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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세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볼 수 있을까? 신분제가 철폐되고 문물 제도를 근대식으로 고친 갑오개혁(1894년) 이후를 근세의 시작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개혁을 해나간 때부터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근세의 시작을 보는 관점은 각각 다르지만 우리 역사에서 '흥선대원군'이 차지하는 부분은 분명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아버지다. 왕이 대를 이을 자손, 곧 왕자가 없이 죽을 경우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을 사람을 구한다. 그럴 경우 왕위를 이은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대원군'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흥선대원군의 등장

조선 왕조 시대에는 모두 5명의 대원군이 있었다. 하지만 생전에 아들이 왕이 된 것을 본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하다. 조선의 25대 임금인 철종이 보위를 이을 왕자가 없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다음 왕으로 추대한다. 바로 고종이다.
     
고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왕의 나이가 어려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흥선대원군이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했다. 흥선대원군이 치세를 한 기간은 약 십 년 간이었다. 이 기간에 대원군은 참으로 많은 일을 했는데 그가 한 일의 공과는 보는 이에 따라 각자 다를 것이다. 개혁적인 면에 호응하는 사람들도 있고 나라의 문을 닫아 걸은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경고비와 덕진돈대
 경고비와 덕진돈대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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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보여주는 유적지가 있다. 덕진돈대 아래에 있는 '경고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리는 이 경고비는 흥성대원군의 명으로 1867년 강화 덕진첨사가 외국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석 정면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문장이 음각되어 있다.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다 문을 닫아라

경고비가 있는 덕진돈대를 보러 갔다. 덕진돈대(德津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바닷가 언덕에 있는 돈대이다. 강화의 5개 진 중의 하나인 '덕진진'에 속해 있던 덕진돈대는 서해에서 한양으로 들아가는 길목인 강화해협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에 있는 요새였다.

덕진진과 덕진돈대는 우리 역사에서 두 번 크게 등장한다. 첫 번째는 병인양요 때였다. 1866년 10월, 프랑스 군에 의해 강화가 점령당했다. 나라의 부름을 받은 양헌수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강화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강화로 들어갈 길이 없었다.  강화로 들어가자면 김포 성동나루에서 강화 갑곶나루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갑곶나루는 프랑스군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양헌수 장군은 프랑스 군의 감시가 미치지 못한 강화의 덕진진 쪽으로 바다를 건너왔다.
 
남장포대와 언덕 위 덕진돈대.
 남장포대와 언덕 위 덕진돈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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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1월 7일, 500여명 규모의 정예부대를 인솔한 양헌수 장군은 어두운 밤에 강화해협을 건넜다. 덕진진에서 이십여 리 남짓 걸어 정족산 삼랑성 안의 전등사에 진을 친 조선군은 11월 9일 치열한 교전후 프랑스군을 격퇴시켰으니 이를 일러 '병인양요 정족산성 전투'라고 한다.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신미년(1871)에 양이가 또 쳐들어왔다. 미국 아시아함대였다. 미군은 군함 5척에 1,230명의 병력과 함포 85문을 싣고 조선 침공에 나섰다. 1871년 6월 10일에 초지돈대를 함락한 미군은 이튿날인 6월 11일에 덕진돈대를 공격했다.
 
덕진진
 덕진진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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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돈대에서 2.2km 거리에 있던 덕진진과 덕진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진지였다. 덕진진에는 덕진돈대와 용두돈대 뿐만 아니라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도 있었다. 덕진포대에는 포혈이 8개 있었고 남장포대(南障砲台)에는 15개의 포혈이 있어 두 곳 합해 23개의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남장돈대는 자연적인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바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천연의 요새였다. 

신무기 앞에 무릎 꿇은 조선군

강력한 화력이 집중되어 있던 덕진진과 덕진돈대는 미군의 함포 사격을 맞아 함락당한다. 조선군의 화포는 신식 무기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당시 조선군 포대에는 홍이포가 주로 배치되었는데, 그 포는 사정거리가 700m에 불과했다.

또 장전해서 발사하기까지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이에 비해 미군의 함포는 사정 거리도 멀 뿐 아니라 파괴력도 높았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조선군은 미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덕진돈대를 점령한 미군들.
 덕진돈대를 점령한 미군들.
ⓒ 강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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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함포 사격에 덕진진과 덕진돈대는 무너졌다. 이후 미군은 계속 진격해서 광성보도 점령했다. 조선군은 광성보에 병력을 집중하고 미군과 접전했는데 신무기의 화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신미양요 때 조선군 사상자는 350여명에 달한다. 이에 비해 미군 사상자는 사망 3명에 부상 10명에 불과했다. 단순 비교로만 보면 조선군이 진 전투였지만 그렇다고 미군이 이긴 전쟁도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의 개항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갔으니 어찌 보면 미군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졌다고 볼 수도 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후 더 강력하게 쇄국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흐름에 눈을 감는 일이었고, 결국 조선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만약 대원군이 문호를 활짝 열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궁금해진다.  

역사 앞 우리의 의무
 
남장포대
 남장포대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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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때 파괴된 덕진진과 덕진돈대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세상은 변했고, 더 이상 돈대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덕진돈대는 다른 돈대들과 함께 방치된 채 폐돈의 길을 걸었다.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카터 행정부와 갈등을 겪었다. 정부는 우리 역사에서 미국과 대적해서 이겼던 전쟁인 신미양요를 떠올렸고, 그 현장을 복원하는 전적지 정화 사업을 벌였다. 광성보와 덕진진 그리고 초지진이 신미양요의 현장이었다.
     
1976년 강화 전적지 복원 사업 때 덕진진의 성곽과 문루를 복원했다. 남장포대의 15개 포혈(砲穴)도 복원했다. 과거 덕진진 관할 아래 있던 돈대와 포대에는 모두 60여 문의 화포가 있었다. 복원된 덕진돈대에는 4개의 포대(砲臺)가 과거의 그 자리에 그대로 설치되었다. 남장포대의 15기의 포혈도 복원되었다. 현재 남장포대에는 7문의 대포가 놓여 있어 과거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덕진돈대 성벽 위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 좁다란 이 바다는 한양으로 드나들던 물길의 길목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나라와 조정을 지키기 위해 강화해협에 '경고비'를 세웠지만 그것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조선은 이후 시대의 격랑을 온 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로부터 150년도 더 세월이 흘렀다. 현재의 우리나라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있을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있다. 

<덕진돈대 기본 정보>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373
- 입지 : 강화해협 바닷가 언덕의 꼭대기 평탄면
-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 규모 : 너비- 동서 34m, 남북 26m. 둘레 - 120m. 잔존 성벽 높이 - 3.8m 
- 형태 : 네모 모양
- 문화재 지정 여부 : 비지정
- 보수 이력 : 1977년 복원
- 시설 : 문 1개, 포좌 4개

덧붙이는 글 |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태그:#강화도여행, #돈대기행, #덕진진, #덕진돈대, #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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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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