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3 10:27최종 업데이트 24.03.0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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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아서 화제가 됐던 영화 <미나리>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엄마와 아빠가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본 아이들이 부모를 향해 "Don't fight(싸우지 마)"를 쓴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장면. 이후 부모가 당황해 머뭇거리는 광경을 보며 나는 강렬한 위화감이랄까, 일종의 소외감까지 느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클리셰로 흔히 소비되는 장면이 있다. 부부 싸움을 하면 아이가 곰 인형을 안고 자기 방에서 나온 후 "싸우지 마. 으앙" 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 어쩌면 나는 부러웠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 아빠가 싸울 때 행여 내 숨소리마저 새어나갈까 봐 조심하며 이불 안에서 몸을 최대한 웅크려 작게, 더 작게 말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변한다

한 번씩 나를 덮치는 어두움이 있다. 평생을 따라다니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리를 무는 이 검은 개. 한때 나는 내 우울함의 원천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 있다고 확신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난장판이 되어있던 집안 속에서, 꾸역꾸역 밥을 넘기고 등교해야 했던 그 어린 시절 말이다.


심리학자 존 브래드 쇼(John Bradshaw)는 어린 시절에 경험한 내용이 정신세계 속에 남아 현재의 삶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면아이' 이론으로 이를 설명한다. 그의 책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에 따르면 어린아이의 감정이 억압된 채 자라면 상처받은 그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그 성인의 내면에 남아 있게 된다.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과거의 내면아이는 후일 성인기 부적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도 같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대인 기피증에 시달렸기로 유명했다. 프리드리히가 이런 시를 지은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인간 혐오자라고 부른다네, 내가 사회를 피한다는 이유로. 하지만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지,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네. 하지만 인간을 증오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단념하지 않을 수가 없다네."

프리드리히가 그토록 인간과 사회에 거리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사에서는 어린 시절 그가 겪은 충격적인 경험에 원인이 있다고 진단한다. 프리드리히가 13살 되던 해인 1787년 겨울, 강가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중 그는 그만 얼음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한다. 당시 함께 놀던 동생 요한 크리스토퍼가 형을 구하려 백방으로 애쓰는 과정에서 다행히 프리드리히는 구조되지만, 정작 동생은 익사하고 말았다.

혼자 살아남은 프리드리히는 아마도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짓눌렸을 것이다. 이후 그는 평생 불안하고 우울한 심리로 살았다. '내면아이' 이론을 적용하자면, 동생의 죽음을 무력하게 바라봤던 어린 시절의 프리드리히가 내면에 남아 어른이 될 때까지 프리드리히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멱살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가기만 하는 존재일까? 우리는 왜 스스로 '내면 아이의 포로'를 자처하는 것일까. 현재 자신이 처한 어려움의 원인을 따지고 살펴보는 건, 인과관계를 사고의 중심축으로 삼는 인간의 당연한 생리이다.

그래서 먼 과거의 특정 사건을 골라 인과의 사슬을 길게 이어 현실을 설명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모든 잘못을 지나간 과거에 돌리면 현재 닥쳐오는 문제를 직시하고 맞부딪쳐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편한 선택'이기도 하다. <백래시>의 작가 수전 팔루디가 이렇게 얘기했듯이 말이다.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지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상처받은 아이를 끄집어내는 것이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키는 중심 드라마가 되면서, 피해자 지위를 거부하고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려는 노력은 대체로 밀려나 버렸다."

역시나 최근 심리학계 연구 동향은 '내면 아이' 이론을 반박하는 추세라고 한다. '내면 아이'는 그렇게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윌리엄 그리너프(William Greenough) 미국 일리노이 대학 교수는 "인간의 뇌는 유년기 최초 3년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적 입력신호를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고 말했다.

즉, 인간은 뛰어난 환경 적응력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의 일생을 좌지우지할 '결정적 시기'라는 것은 없으며, 한 개인이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내더라도 그 이후의 삶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내면 아이'에 지지 않은 뭉크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삶이 이를 증거한다. 그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현재의 삶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도록 놔두지 않았던 '단단한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뭉크의 1903년 작 <지옥에서의 자화상>을 보자.
 

에드바르 뭉크, <지옥에서의 자화상> 1903년, 캔버스에 유채, 노르웨이 뭉크미술관 ⓒ 에드바르 뭉크

 
여기, 40살의 뭉크가 있다. 그런데 벌거벗었다. 맨살을 드러낸 채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그의 뒤에는 지옥의 화염이 뜨겁게 치솟고 있다. 이미 불꽃 하나는 뭉크의 목을 조르는 중이다. 그 때문일까. 숨이 막힌 듯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놀랍게도 눈빛만큼은 형형하다. 마치 이 지옥 속에서도 살아남겠다는 굳센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그림 속에는 뭉크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뭉크 몸에 바짝 붙어 있는 커다란 그림자가 그것. 그림자는 마치 위협하듯이 뭉크의 머리 위에서 넘실거린다. 이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그의 '내면아이'이다.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유독 병약했다. 류머티즘에 의한 고열과 만성 기관지천식은 어린 그를 늘 괴롭혔다. 훗날 뭉크가 "유년기와 청년기 내내 질병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폐결핵 균은 흰 손수건에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핏빛 깃발을 꽂았다"라고 진저리치듯 회고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년기의 그를 제일 큰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위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일련의 죽음과 그 체험에서 비롯된 충격의 무게가 그를 가장 깊은 절망 속으로 빠뜨렸다.

뭉크가 고작 5살이었던 1868년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잃은 사실 자체만으로도 5살 아이는 세상의 무게에 허우적거렸지만, 아버지는 그 무게를 덜어주지 못했다. 기둥이 되어야 할 아버지는 오히려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우울증을 앓았고, 종교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증상을 보였다.

당연히 집은 어둠으로 가득 찼고, 뭉크는 이 숨 막히는 광기를 피해, 한 살 위의 누나 소피에에게 마음을 의지했다. 소피에는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카렌 이모를 도우며 동생들을 돌보고 살림을 하던, 의젓한 누나였기 때문이다. 뭉크의 '소울 메이트'이자 '제2의 어머니', 그가 소피에였다.

그런데 어머니를 떠나보냈던 폐결핵이 몇 년 후 다시 뭉크의 집을 찾아왔다. 이번 희생자는 처음엔 뭉크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피를 토해내던 뭉크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고 대신 폐결핵을 떠안은 주인공은 바로 소피에가 되었다.

신은 잔인하게도 뭉크에게서 어머니에 이어, 누나마저 앗아간 것이다. 이때 뭉크의 나이는 고작 15살이었다. 죽음의 폐허 속에서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 뭉크는 절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배웠으리라.

그러나 뭉크는 어린 시절에 마냥 머무르기를 거부했다. 그에게는 '그림'이 있었다. 뭉크는 공학 공부를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6세 때인 1879년 기술학교에 들어가지만, 이듬해에 그만둔다.

<병든 아이>를 반복해 그린 이유

그 후 1881년, 리스티아니아(현재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기어이 입학했다. 그리고 그림을 방패 삼아 밀려오는 슬픔, 분노, 우울, 두려움에 맞섰다. 캔버스에 생채기를 남기듯 거칠게 그린 <병든 아이>는 바로 뭉크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다는 증거다.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 1885~1886년, 캔버스에 유채,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 에드바르 뭉크

   
한 눈에도 병색이 짙어 보이는 소녀가 희미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살짝 벌린 소녀의 입은 그녀가 자연스럽게 숨쉬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한다. 베개를 덧댄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체념하듯이 고개를 돌린 소녀. 그리고 그 소녀의 손을 부여잡은 채 흐느끼며 고개를 떨군 어머니. 어머니는 '살려 달라'고 신을 향해 기도 중인 것만 같다. 그러나 그 기도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그림의 실제 모델이 되어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고 하지만, 뭉크의 머릿속에서는 불쌍한 누이가 죽음을 앞두고 있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작품 속 소녀는 소피에이고, 어머니로 표현된 사람은 카렌 이모와 다름없다.

뭉크는 "이 작품은 내 예술의 돌파구"이며 "이후 나의 거의 모든 작품들도 이 작품 덕에 존재하는 것"이라며 <병든 아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를 증명하듯 뭉크는 <병든 아이> 그림을 6번이나 다시 그리고, 이후 판화로도 제작하기도 했다. 왜였을까? 뭉크의 말에서 답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모든 작품은 질병에 대한 사색에서 비롯되었다. 두려움과 아픔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방향키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

뭉크는 슬프고 아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림으로 구체화했고, 이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감정을 객관화해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물론 사랑하던 누나가 죽었다는 사실까지는 바꿀 수 없었지만, 예전보다는 그 기억이 자아내던 참담한 슬픔을 잘 통제할 수 있었다. 22살 때인 1885년부터 노년이 된 1927년까지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병든 아이>를 반복해 그리면서 '맷집'이 생긴 것이다.

뭉크는 알았던 것 같다. 어려서의 환경은 주어진 것이지만, 어른이 되면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주어졌던 어릴 때의 시간이 평생을 잡아먹게 두지 않도록 싸울 힘이, 어른에게는 있다는 것을. <지옥에서의 자화상> 속 그의 눈빛이 증명하듯 말이다. 그렇게 뭉크는 '그림'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고, 마침내 '내면 아이'에 지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몇 년 전 스위스 출신의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우리나라의 한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에 대한 드 보통의 답변은 의외였다. 그는 '아니'라고 단언하면서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은 명쾌했다.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멋진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슬퍼할 줄 안다는 것은, 더 큰 만족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증거인 까닭입니다."

정말 그렇다. 나는 여전히 슬퍼하고 애도한다. 단발머리 소녀 시절,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지냈던 그 흑백같던 나날들을. 하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내 아이들의 현재가 좀더 평화로울 수 있도록 남편과 세심히 조율하는 엄마가 될 수 있었다.

내 삶에 가끔씩 비 맞은 검은 개가 오더라도, 이제 나는 여유롭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물과 사료도 내어준다. "맑은 날만 계속되면 사막이 된다"라는 말을 되뇌면서 말이다. 이 경험 앞에서 '내면 아이' 이론은 빛을 잃는다. 나는, '단단한 어른'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자료

<화가의 출세작>, 이유리 지음, 서해문집, 2019
<내면 아이는 없다>, 강병철 지음, '숨&결'칼럼, 한겨레신문 2023년 1월 31일자 26면
<트라우마 과잉의 시대>, 강병철 지음, '숨&결'칼럼, 한겨레신문 2023년 4월 11일자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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