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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상류 옥정호의 호반에 위치한 전북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는 <대장금>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대장금마실길은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이야기도 풍부하다.

섬진강 옥정호 호수에 비치는 청량한 아침 햇살을 보면서 장금리의 대장금마실길을 걷고 싶었다. 여명이 자욱한 한적한 길을 달려오니 1월 하순의 차가운 아침이 밝았다. 농촌 버스 한 대가 임실군 강진에서 오전 8시 조금 넘어 장금리 황토마을에 올라왔다. 몇 분이 승차하고 버스는 곧 되돌아 내려갔다. 이곳은 십여 분이면 도착하는 임실군 강진이 생활 거점 역할을 한다.
 
옥정호 장금리 일출. 산과 호수는 여명의 색조를 간직하고 있는데 태양은 순수하게 밝다.
 옥정호 장금리 일출. 산과 호수는 여명의 색조를 간직하고 있는데 태양은 순수하게 밝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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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마을을 지나 난국정(蘭菊亭) 앞의 황토섬으로 둑길로 걸어갔다. 하늘이 열렸고 햇살이 비추어 호수가 깨어난다. 아직 산과 호수에 여명의 색조가 머물러 있는데 태양은 순수하게 밝다. 태양이 호수 속으로 이어져 불기둥으로 타 올라 마음마저 설렌다.

대장금마실길은 5개 코스에서 선택하여 걸을 수 있다. 1코스(3.2km), 2코스(5.23km)와 3코스(8.63km)는 장금산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코스인데 거리를 늘려가면서 호숫가 둘레길로 조성해 놓아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하기 좋다. 4코스(4.68km)와 5코스(10.33km)는 순창 회문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이화동 계곡을 한 바퀴 이어서 걷는 둘레길로 동학혁명과 의병의 역사 문화 유적지가 있는 둘레길이다.
 
대장금마실길 안내판. 대장금마실길은 대장금의 고향길로 멋지고 품격 높은 둘레길 걷기가 된다.
 대장금마실길 안내판. 대장금마실길은 대장금의 고향길로 멋지고 품격 높은 둘레길 걷기가 된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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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 오나라 아주 오나 가다라 가다라 아주 가나.' 20년 전에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大長今)>의 주제가는 장면이나 상황에 따라 애잔하거나 경쾌하여 한국적 신명과 향수까지 느끼게 하는 리듬이 매력 있었다. 이 노래를 들으며 대장금마실길의 한 코스를 걸으면 멋지고 품격 높은 둘레길 걷기가 될 것 같았다.

조선시대 중종(中宗, 1488~1544)은 18세인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왕이 된다. 이곳 산내면 너디마을에서 희빈 홍씨(1494~1581)가 중종의 후궁으로 입궐했고 이 마을에 살던 장금이가 시녀로 따라갔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는 <대장금>이 최고상궁과 어의로 활약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장금의 기록을 조선왕조실록 누리집에서 검색하여 확인해 보았다. 의녀는 조선시대에 의술을 익혀 내의원과 혜민서에서 일을 하는데 천민 신분으로 관비 출신이 많았다.
 
난국정. 대장금마실길에는 역사와 문화가 투영된 이야기들이 살아있다.
 난국정. 대장금마실길에는 역사와 문화가 투영된 이야기들이 살아있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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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0년(1515.3.21.)에 '의녀 장금이 공이 있었으나 상을 받지 못하였다'는 내용으로 '의녀 장금'이 실록에 등장한다. 중종 19년(1524.12.15.)에는 '의녀 대장금이 의술이 조금 훌륭하니 장금에게 전체아(全遞兒, 정규직)를 주라'는 어지를 내린다. 이로부터 20년 동안 대장금에게 쌀과 콩 등을 하사한 기록이 몇 번 나온다.

중종 39년(1544) 10월에는 25일, 26일과 29일에 잇달아 의녀 장금이 중종의 병세를 치료한 기록이 나오고, 이해 11월에 중종은 57세로 승하한다. 이후에는 대장금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1515년부터 1544년까지 29년간 대장금의 궁중 의녀 활동 기록이 확인된다.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가 입궁할 때인 1506년부터 계산한다면 중종과 희빈 홍씨 가까이에서 38년간 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장금은 실록에 의녀(醫女), 내의녀(內醫女), 여의(女醫)로 기록되었다. '의녀, 내의녀'와 이름인 '장금, 대장금'이 연결 가능한 4가지에서 '의녀 장금, 의녀 대장금, 내의녀 대장금'이 확인되고 '내의녀 장금'은 확인할 수 없었다.
 
내의원 제조가 문안했다, 전교하기를(주상이 말씀하기를): "내가 증명한다. 여의가 안다. 여의 장금이 말했다……."(內醫院提調問安,傳曰: "予證, 女醫知之。女醫 長今言……." 실록에서 발췌함)
 
 
이처럼 중종 39년(1544.10.26.)에 대장금에게 여의란 호칭이 단 하루 기록된다. 드라마 <대장금>의 내용이나 실록에서 중종의 병환이 깊을 때 대장금의 어의(御醫) 역할은 충분하나 어의란 호칭으로 대장금을 기록한 사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대장금마실길. 시선을 멀리하면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하기 좋다.
 대장금마실길. 시선을 멀리하면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하기 좋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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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보면 대장금이 최소한 9년간은 일이 있을 때 입궐하고 반액의 급료를 받은 비정규직인 반체아(半遞兒)였다. 정규직인 전체아(全遞兒)로 중종과 희빈 홍씨 측근에서 20년 세월을 헌신했다. 대장금에게는 지위나 호칭보다는 궁중에서 신명 나게 기량을 펼치는 주어진 역할이 무엇보다 고마웠을 것이다.

대장금이 주어진 역할을 다하는 태도와 신명 나게 펼친 의술의 기량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대장금은 어린 시절에 현재의 순창군 쌍치면 지역에 있었던 쌍화점 마을에 다니면서 의술을 배웠다고 한다. 이 쌍화점 마을은 유명한 의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곳이다.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과 이름이 같은 쌍화점 마을이 이 지역에 있었다니 신기하고 흥미롭다.

고려시대 쌍화점 마을의 설경성(薛景成, 1237~1313)은 30세부터 명의였다. 충렬왕이 병이 났고 백약이 무효였는데 설경성은 단 세 첩의 약으로 왕을 완치했다고 한다.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 칸이 병이 들었고 천하의 명의들도 소용이 없었다.

고려 충렬왕의 왕비인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는 설경성을 원나라로 보내 치료하게 했다. 그는 세조의 병을 거뜬히 치료했다. 이 지역에서 고려와 조선 시대에 어의가 여러 명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 문화적 전통이 축적되어 대장금에게 이어진 것이 아닐까?
 
장금산 황토마을. 너디 마을 백일주가 되살아나면 대장금 마을은 더 향기로울 것이다.
 장금산 황토마을. 너디 마을 백일주가 되살아나면 대장금 마을은 더 향기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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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시대에 100세 이상 장수(長壽) 고을은 이 지역인 정읍 태인과 순창뿐이었다. 대장금은 이 노인들을 한양으로 모셔서 중종의 장수를 돕는 요양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장수 마을인 장금리 장금산 이 지역에는 신명 나고 건강한 풍류 장수촌으로 백일주(百日酒) 제조법이 전해져 온다.

진달래꽃, 감초, 당귀, 하수오, 산수유, 구기자, 오미자, 국화, 찹쌀과 솔잎 등 10가지 재료를 혼합하여 술을 빚었다. 술독을 정성껏 밀봉하고 응달에 묻어 100일간 발효 숙성을 기다려서 막걸리를 떠내면 감칠맛 좋고 뒤끝이 청량한 민속주였다. 의녀 장금이 궁중 수라간과 의술에 활용했다고 전해지는 너디마을 백일주가 되살아난다면 대장금 고향 마을 500년 이야기는 더 향기로울 것이다.

황토마을에서 난국정(蘭菊亭)을 지나 중곡(中谷)으로 올라가서 황토마을로 돌아오는 3.2km의 대장금마실길 1코스를 가볍게 걸었다. 호수와 산이 걷는 내내 조금씩 변하며 다양한 풍경을 연출하였다.

황토마을에서 장금산 기슭으로 올라선 곳에 폐교된 장금초등학교 건물과 학교터가 있는데 대장금 테마파크 조성사업을 추진한다고 한다. 가까운 구절초 테마파크 공원과 연계하여 대장금의 요리와 의술을 주제로 한 개성 있는 체험 관광지를 기대한다.

대장금의 고향으로 알려진 이곳 산내면 너디마을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왕족이나 귀족들이 살거나 피신하는 곳이었으며 공민왕(1330~1374)의 외가 마을이었다. 너디마을 수침동(水沈洞)은 신라 시대에 서해안에서 경주로 오가는 갈령도(葛嶺道)의 길목으로 중국 사신들이 머물러 가무를 즐기던 곳이었다. 너디는 마을 앞의 강에 놓인 징검다리 바윗돌로 노둣돌이었다. 너디 마을은 머물러서 서로 소통하고 길을 다시 시작하는 설레고 신명 나는 곳이었다.
 
수침동. 수침동은 중국 사신들이 머물러 가무를 즐기던 곳이었다고 한다.
 수침동. 수침동은 중국 사신들이 머물러 가무를 즐기던 곳이었다고 한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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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너디마을에 비단길을 걸어온 중동의 상인들도 지나갔을 것이다. 길은 사람을 따라 지식과 기술도 함께 소통하고 축적한다. 천년 넘게 이어진 옛길에 쌓인 전통과 문화가 대장금으로 꽃 피웠을 개연성을 이야기해 본다. 섬진강댐 축조로 옥정호가 형성되면서 너디 수침동 징검다리와 옛길은 옥정호 풍경의 물결에 잠겨 있다.

섬진강 옥정호에는 삼백리 둘레길이 호수를 장엄하게 빙 둘러 있다. 옛길에는 많은 이야기가 침묵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찾아 생생하게 색깔을 입혀 새롭게 들려주고 싶다. 옛길 위에서 흘렀던 이야기들의 설렘과 신명이 되살아날 것이다.

태그:#정읍시 대장금마실길, #대장금 너디 마을, #명의 설경성, #장금산 황토마을, #산내면 옥정호 수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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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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