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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 김달님 / 창비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 김달님 / 창비
ⓒ 김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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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유 같은 나의 기억력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 책을 읽을 때 더 그렇다. 기억해두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은데 정작 책을 다 읽은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휘발 돼버리고 만다.

김달님 작가의 에세이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말들>을 아예 책을 읽는 도중에조차 나의 기억이 휘발될 것이 안타까웠다. 그만큼 머리에, 마음에 새겨두었다가 살면서 하나씩 꺼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 그건 서른에도, 마흔에도, 여든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다짐 같았다.' / 26p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하면 오가는 대화는 대체로 비슷한 내용이다. 무얼 먹었는지, 오늘은 뭘 했는지, 몸 불편한 곳은 없는지. 그래서 가끔 나는 전화를 해서 대뜸 이렇게 묻는다. 

"아빠, 오늘의 이슈는 뭐예요?" 

주로 "뭐 맨날 그렇지, 특별한 게 있나"라는 대답을 듣는다. 

그러다 간혹 "엄마랑 바닷가 가서 회 먹고 왔지"라거나 "이장이 경운기 좀 고쳐 달래서 그거 해주고 왔지"같은 대답을 들으면 기분이 왜 이리 좋은지. 

아마 부모님이 지금의 나처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책과 관련한 것만으로도 무수하게 많은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읽은 책 한 권으로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니까.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고, 가까운 곳에 문화를 즐길만한 인프라가 없는 시골에 사신다.

그럼에도 나는 그분들이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하면서 사시면 좋겠다. 오늘의 이슈는 뭐였는지 생각해 보고, 소소한 것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하루하루이길 바란다. 아!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혹시 당신들에게 오늘의 이슈가 자식의 안부 전화를 받는 것은 아닐까?'      

'미래에도 우리가 모르는 행복이 있을 거야'

김달님 작가는 친구와 함께 20대에 찍은 사진을 보다가 묻는다. 

"왜 지금보다 옛날이 더 좋게 느껴질까. 이때는 무얼 하든 재밌었던 것 같은데" 

친구는 말한다. 
 
"그때 우리가 웃는 사진을 많이 남겨놔서 그래. 미래에도 우리가 모르는 행복이 있을 거야. 분명히 있을 거야."(127p)

읽던 책을 잠시 덮어두고 생각한다.

'나는 어디를 향해 기대앉아 있을까?'

요 며칠 속이 부대끼는 일들이 있어 생각이 자꾸 과거로 향한다. 

'~~ 했더라면 달라졌을까?' '~이었어야 했는데' 

과거는 달라지지 않으니 아무리 내 마음이 과거로 향한들 해결되는 일은 없다. 김달님 작가의 이 책을 읽으며 잠시 눈이 부셨다. 어두운 방에 누군가 들어와서 백열전구를 딸칵하고 켠 것 같은 기분. 물론 나의 속 부대낌은 여전하다. 하지만 앉은 방향을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15도 정도는 트는 계기가 됐다.       

잘게 쪼개진 행운이라도

김달님 작가가 고모들과 시장을 갔다. 고모들이 로또 복권을 사서 작가의 손에 쥐어준다. 대박 나라는 덕담과 함께. 혹시 1등에 당첨되면 원망하지 않을 테니 잠수를 타라는 농담과 함께. 그런 농담을 나누며 지나던 시장에서 고모들은 어제 본 갈치보다 싸고 통통한 갈치를 발견한다.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기뻐하며 갈치를 사들고 가는 고모들의 뒷모습을 보며 작가는 생각한다.
 
'잠수를 탈 만큼 대박은 아니더라도, 저렇듯 잘게 쪼개진 행운이 그들의 평생과 아무렇지 않게 함께하기를.' / 223p     

과거를 향해 앉았던 나는 다시 미래를 향해 각도를 조금 더 튼다. 이미 나에게는 숱한 행운이, 비록 잘게 쪼개진 것이라 해도 방 안을 환하게 해 줄 만큼 가득한 행운이 있다. 그러니 이왕이면 더 미래를 향해 돌아 앉아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  
   
'장마에도 젖은 빨래를 말리는 방법은 있다.' / 122p 

작가에게 이것은 글을 쓰다가 좌절감이 찾아올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와 펜이 있는 자리로 향하는 마음이다. 빨래가 다 마르기 전에 해가 지더라도 다음 날 해를 기다리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민이 있다. 평생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납덩어리처럼 어깨를 누르기도 한다. 그럴 때면 김달님 작가의 말을 기억해보려 한다. 우리는 내리는 비를 보면서 빨래가 안 마르겠구나 걱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젖은 빨래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있다. 또 언젠가는 비가 그칠 거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해가 비치는 방향을 향해 빨래 건조대를 이리저리 옮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김달님 작가의 글은 사랑을 향해 열려있다. 그의 전작 <나의 두 사람>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에서처럼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또한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고, 결국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태그:#책리뷰, #김달님, #우리는조금씩자란다,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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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안 보일까봐 가끔 안경을 끼고 잡니다. 글자를 좋아합니다. 특히 남이 쓴 글자를 좋아합니다. 묘비에 '나 여기 없다'라고 쓸까, '책에 파묻혀 죽다'라고 쓸까 고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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