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의 좌석이 마련된 영화관에서 20대 관람객이 오직 나 한 명뿐이라면? 

누군가는 어린이 관람객이 강세인 애니메이션을 보러 갔나 싶겠지만, 광고가 끝나고 상영될 영화는 <길 위에 김대중>이다. 좌석 수로 약간의 가정을 했지만, 나는 곧16명의 관람객 중 청년 대표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졸지 말고 끝까지 보자는 마음으로 허리를 폈다.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솔직히 내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익숙하지만 먼 인물이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은 교과서에서 배운 문장 몇 줄의 연결에 불과했다.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열었고 북한에 햇볕정책을 편 대통령, 그의 행보가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되어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라는 게 대답할 수 있는 지식의 전부다. 몇 개의 타이틀을 기억한다는 정도로 안도해도 괜찮을 만큼 일상에서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할 일은 거의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단편적인 근현대사를 인물의 생애를 중심으로 엮어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컸다. 분명 배움이 목적인 관람이었는데 러닝 타임에 가까워질수록 등받이에서 몸이 점점 멀어지더니 어떤 한 장면에서 깊이 감응했다. 위로받고 싶어서 이 영화를 본 것은 아니었는데 왜 눈물이 났을까. 

새롭게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
 
 <길 위에 김대중> 영화 스틸컷

<길 위에 김대중> 영화 스틸컷 ⓒ 명필름, 시네마6411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하려면 서생적 문제 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을 겸비해야 한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여러 어록 중 하나다. 그는 배 한 척 가지고 해운 사업에 뛰어들어 선박 여러 채를 보유해 운영할 만큼 수완 좋은 사업가였기에 이 말 속에는 그가 살아온 생애가 있다. '목포일보'를 인수해 사장까지 역임한 그를 보며 사업가로서, 지식인으로서 풍족한 삶을 꾸릴 수 있을 텐데 왜 정치에 입문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 또한 격변하는 현대사 한가운데에 있었고 '한국 전쟁'이 그가 정치와 국민의 관계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약속한 국가 수장이 부산으로 도피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국민의 행복은 국민을 위하는 정치로부터 나온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권력에 대한 탐욕을 표출하는 정치인이 익숙해서였을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를 수단으로 삼았던 그가 오히려 낯설고 새롭게 다가왔다. 

정치에 뛰어든 그의 인생 2막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의 정치 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 그 자체였다. 영화는 김대중이 군부 독재에 맞서면서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올라 투쟁의 길을 걷는 과정을 다양한 영상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대권 주자로 몸집을 키울 수 있었던 중심에 박정희가 있었다는 거다. 그가 김대중을 견제하고 눈에 보이는 제재를 가했기 때문에 오히려 유신 정권의 적수로 김대중이 떠올라 대중에게 각인된 것이다.

김대중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의 대중 연설에 구름떼처럼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같은 눈빛으로 민주주의를 염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납치, 가택연금 및 정치 활동 금지, 그리고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까지 선고받은 그는 긴 고난의 시간을 견뎌 정치인으로서 행보를 직접 만들었다. 어쩌면 내쫓긴 길 위에서 그는 국민을 직접 찾아갔고 나란히 걸으며 소통했다. 

'국민에 대한 신뢰'라는 말이 위로가 된 이유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 명필름

 
이희호 여사의 설득으로 치료를 위해 미국 망명길에 올랐을 때에도 김대중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할 일을 해나갔다. 그가 미국 정치 인사들을 만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의 국민 또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고". 분단국가인 한국에 민주주의보다 안보가 중요하다는 미국의 편견을 국민에 대한 신뢰로 깨는 그를 보며, 지금껏 내가 정치에 느낀 회의감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게 됐다. 

기성 정치는 청년을 쉬운 말로 묶는다. 정치는 몰라도 잘 살고 싶은 이기적인 세대로 규정한 후 편할 때에 '이대남(20대 남성 줄임말)', '이대녀(20대 여성 줄임말)'로 호명한다. 청년이 새로운 정치 집단으로 부상하는 기류에 힘입어 가능성을 뻗어가려 해도 각종 기업들은 내가 시민보다 소비자로 남도록 MZ세대 안에 잡아두려 한다.

아무도 내 가능성을 믿어주거나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다. 내가 정치에 느낀 냉소는 사회 구성원으로 신뢰받은 경험이 없다는 허탈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표가 절박할 때, 국가가 비상 상황일 때 동원되는 국민을 넘어 더 나은 삶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주체로 불리고 싶다는 마음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로받았다. 

신뢰받는다는 감각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다. 김대중이 건네는 말과 행보에서 당대 사람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알게 됐을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거리에 나선 것도 영향력 있는 국민으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골몰한 결과가 아닐까. 미국 망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김대중은 광주 희생자가 잠든 망월 묘역을 찾아 눈물을 쏟았다. 국민과 깊이 교감한 한 사람의 도리 없는 슬픔을 보며 내가 원하는 정치와 정치인의 모습을 그리게 됐다. 

<길 위에 김대중> 관람이 고민되는 청년들에게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 명필름

 
<길 위에 김대중>을 보러 간다는 말에 친구는 진보 성향이냐고 물었다. 인물 다큐멘터리는 인물에 대한 선호가 곧 영화에 대한 선호로 이어지곤 한다. 그 인물이 정치인이라면 그 사람의 행보는 속해있는 정치 진영으로 치환되어 영화 관람이 곧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일로 여겨진다. 

혹여 이런 고민이 영화를 찾는 장벽이 된다면 이 영화는 한 정치인의 일대기 그 이상을 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어떤 정치인에게 투표해야 하는지 고민된다면 가서 보길 권한다. 자신이 깊이 꽂힌 그 부분에 원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총선에 출마할 후보자들에겐 이 영화가 필수 교양 자료로 사용되면 좋겠다. 주변에 있는 청년 유권자들에게는 내가 알음알음 권하는 중이니 국회 혹은 정당 안에서도 <길 위에 김대중>을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추천 해주시길 바란다. 
길위에김대중 김대중탄생100주년 김대중 서울의봄 시민
댓글48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