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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가장 맞닿아 있는 술 중 하나인 맥주. 우리는 맥주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문화로서의 맥주를 이야기하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편집자말]
맥주들.
 맥주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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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단골집이 된 서울의 주점이 있다. 예전에, 여러 종류의 맥주가 펼쳐져 있는 그 집의 메뉴판에서 어떤 맥주를 마실지 고르다가 낯선 이름을 접했다. 'IPA'. 무슨 맛이 나는 맥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시켜보기로 했다. 새로운 것을 호기롭게 도전해서 나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묘했다. 분명히 과일이나 풀 같은 향이 나는데, 맥주치고는 맛이 너무 썼다. 도수도 꽤 높았다. 한 잔만 마셨는데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맛있는 맥주는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 강렬한 첫 만남 이후, 나는 마트나 편의점에 갈 때마다 'IPA'라는 세 글자를 찾아 헤맨 것이다.

IPA란 페일 에일(Pale Ale)을 강화한 인디아 페일 에일(India Pale Ale)의 줄임말이다. 영국이 식민지 인도로 맥주를 운송하는 동안, 맥주의 변질을 막기 위해 홉(Hop)을 듬뿍 넣으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과정에서 풍미는 강해지고, 알코올 도수 역시 높아졌다.  

20세기 후반, 시에라 네바다 등을 중심으로 크래프트 맥주의 부흥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때, IPA는 크래프트 맥주에 빼놓을 수 없는 맥주 스타일이었다. 홉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풍미가 크래프트 맥주를 대기업형 맥주와 차별화시켰기 때문이다.

새로운 맛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복잡 미묘한 홉의 향과 쓴맛을 지닌 IPA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IPA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로 발전했다. 2010년대 중후반 이후로는 미국 동부를 기점으로, 홉(Hop)으로 만들어낸 열대 과일과 같은 풍미를 자랑하는 '뉴잉글랜드 IPA'가 맥주 신의 판도를 흔들고 있다. 내가 요즘 가장 즐겨 마시는 맥주 스타일 역시 뉴잉글랜드 IPA다.

그러나 이따금 보다 고전적 스타일인 '웨스트 코스트 IPA'가 떠오를 때가 있다. 197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양조장 '앵커 브루잉'이 독립 전쟁 200주년을 기념하는 맥주 '앵커 리버티 에일'를 고안하던 도중, 영국산 홉이 아니라 케스케이드 등 미국산 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이것이 웨스트 코스트 IPA의 시발점이다. 미국 서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웨스트 코스트 IPA는 송진향과 캐러멜의 단맛, 강한 쓴맛 등을 주된 특징으로 삼고 있다. 많은 사람이 IPA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맛이기도 하다.

IPA 역사의 한 페이지, 라구니타스
 
맥주.
 맥주.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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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웹 매거진 'firstwefeast'는 '지난 40년 동안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 IPA를 정의한 10개의 맥주'를 뽑은 적이 있다. 미국의 이름난 양조사들이 뽑은 명단이다. 크래프트 맥주 역사의 시작점에 있는 시에라 네바다 페일 에일, 스톤 IPA 등 쟁쟁한 맥주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 목록에 '라구니타스 IPA'가 있다. 앵커 브루잉의 양조사 마크 카펜터는 "라구니타스는 웨스트 코스트 IPA의 지역성을 무색하게 만들고, IPA를 전국적으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카펜터의 말처럼, 라구니타스 IPA는 캘리포니아를 벗어나, 미국 전체를 대표하는 웨스트 코스트 IPA다. 치누크와 캐스케이드 등의 홉이 만드는 허브, 솔향이 코를 자극한다. IPA나 페일 에일에 익숙하지 않다면, 이 솔향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도수가 낮지 않으면서도, 부담없이 목을 넘어간다는 것이 이 맥주의 강점이다. 쓴맛을 나타내는 지표인 IBU는 52 정도로, IPA 중에서는 쓴맛이 크게 높은 편이 아니다.

높은 접근성 역시 강점이다. 2015년, 하이네켄은 라구니타스 브루잉의 지분 50%를 인수했다. 그리고 지금은 하이네켄 코리아를 통해 국내에 들어오고 있다. 수년 전 국내에 처음 수입되었을 때는 5~6천 원 이상의 고가에 팔렸던 맥주인데, 이제 2~3천 원대의 가격에 팔릴 수 있게 되었다. 편의점에서는 4캔에 1만1000원이다. 어딜 가든 1달러대에 라구니타스 IPA를 마실 수 있는 미국만큼은 아니어도,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맥주가 된 것이다.

'크래프트 맥주'가 대기업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 용어라는 점을 생각하면, 라구니타스 IPA를 '크래프트 맥주'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맛이다. '법적인 신분'이 달라졌다 해도, 맛에는 변함이 없다. 열대과일 쥬스처럼 향긋한 맥주가 트렌드로 떠오른 요즘, 라구니타스의 촌스럽고 우직한 맛은 오히려 매력이다.

라구니타스 IPA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IPA다. 저렴하지만 훨씬 더 비싼 스톤 브루잉의 '스톤 IPA'나 '밸라스트 포인트 브루잉'의 스컬핀 등과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다. IPA에 입문하고 싶다면, 크래프트 맥주를 취미로 만들고 싶다면, 비싼 맥주에 앞서 라구니타스를 마셔 보자. 새로운 문화를 배운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편의점에 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리고 처음 마셨던 IPA의 맛과 비교를 해 보아도 좋겠다.

태그:#맥주, #라구니타스, #IPA, #아이피에이, #크래프트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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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과 공연,영화, 책을 좋아하는 사람, 스물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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