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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폭스(1624~1691)는 영국에서 태어난 세계 최초 퀘이커교도다. 그의 삶과 사상은 한국 의 인권운동가이자 사상가 함석헌(1901~1989)에게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런지 함석헌은 '항시 추구하는 사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퀘이커교도로 그 삶을 마감했다.

나는 군복무 중인 1981년부터 1984년까지 함석헌의 책을 틈틈이 읽었다. 그러던 중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서 연세대에서 열린 그의 강연을 듣고 금방 함석헌에 푹 빠졌다(관련 기사 :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1984년 전역하고 서울 명동에서 함석헌이 강의하는 '노자와 장자 공부모임'에 출석하며 그를 매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함석헌 덕에 1985년부터 나도 서울퀘이커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1990년 4월 영국으로 유학 온 후 런던에서 열리는 영국퀘이커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한 영국퀘이커 교도가 내게 "한국에는 퀘이커교도가 몇 명이나 있나요?" 물었다. 내가 "ten(10)" 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ten thousands?(만 명이요?)" 하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No, just ten, actually nine as I am in here now.(아니요, 10명이요. 아 제가 영국에 있어서 지금은 9명이네요.")라고 대답한 것이 엊그제 같다. 지금은 한국에 20여 명의 퀘이커교도가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퀘이커교도 수가 2배 이상 늘어났으니 정말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1990년 5월 영국퀘이커들과 '퀘이커 순례길 여행'을 차량으로 일주일 정도 한 적이 있다. 주로 조지 폭스가 수감됐던 영국 북부 랑카스터성, 그가 신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펜들힐, 야외강연과 선교활동을 했던 호수지방인 컴브리아 등지였다. 그리고 조지 폭스의 아내인 마가렛 펠(1614~1702)이 살던 저택 수와스모어홀도 방문했다. 그 여행을 통해 17세기 퀘이커들이 영국의 왕족과 귀족 등을 향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위험분자"로 몰려 핍박받고 고문 받은 음침한 지하 감옥 등을 방문하며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최초 퀘이커교도 조지 폭스가 태어난 곳은 전혀 방문하지 않았다. 아마 "(어느 한 곳이 아니라) 모든 곳이 성스럽다. 어느 한 날(성탄절)뿐 아니라 모든 날이 소중하다. 어느 한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는 영국퀘이커들의 사상과 생활태도가 내게도 무의식적으로 작용된 듯하다.
 
조지 폭스가 수감되었던 영국북부 랑카스터성
 조지 폭스가 수감되었던 영국북부 랑카스터성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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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폭스가 수감되었던 영국북부 랑카스터성
 조지 폭스가 수감되었던 영국북부 랑카스터성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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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폭스가 수감되었던 영국북부 랑카스터성. 30년전인 1990년 방문시에는 없었던 한글 안내판이 지금은 있다.
 조지 폭스가 수감되었던 영국북부 랑카스터성. 30년전인 1990년 방문시에는 없었던 한글 안내판이 지금은 있다.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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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지난 주 우연히 우리 집에서 가까운 영국 친구 집을 방문했었다. 그 친구는 페니 드레이톤이라는 시골에 사는 농부였다. 차를 몰고 '페니 드레이톤'이라고 적힌 마을 어귀 에 들어선 순간, "아. 여기가 조지 폭스가 태어난 동네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페니 드레이톤은 영국중부지방 레스터셔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우리 집도 레스터셔에 있고 우리 집에서 페니 드레이톤 까지는 차로 30~40분 정도 걸린다. 영국은 섬나라 이지만 레스터셔(주)만 유일하게 바닷가가 없는 내륙지방이다. 한국의 충청북도처럼.

영국에 30여 년을 살면서 같은 동네에 사는 최초 퀘이커교도인 조지 폭스가 태어난 곳을 한 번도 안 와 본 것에 고인에게 무척 미안했다. 나도 퀘이커 교도이면서... 그래서 지난 23일 아예 날을 잡아 도시락을 싸들고 혼자 다시 페니 드레이톤을 찾았다. 다행히 봄날의 햇볕도 따사로웠다.
 
400년 전 조지 폭스와 그 가족이 다니던 페니 드레이톤 성공회 성당
 400년 전 조지 폭스와 그 가족이 다니던 페니 드레이톤 성공회 성당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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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폭스는 페니 드레이톤의 성공회교회 관리인이자 직공(weave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엄격하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동네에 소문이 나 있었다. 특히 그의 부친 크리스토퍼의 별명은 동네에서 "의로운 크리스"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더욱이 폭스의 부모는 그래도 시골에서는 재산도 좀 있는 요즘으로 치면 중산층 정도였다. 이런 부모영향 때문인지 폭스도 어린 시절부터 아주 종교적이었고 성경에도 통달했다고 한다.

폭스 부친이 관리인으로 일했고 폭스가 어린 시절 다니던 성공회 교회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이 교회의 평신도 목회자인 미셸씨는 내게 "내년 2024년은 조지 폭스 탄생 400주년이라 우리 교회에서 그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특별 행사를 합니다"라며 귀띔해 주었다.

나는 혼자 양지바른 교회당을 걸으며 400년 전에 부모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그 교회를 찾았을 조지 폭스를 생각했다. 그 교회 마당에는 그 교회를 다니던 몇 백 년 된 교인들의 비석들도 있었다. 삶과 죽음을 가까이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조지 폭스가 400년전 다니던 페니 드레이톤 성공회 성당 내부
 조지 폭스가 400년전 다니던 페니 드레이톤 성공회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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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 드레이톤 성공회 성당내의 '퀘이커 코너'
 페니 드레이톤 성공회 성당내의 '퀘이커 코너'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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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 들어가니 한쪽 구석에 '퀘이커 코너'가 있다. 그 코너에는 간략하게 조지 폭스의 삶과 사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폭스의 부모는 신앙이 독실한 그가 성공회 신부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폭스는 위계적이고 계급적인 성공회에 성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19살에 아예 집을 나왔다. 그리고 결국 목사나 신부 같은 중재자 없이 개인이 신과 직접 교감하는 퀘이커교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어려서 다니던 성공회 교회에서 내년 그의 탄생 40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행사를 한다니 세상일은 참 아이러니하다.

페니 드레이톤은 인구도 500여명 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그래서 교회 예배도 매주 없고 매월 마지막 일요일 한 번밖에 없다고 한다.

교회에서 나와서 조금 걸으면 퀘이커 길(Quaker Close)이라는 막다른 골목길도 보인다. 또 좀 더 몇 분을 걸으니 조지 폭스 길(George Fox Lane)도 나온다. 이곳에 자그마한 조지 폭스의 기념비가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자리 부근이 그가 태어나서 뛰어놀며 자라던 생가가 있던 자리란다. 기념비 옆에는 비교적 그의 삶을 자세하게 기록한 기념물이 있다. 이 기념비 앞에서 나는 400년 전에 이곳에서 살다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함석헌에게도 절대적 영향을 미친 조지 폭스의 삶을 생각했다. 그가 4세기 전에 거닐던 이 시골길을 오늘도 내가 걷고 있는 것이 좀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조지 폭스 기념비
 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조지 폭스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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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조지 폭스 기념비
 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조지 폭스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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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조지 폭스 기념비 옆에는 비교적 그의 삶을 자세하게 기록한 기념물이 있다.
 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조지 폭스 기념비 옆에는 비교적 그의 삶을 자세하게 기록한 기념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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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이 퀘이커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3.1운동 후 북한 평안도 오산학교에서 면학에 힘쓸 때인 1921년이었다. 그때 그는 영국 사상가 토마스 카알라일(1795~1881)의 <의상철학>을 통해서 퀘이커에 관한 글을 읽었다. 이때 그는 조지 폭스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폭스가 쓴 <일지>를 읽게 됐다.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가 있다. 조지 폭스는 남녀와 인종 그리고 사회계급을 넘어선 모든 인간 사이에 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 그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 보다 지금 여기서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퀘이커교는 영국이 청교도혁명(1640~1660)에 휩싸여 있었을 때 서서히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지 폭스의 사상은 영국에서 퀘이커교 창설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일지>는 그의 사후인 1694년 출판되었고, 이 책이 퀘이커교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

그의 <일지>를 통해서 폭스는 각 개인은 하나님과 직접 교감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모든 인간 안에는 여러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속 생명, 내면의 빛, 영감, 내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씨앗 등이 있고 이것은 직접 하나님의 영성과 교통할 수 있다는 폭스의 주장은 초기에는 영국정부와 국교인 성공회에서 이단으로 여겼다. 그래서 폭스를 포함한 많은 퀘이커교도들은 수많은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받았다.

조지 폭스는 종교가 설교나 교리, 의식에 의한 제도라기보다는 내면의 빛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이 있으므로, 폭스는 각 개인이 침묵예배를 통해서 절대자와 교감하는 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느꼈다. 이 내면의 빛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어떠한 형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이 내면의 빛은 각 개인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단체모임을 통해서도 발현된다.

초창기 조지 폭스를 비롯한 퀘이커들은 한 개인의 영적 통찰도 깊은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퀘이커들의 증언(testimonies)은 타인의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을 그 기초로 한다. 그래서 수감자들을 위한 교도소 시설의 개선, 정신병원시설 개선, 여성참정권운동, 노예제도반대, 노동자들을 위한 공정한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정직한 상거래 확립, 정찰제 소개, 교육과 구호사업, 세계평화운동 등을 위해 퀘이커들은 역사를 통해 부단히 힘써 왔다.

또한 초창기부터 퀘이커들은 남녀평등을 중요시했다. 그것은 예배뿐 아니라 공개연설, 교육, 그리고 사무관계를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퀘이커 모임에서 양성 평등의 훈련을 통해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지도력과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퀘이커길
 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퀘이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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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조지 폭스 길
 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조지 폭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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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퀘이커 조지 폭스가 17세기 영국 장인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하고 근엄한 청교도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지만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한 것처럼, 함석헌도 20세기 상공업이 발달한 평안도 지역에서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장로교인으로 성장했지만, 결국 그는 3.1운동이라는 정치, 사회변혁을 체험하고 경직된 장로교로부터 영적 만족을 못 느끼게 되는 것도 폭스의 영적 행로와 유사하다. 고난의 삶을 살다간 조지 폭스와 마찬가지로 고난의 아들 함석헌도 아무런 세속의 매개 없이 절대자와 직접 대면하려던 사람이었다.

함석헌의 종교적 편력이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17세기 영국교회의 세속적 권위에 대항해서 폭스가 주장한 '내면의 빛' 개념이 20세기 국가폭력의 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함석헌은 퀘이커 내면의 빛을 통해 내적 힘을 기르고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정신을, 한국 민족이 그 의지를 기르고 일으켜 세우는 한 방법으로 배우기를 원했던 것 같다. 동시에 그도 폭스처럼 기성교회의 무조건적 권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탈권위적 성향의 퀘이커로부터 고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일반적으로 퀘이커들은 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퀘이커들을 절대평화주의자들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다. 실제 생활에서 각 퀘이커는 각자의 내면의 빛이나 통찰력에 따라 각자 믿음대로 결정한다.

예를 들면 미국 독립전쟁이나 1.2차 세계대전 당시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집총을 거부한 퀘이커들이 있는 반면, 애국심의 가치를 평화주의보다 앞세워 전쟁에 참여한 퀘이커들도 많았다. 또한 남북전쟁 중 많은 퀘이커들은 노예제도폐지를 무력을 통해서라도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론을 택하기도 했다.

사회정의 없는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믿었기에 퀘이커들은 사회정의, 빈곤, 문맹퇴치, 반전운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미 퀘이커회는 제 1, 2차 세계대전에서 난민과 그 유가족들을 도와준 활동에 대한 감사와 국제적 평화주의의 중요성을 행동으로서 고취시켰던 공헌에 대한 인정의 표시로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6.25 전쟁 후에도 퀘이커들은 북한을 포함해 이념을 떠나 국제 원조, 구제, 재건활동을 적극 지원했다(관련 기사).

특별히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영·미 퀘이커 의료봉사단은 한국에서 대대적인 의료봉사활동을 벌였다. 2만여 명의 한국전쟁 난민은 영·미 퀘이커의료봉사단의 도움 아래 군산병원에서 무료진료를 받았다. 1970년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여러모로 도와주었고 1990년대는 영국 대학원에서 '함석헌 연구'를 위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내게 해줬다(관련 기사 : 베갯속 죽은 쥐...영국여의사는 왜 한국에 왔나).

퀘이커들은 실천적인 면과 신비적인 면, 상대적 사회현실과 절대적 가치인 하나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속한 구체적 한 시대와 영원의 세계, 일치와 다양성, 그리고 최소한의 형식과 무제한적인 생명 등의 문제를 고민해 왔다. 영국 퀘이커교도 잉글 라이트는 그러한 상대세계와 절대세계의 밀접한 연관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속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퀘이커들의 침묵 예배는 상호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인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영국생활 30여년 만에 처음 찾은 최초 퀘이커교도 조지 폭스 고향인 영국 시골마을 페니 드레이톤에서 날씨 좋은 봄날 나는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태그:#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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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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