 넘겼고, 국가보조금을 받아 운영되는 시설은 이들과 결탁해 수용인들의 인권을 침탈하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이렇게 짚고 나면, 시설과 경찰 이를 묵인한 검찰과 법무무 등에게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다 싶지만, 피해와 가해의 지점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당시 시설이 위치했던 지역 경제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주는 노동력 착취를 위해 시설과 담합한다. 게다 지역민들의 수용인들을 향한 극단적인 혐오와 공포는 수용인들을 지속적으로 격리하도록 요구했다. '부랑인 지역신고 책임제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역의 통반장을 중심으로 꾸려진 주민 조직의 '자발적 신고' 체계는 시군구청과 긴밀히 연결되어 시설 수용인을 통제해왔다.

또한 지역의 읍면동장이 '귀향 부랑인 신상기록 카드'를 작성해 관리해 온 역사는 지역민이 바로 수용 시설인에 대한 감시자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가둬도 되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 혐오와 차별과 배제의 동인은 시설의 수용인들이 시설을 벗어나서도 자유롭게 살 수 없게 했고 시설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숨기며 살게 만들었다.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살 권리를 박탈했던 것은 비단 공권력만이 아니었다.

뿌리 깊은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시스템은 시설 피해자들을 오랜 시간 질병과 가난 속에 고립시켰다. 오랜 수용 생활로 입은 심리적 내상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능력을 상실시켰고 회복되기 어려운 삶의 단절을 겪게 했다. 1987년부터 형제복지원의 심대한 인권침해 참상이 세상에 드러났기 시작했음에도, 오랜 시간이 지난 2012년에야 피해자 증언이 나오기 시작한 이유가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음식, 고된 노동,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구타, 일상화된 모욕, 성착취와 성폭력이 만연한 매일이 형제복지원 수용인들의 삶이었다. 무조건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왜 갇혔는지 왜 맞는지를 물을 수 없는 "맞아도 저항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고, "당장 오늘 안 맞고 좀 더 잘 수 있"는 것만이 하루의 목표가 되게 했다. 그렇다면 이런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누구였을까?

형제복지원은 수용 집단을 수용자와 관리자로 분할했다. 즉 수용자 중 일부를 관리자로 만들어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가 되게 하면서, 쥐꼬리만 한 권력을 나눠 준 관리자를 앞세워 폭력을 대리시킴으로써 피해자를 다시 가해자와 피해자로 분할시키는 악랄함을 보였다. 이로써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피해자이면서 여일한 피해자가 될 수 없는 까다로운 지점에 놓이게 된다. 이 중 가장 커다한 피해의 간극은 성폭력에 있다.

시설의 여성 성착취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형제복지원 수용인들 중 상당수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남성 수용인들처럼 무지막지한 폭력에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상시적인 성폭력에 놓여 있었음을 함의한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박순이는 그 자신이 성폭력의 피해자였으며, 다른 여성 수용인들이 당한 성폭력의 목격자이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경찰에 납치되어 형제복지원에 감금되었다.

감금된 지 7년여 만에 목숨을 걸고 형제복지원을 탈출한 박순이는 탈출 전 남자 관리자에게 당한 성폭력으로 임신하게 되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 속에 출산한 후 그는 아기를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다. 형제복지원에 감금되어 살았던 피해가 주홍 글씨가 되는 세상에서 성폭력 피해로 낳은 아이를 키울 수는 없었다.

게다 형제복지원에서 입은 심리적 내상은 그를 고통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유리처럼 깨져버린 불안한 내면은 사람과 관계 맺기를 어렵게 했고, 술에 의지하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탈출했어도 그의 정신은 형제복지원 그 깊은 어둠 속에 고박 되어 있었던 것이다.

형제복지원의 밤은 모두 잠든 듯하지만 모두 잠들 수 없는, 누군가는 야수의 아가리로 들어가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모진 시간이었다. 박순이와 같은 방을 쓰는 언니는 밤마다 불려나가 한참이 지나 돌아오곤 했다. 돌아온 언니의 손엔 과자 부스러기 따위가 쥐어져 있었다. 언니는 그것들을 같은 방 어린 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정작 자신은 그 어느 것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한 채 잠자리로 스며들었다.

성폭력을 당한 언니들의 임신이 감지되면 즉각 불법 낙태가 이루어졌다. 시설 내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지속적인 성폭력이 묵인되고 이로 인한 낙태와 불임시술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시설 책임자건 관리자건 할 것 없이 여성 성폭력에 있어 모두가 공범이며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박순이도 관리자에게 불려가 성폭력을 당하고서야, 그 밤 언니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절망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어두운 밤 언니의 손에 들려온 과자 부스러기를 먹었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박순이나 그의 언니처럼 여성들이 겪어야만 했던 가부장의 위력은 비단 형제복지원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고 여성들을 성폭력의 그늘에 가두었다. <절멸과 갱생 사이>의 논고 중, 추지현의 '사회적 배제의 기술들'은 젠더가 교차하는 폭력의 맥락을 짚어내고 있다.

형제복지원뿐 아니라 국가가 나서 '부랑인'을 단속하고 격리 수용한 사례는 수두룩하다. 1960년대의 국토건설단과 개척단뿐 아니라 여성들만을 수용한 서울특별시립여자기술원도 상당한 규모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1961년 윤락행위 방지법은 '윤락녀'를 보호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보호지도소를 설치해 사실상 여성들을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했다. 1964년 서산개척단 단원 225명과의 단체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서울시부녀보호소의 여성들이 강제 동원되었다.

이 사실은 "여성은 노동의 주체인 남성의 정착과 안정을 지원하거나 수용 상태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성애화된 보조적 존재로 활용되었고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기고 했"던 여성 잔혹사를 다시 한 번 일깨운다. 추지현이 논고에서, 시설 어디서나 벌어진 여성 성착취와 이로 인한 강제 불법 낙태와 강제 불임시술에 대한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정부가 한센인 피해 사건 피해자 392명을 추가 확인해 지원하기로 했다. 한센인들은 일제 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강제 격리 감금되어 폭행, 살해, 강제 노역, 강제 불임시술 등의 인권 침해를 당한 대표적 집단이다. 비록 충분하지는 않지만 이들에 대한 진상조사와 보상이 행해진 것처럼, 형제복지원에 대한 진상 규명과 보상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피해자들이 대선 후보자들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나섰지만 구호 속에 묻힌 이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피해자들의 고통에 응답하라. 이들도 국민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절멸과 갱생 사이 - 형제복지원의 사회학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연구팀 (엮은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21)


태그:#형제 복지원, #절멸과 갱생 사이, #국가 폭력, #시설 성폭력 , #인권 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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