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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시에 존재하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민영휘 묘 전경
 강원도 춘천시에 존재하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민영휘 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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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거두 민영휘의 손자 민병도(閔丙燾, 1916년~2006)가 충북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 토지 21필지 5만여㎡를 선친에게 물려받아 처분한 것으로 확인됐다.

남이섬의 설립자로 유명한 전 한국은행장 민병도는 민영휘의 손자다. 그의 친부는 민영휘와 첩 안유풍 사이에서 태어난 민대식(閔大植)이다.

민대식도 아버지 민영휘 못지않은 친일반민족행위자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올랐고, 광복 이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른 반민특위의 조사 대상자였다.

민병도의 친부는 민대식이지만, 민천식(閔天植. ~1915)의 호적에 올랐다. 민천식은 민영휘와 첩 안유풍 사이에서 태어났고, 자손을 보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숨졌다. 민병도는 아들이 없는 민천식의 양자로 입양됐다.

<충북인뉴스>가 토지대장 열람을 통해 확인한, 민영휘의 후손 민병도가 소유했던 음성군 유포리 토지는 총27필지, 5만520㎡(옛 1만5309평)에 달했다.

본보가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유포리 토지대장을 전수 조사한 결과, 민병도가 소유한 토지 21필지의 최초 등기자는 민병도의 양아버지 민천식으로 나타났다. 이후 1934년 민천식이 소유했던 토지는 민병도로 소유가 이전됐다. 이전 당시 민병도의 나이는 한국 나이로 19세에 불과했다.

이렇게 이전된 토지는 2년 뒤인 1936년 민영휘가 설립한 신탁회사인 조선신탁주식회사로 다시 소유가 이전됐다. 1947년 다시 토지 명의는 조선신탁주식회사에서 민병도로 돌아왔다.

나머지 6필지의 최초 소유자는 민병도가 최초 등기자였다. 이중 3필지는 1927년 민병도의 명의로 등기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12세였다. 민병도는 27필지 중 절반을 넘는 토지 15필지를 1947년과 1949년에 집중 매각했다.

토지 매각은 2000년대까지 계속됐다. 민병도는 2005년과 2006년에 걸쳐 3필지를 팔아 부를 챙겼다. 매각 당시 토지는 국세청에 압류된 상태에서 공매 절차를 통해 제3자에게 넘어갔다.

민영휘, 음성군에 얼마나 많은 토지를 소유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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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휘가 충북 음성군에 소지한 토지의 규모는 남금자(충주시청) 학예사의 박사논문 '대한제국기 민영휘의 충주 일대 토지 소유와 경영사례' 논문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남금자 학예사의 논문은 대한제국 당시 작성된 광무양안 중 '충주군 영안'을 바탕으로 저술됐다.

양안은 현재의 토지대장에 해당한다. 이에 따르면 민영휘는 음성군 금왕읍과 음성읍, 대소면과 맹동면, 생극면과 삼성면, 그리고 감곡면에 233개 필지, 63만여㎡ 토지를 보유했다. 양안 작성 당시 해당 지역은 행정구역상 충주에 속해있었다. 행정구역인 리(里)로 환산하면 23개 리에 민영휘의 토지가 분포했다.

민영휘 아닌 왜 민천식 이름으로 등기됐나?

민천식은 조선황실의 외척으로 최고 권세를 가졌고 당대 최고 부자였던 민영휘의 아들이었던 만큼 시시콜콜한 동정까지 언론에 보도된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유학'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휘문의숙 학도 민천식씨 등이 일본에 유학할 차로 삼작일에 발정하였다더라"라고 보도한다.

1910년 3월 19일 <대한매일신보>는 민천식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보도한다. '떡 해먹지'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보국 민영휘씨의 집 반찬 만드는 늙은이의 딸이 나이 지금 16세인데 민씨의 아들 천식씨가 그 계집아이와 통간하여 백년가약을 맺었더니 천식씨의 부인이 그 사실을 알고 일전에 그런 일을 부모에게 고발하였음으로 큰 풍파가 났어다더라"라고 보도한다.

민천식은 아버지 민영휘가 백성을 수탈하고 모은 재산과 한일병합 공로로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을 모태로 세운 한일은행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던 중 1915년 사망한다.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 토지가 민천식 이름으로 등기된 시점은 1912년. 민영휘는 왜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민천식의 이름으로 등기를 했을까? 실마리는 다름 아닌 민영휘의 장자인 '민형식'의 입에서 나온다. 민형식은 민영휘와 본부인 사이에 자손이 없자 입양된 인물로 '형식상' 민영휘의 장자에 해당된다.

1938년 10월 1일 잡지 <삼천리>는 민영휘의 장자 민형식이 그의 동생 민대식 등을 상대로 제기한 유산상속 소송관련 내용을 보도한다. 기사 제목은 '민씨가 비극, 일천만원 골육소, 몰후 2(二)년 민영휘가에 슬픔의 싸홈은 열여, 구월이십일 제 일회재판이 서울서 열니다'이다. 부제는 '돈이냐? 골육(骨肉)이냐?'로 다소 자극적이다.

기사에 따르면 민영휘의 큰아들 민형식은 아버지의 재산관리에 대해 "일체의 재산을 자기 소유 명의로 피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민형식은 소장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원고(민형식)는 원래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을 뜻으로 하고 전혀 서도(書道)와 문학을 수학하였다. 이에 반하야 피고(민영휘 차남 등)들은 당초부터 은행의 업무 기타 재게에 종사를 하고 있었던 관계상 조선토지조사령에 의한 토지신고를 할 때 부동산에 대하야는 거의 다 피고들에게 신탁하고 동인 명의로 신고를 하여 사정(査定)을 받었으며, 은행의 주식도 피고들의 명의로 신탁하고 또 선대 자신이 총재산을 관리하고 수익한 금액으로써 이후 매수한 부동산도 전부 피고 등과 피고 대식의 장남 병수(丙壽), 이남 병도(丙燾) 등에게 신탁했다."

민형식의 주장을 요약하면 민영휘는 토지등기 당시 부동산은 민대식과 민천식, 민규식의 이름으로 차명 등록하고 이후 취득한 부동산도 피고들의 명의로 신탁했다는 것이다.

민형식은 민영휘의 재산에 대해서도 "관권을 이용하여 불법한 축재를 한 것이라며 세평이 험악하다"고 지적했다. 또 "재산을 반환하여 달라고 하는 사람까지 다수 있으므로 민영휘는 일체의 재산을 자기의 소유 명의로 함을 피하고자 하였다"고 꼬집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음성군 유포리 소재 토지는 민영휘가 관권을 이용하여 불법 축재한 재산이고, 아들 민천식 등의 이름을 빌려 차명으로 관리한 재산이다.

충북인뉴스가 유포리 토지만 조사한 이유

충주시청 남문자 학예사의 논문에 따르면 민영휘는 음성군 금왕읍과 대소면, 맹동면, 생극면과 삼성면 그리고 감곡면 소재 23개 리(里)에 233개 필지, 63만여㎡ 토지를 보유했다.

본보는 이중 23개 리(里) 중 금왕읍 유포리 한 개 마을만 조사했다. 유포리만 조사한 이유는 바로 토지대장을 열람할 때 발생하는 비용 문제다. 토지 1필지를 열람하는 데 납부해야 하는 금액은 300원.

유포리에만 1천여 필지가 존재한다. 1천필지만 보아도 30만 원이다. 23개 리(里) 토지대장을 열람하려면 어림잡아 700만 원 정도 소요된다. 또 토지 소유현황을 확인하려면 별도로 토지대장을 발급받아야 한다. 토지대장 발급비용은 1필지당 500원 이 소요된다.

본보는 취재비용이 확보되는 대로 순차적으로 음성군 퇴지대장을 전수 조사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민영휘, #민천식, #민병도, #남이섬, #민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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