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30 07:14최종 업데이트 24.05.0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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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5일 홍준표 대구시장이 산격청사에서 간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대구시

 
최근 홍준표 대구시장이 갑자기 동대구역과 대구 대표 도서관 앞 광장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겠다고 하는 바람에 대구가 시끄럽다. 홍 시장은 과거 경남도지사 시절 안 그래도 부족한 도립의료원을 없애 지탄받더니 이번에는 시대착오적 박정희 동상을 거론함으로써 그의 판단력과 역사의식이 어떤 수준인지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박정희 동상을 동대구역과 도서관 광장에 세운다면 자라는 아이들이 뭘 배우고 뭘 느낄까? 박정희 동상이 어불성설인 10가지 이유를 아래에 제시한다.

[#1] 친일파

첫째, 박정희는 친일파 중의 친일파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했고,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썼다. 조갑제가 박정희를 찬양하기 위해 쓴 책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박정희는 수시로 일본말을 했고 5.16 새벽 쿠데타군 출동명령조차 일본말로 했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대통령 박정희가 일본군 복장을 하고 있더라는 증언도 있다.


홍준표 시장이 박정희 동상을 세우겠다고 하는 동대구역 앞으로 히말라야시이다 나무가 일렬로 죽 서있는데 이것은 박정희가 좋아해서 심은 것이고, 박정희가 그 나무를 좋아한 이유는 그 나무가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서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니 박정희의 정신적 고향은 언제나 일본이다.

박정희는 미국 방문시 잠시 들른 일본에서 자기는 막부 말기 유신 지사들을 존경한다는 말도 했다(나중에 10월 유신이라는 표현도 여기서 빌려왔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에서 받은 군국주의 황민화 교육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똑같은 교육을 받고도 일본 제국주의에 반감을 갖고 민족운동을 하다가 제적당한 동기들도 많았는데 박정희는 민족의식이 없었다.

장준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직후 만주군 소속 한국 군인들이 만주에 모여 입국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광복군 출신 장준하가 뭐라고 지시를 하면 "하이! 하이!"하며 일본말로 대답하는 새카맣고 키 작은 군인이 있어 뭐 저런 인간이 있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박정희였다는 것이다.

장준하 선생이 1960년대 대중강연에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대통령에 출마할 자격이 있지만 박정희 한 사람만은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1975년 장준하 선생은 포천 약사봉 등반 도중 의문사한 시체로 발견됐다. 머리에서 계속 피가 흘러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냥 매장했는데 먼 훗날 이장할 때 보니 두개골에 큰 구멍이 뻥 뚫려 있어 타살임이 명백해졌다.

[#2] 기회주의자

둘째, 박정희는 보기 드문 기회주의자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에 붙어 충성을 맹세했고, 해방 후 좌파 세상이 올 것 같으니 좌파에 가담했다. 해방후 대구 남로당에서 활동할 때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 사대부중) 본관 2층 발코니에 대포를 설치해 길 건너 남대구경찰서를 깨부수자고 제의를 한 적도 있다.

박정희는 남로당에서 활동하던 중 여순반란 사건 이후 군부 내 좌파 숙청 작업에서 발각돼 끌려간 곳이 이승만이 총애했던 악질 친일파 방첩대장 김창룡 앞이었다. 주변에는 고문에 신음하는 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김창룡 앞에 앉자마자 고문을 받기도 전에 대뜸 한 첫 마디가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라며 동지들 이름을 죽 적어 내려갔다.

그는 수많은 동지들 이름을 적어냈는데 명단 제출만으로는 부족해 김창룡이 박정희를 데리고 감방을 돌았다. 박정희가 말없이 눈짓 손짓으로 지목한 사람은 모두 사형당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 때문에 목숨을 잃은 옛 동지들이 100명이 넘는다. 200~300명이라는 설도 있다.

[#3] 무한 권력욕

셋째, 무한 권력욕. 박정희는 4.19로 모처럼 찾아온 신생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발전하기를 지켜보기도 전에 초장부터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민주당 정권의 파벌싸움, 정치적 혼란을 쿠데타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것은 사후 합리화일 뿐이고 처음부터 민주 정부를 뒤엎을 계획이었으니 권력욕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박정희, 김종필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결국 5.16 새벽에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의 기회주의적 처신 때문에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 뒤에도 박정희는 대통령 임기 연장을 위해 헌법을 바꾸고 또 바꾸며 종신집권에 혈안이었다.

민주공화당 의장, 고문을 맡고 있던 정구영 변호사는 훌륭한 애국자였다. 정 변호사가 1966년경 청와대를 찾아가 박정희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지난 1963년 대선은 아슬아슬하게 이겼지만 내년 대선은 쉽게 이길 겁니다. 그런데 선거에 이기고 난 뒤 아첨꾼들이 몰려와 헌법을 바꾸어 더 집권해야 한다고 권할 겁니다. 이런 유혹을 물리치고 헌법대로 깨끗이 대통령 두 번만 하고 물러나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박정희는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정구영 의장은 마음속으로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데 그때 이미 박정희는 3선 개헌 저의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의심이 간다. 무한 권력욕이야말로 이승만, 박정희의 공통점이다.

[#4] 반민주 독재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인근에 있는 박정희 동상. 높이가 5M에 이른다. ⓒ 조정훈


넷째, 반민주, 독재.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무고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투옥, 고문한 것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고문 수법은 일제 강점기 때 악질 고등계 형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악마적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박정희 독재의 정점은 유신 독재와 그 치하에서 희생된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8인 중에는 도예종, 여정남 등 대구, 경북 사람들이 많다. 유신 독재 시절 한국의 인권 수준은 세계 최하위였고 박정희 독재는 국제적 지탄 대상이었다. 박정희의 반민주, 독재에 대해서는 워낙 문헌이 많아 여기서는 생략한다.

[#5] 반통일 민족 대결

다섯째, 반통일, 민족 대결. 박정희는 5.16 직후부터 통일세력을 적으로 삼아 대대적 검거 선풍이 불었고 그 뒤로도 통일세력을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철저히 탄압했다.

특히 5.16 뒤 박정희, 김종필의 통일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북에서 내려온 밀사 황태성(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이자 결혼 중매인, 박상희의 사위가 김종필)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것은 큰 잘못이었다. 원래 밀사는 죽이지 않는다. 게다가 황태성은 자기 친형이나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이였다(황태성의 일생에 대해서는 김학민, <박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를 읽어보라).

그 뒤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남북화해 제스처를 취하며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서 민족 과업인 통일을 수단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며 그 뒤 남북관계 악화의 빌미가 됐다.

[#6] 경제 살렸다는 거짓 신화

여섯째, 사람들은 박정희가 경제는 살렸다고 말하는데 이마저 허상이다. 홍준표 시장은 박정희가 5000년 가난을 극복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우며 동상을 세우겠다고 하는데 이런 인식이야말로 문제다.

박정희 모델의 핵심은 만주국 모델이다. 1932~1945년 만주에 세워진 만주국은 명목상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수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국이었다.

만주국은 고성장을 달성했는데 만주국을 이끌던 5인방을 '니끼산스께'(2끼3스께)라고 부른다. 2명의 끼와 3명의 스께인데, 관동군 사령관 도조 히데끼(東條英機)가 있었고 경제정책을 주도한 사람은 기시 노부스께(岸信介)였다. 도조 히데끼는 전후 동경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으나 기시 노부스께는 운 좋게 살아남아 전후 자민당 총재와 총리를 지냈다. 그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다.

이들 극우파는 일본의 만주 점령과 조선 식민 통치를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 덕분에 만주, 조선이 발전했다고 강변한다. 그래서 지금도 과거사에 사과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일본에도 양심적인 인사들이 있지만 자민당 주류는 그것과 거리가 먼 뻔뻔스러운 극우파 인사들이다.

만주국의 고성장은 파쇼독재에 기반을 둔 총동원 체제에 의한 양적 성장이고, 이런 방식은 일시적으로는 고성장을 달성하는 경우가 많다.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도 비슷한 방식으로 고성장을 했다(박정희는 문경에서 교사 시절 하숙방에 나폴레옹과 히틀러 사진을 붙여 놓고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사람은 많이 죽였지만 난 놈은 난 놈이야." 박정희의 말이라는, 해방 후 박정희의 동거녀 이현란의 증언이다).

그러나 지금 독일, 이탈리아에서 히틀러, 무솔리니가 경제 살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독재 찬양을 듣고 살아야 하나. 파쇼 경제모델의 특징은 일시적 고성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독재 때문이다.

초기의 양적 성장은 쉽지만 어려운 것은 후기의 질적 성장이다. 질적 성장을 하려면 자유로운 토론, 비판이 필수적이다. 유신 독재 속에서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니 박정희 모델은 오래 못 갈 운명이었다. 어차피 경제적 실패로 박정희 체제가 무너졌을 것인데 그런 결과를 보기 전에 박정희가 죽는 바람에 아직도 많은 사람이 박정희 신화에 빠져 있다. 박정희가 경제 살렸다고 하는 건 거짓 신화일 뿐이다.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을 보수 쪽에서는 선견지명이 있다고 찬양하는데 그것도 틀린 말이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에 착공, 불과 2년 반 걸려 1970년 여름에 완공했다. 그래서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에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완공 후 몇 년간 통행량이 적어 도로가 텅텅 비었고, 농촌에서 고속도로에 고추를 널어 말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급조하는 바람에 왕복 4차선으로 너무 좁아 나중에 도로를 확장하는 데 원래 든 비용의 20배가량 들었다. 이런 게 무슨 선견지명인가?

2년 반 만에 끝낸 무리한 졸속, 부실 공사로 애꿎은 77명의 인부들이 사망해 금강 휴게소 부근에 77인 위령비가 서 있다. 박정희는 왜 이렇게 경부고속도로를 무리하게 서둘렀을까? 1971년 4월 대선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박정희의 사고방식은 매사 이런 식이다.

[#7] 부패
 

25일 오후 대구 중구 동성로 옛 한일극장 앞에서 열린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박정희 동상 건립반대' 피켓을 들고 서 있다. ⓒ 조정훈


일곱째, 부패. 박정희는 청렴해서 떨어진 러닝셔츠를 입었고 청와대 변기 속에 벽돌을 넣어 물을 절약했다고 한다. 사실이리라고 본다. 박정희 말고도 나이 든 사람 중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것보다 수백 배 수천 배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박정희는 청렴의 가면 뒤로 천문학적인 뇌물을 받아 챙겼다. 미국 의회에서 드러난 미국 정유사 걸프의 뇌물 사건, 차관 도입 기업들이 청와대에 바친 리베이트, 김정렴 비서실장이 실토한 대기업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수금해 바쳤던 검은돈의 규모는 지금 물가로 계산하면 천문학적 수준이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욕을 먹은 사카린 밀수 사건의 배후도 실은 박정희다. 미쓰이 재벌이 삼성에 주려고 하는 100만 달러 리베이트를 받을 방법이 어렵다고 하자 박정희가 밀수를 해서 자기하고 나눠 가지자고 지시해 놓고 나중에 문제가 되자 자기는 쏙 빠지며 삼성을 비난했다.

평소 욕을 할 줄 몰랐던 이병철 회장이 이때만큼은 분노해서 평생 들어보지 못한 가장 심한 욕설을 퍼부으면서 장남 이맹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맹희야, 너는 앞으로 정치인 말은 절대 믿지 마라."(이맹희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

대통령의 재벌 독대, 정경유착, 부패는 박정희 모델의 핵심이다. 이병철 회장이 밀수 사건 때문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영남대에서 손을 떼자 부하들을 시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영남대도 냉큼 빼앗았다. 

[#8] 부동산 투기

여덟째, 부동산 투기. 박정희는 욕심이 지나쳐 전국의 땅을 파헤치는 난개발, 부동산투기를 일으켜 한국 땅값을 세계 1위로 올렸고, 돈을 마구 풀어 물가를 천정부지로 올렸다.

한국 땅값, 부동산 가격은 현재 세계 최고인데, 이렇게 가격을 올린 책임을 정권별로 쪼개보면 압도적 책임은 박정희에게 돌아간다. 박정희 시대에는 부동산값이 천정부지로 올랐고 한 해에 2배로 뛰는 일도 있었다(공식 통계가 그렇고 실제는 훨씬 더 올랐을 것이다. 그때 소득 통계나 지가 통계는 청와대의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민란, 폭동이 일어났을 텐데 그때는 우리 국민이 워낙 양순해서 그냥 참고 넘어갔다. 박정희식 과잉개발, 난개발과 돈 찍어 물가 올리기는 일시적 성장 효과가 있지만 일종의 마약일 뿐이고 장기적으로 경제를 망친다. 박정희는 항상 눈앞의 이익만 좇고 멀리 보지 않았다. 경제도 그런 식으로 운영해서 후대에 두고두고 부담을 주었다.

과거 역대 대통령 밥솥 유머가 있었다. 박정희가 밥을 많이 지어놓으니 김영삼이 흥청망청 해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로 밥솥이 텅텅 비었다 운운하는 유머다. 이 비유를 쓰자면 박정희는 미래에 쓸 장작까지 미리 당겨써서 자기 공인 양 생색냈고 그래서 두고두고 후환을 남겼다.

한국의 고도성장은 박정희 덕분이 아니고,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근면한 우리 노동자, 농민이 피땀 흘려 달성한 것이다. 보다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지도자를 만났더라면 우리나라는 벌써 선진국이 돼 있을 것이다.

[#9] 도덕성
 

대구시의회 기획행정위원회는 26일 상임위를 열어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조례안을 수정 가결해 통과시켰다. ⓒ 조정훈


아홉째, 도덕성. 박정희가 구미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반장을 했는데 말을 안 듣는 친구들에게는 아주 모질게 주먹으로 쥐어박았다고 한다. 대구사범학교 다닐 때는 구미 집에서 떡을 해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날은 박정희가 다락방에 혼자 올라가 떡을 다 먹고 내려왔다고 한다(동기 의사 이영원의 증언).

여성 문제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박정희의 여성 문제를 폭로하는 박선호(김재규의 대구 대륜고 제자이자 부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발언을 제지했다(남자는 '허리끈 밑의 일은 논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이것 또한 남자에게 편리한 일본 군국주의 잔재다).

그러면서도 나중에는 박정희에게 끌려간 젊은 여성이 200명이 넘는다는 말을 자기의 변호사(강신옥, 안동일)에게 남겼다. 박선호 과장은 자기가 하는 일이 연산군 때 채홍사 비슷한 것이어서 항상 부끄러웠고 집에 들어가면 어린 자식들 볼 면목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달력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거의 다 청와대를 다녀갔다고 보면 된다"는 말을 남겼으니 박정희의 엽색행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대구 신명여고를 졸업한 MBC 기자 문명자는 육영수 여사와 친한 사이였다. 어느 날 육 여사의 급한 연락을 받고 달려가니 청와대 부근 안가로 문 기자를 데려가는데 그 안가 안에 지금 박정희와 여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육여사가 차마 그 대문을 박차지 못하고 물끄러미 대문만 쳐다보던 그 눈길을 잊을 수 없다고 문명자 기자는 썼다(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바른말을 잘하던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 석상에서 총을 맞고 그날 저녁 운명했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재일동포 문세광이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연말 처형됐지만 이 사건은 의문 투성이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서울시경 총알 감식반장 이건우 경감의 증언에 의하면 문세광의 권총(5발 장전)에서 발사한 총알 세 개는 각각 마루바닥(1발), 연단 태극기 주변(2발), 천장(3발)에 맞았고, 못다 쏜 총알 2개는 총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육여사는 문세광의 총에 맞지 않았다는 뜻이다. 진범은 누구인가?(월간 <다리> 1989년 이건우 경감의 증언).

[#10] 포악성

열 번째, 포악성. 박정희는 해방 직후 육군본부에 근무할 때 이현란이라는 이화여대생과 동거하고 있었다. 첫 부인 김호남과는 사이가 나빠 같이 산 적이 별로 없었고 그 뒤 나타난 여성이 이현란이다(이현란을 주제로 소설가 이병주가 쓴 실화 소설이 <그를 버린 여인>이다).

이현란은 박정희와 오래 살지 않고 어느 날 야반도주했다. 세월이 흘러 1960년대 어느 날 박정희의 대선 유세장에 이현란이 나타났다. 이현란을 알아본 어느 기자가 물었다. "당신이 그때 도망가지 않고 박정희하고 살았더라면 지금 영부인이 돼 있을 텐데 후회하지 않나요?" 이현란이 답했다. "후회라니요. 저런 인간하고 어떻게 삽니까. 매일 손찌검을 하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도망쳤어요."

박정희의 포악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는 그가 화가 나면 사람 얼굴을 향해 유리(또는 놋쇠) 재떨이를 던졌다는 사실이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쓴 <5·16과 10·26> 책에 당시 기자였던 이만섭 눈앞에서 박정희가 재떨이를 던지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충격적인 목격담이다.

얼굴에 유리 재떨이를 맞는 사람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런데 그 뒤 박정희한테 재떨이를 맞은 사람을 나는 책과 증언을 통해 5건 더 발견했다. 뒤의 5인은 모두 이름만 들으면 다 알만한 사람들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사람을 배우라고 가르친다면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는 24일 오전 대구시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기념 조례안 부결을 촉구했다. ⓒ 조정훈


이상 박정희 동상을 세우면 안 되는 이유 10가지를 들었다. 박정희는 민족과 나라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고, 멀리 보지 않고 항상 눈앞의 이익을 탐했던 사람이다. 일제 때는 친일파, 좌파 세상이 되자 좌파 변신, 체포되자 동지 배신, 권력욕에 눈이 멀어 신생 민주정권을 총칼로 뒤엎었고, 권력 유지를 위해 애국 학생, 시민을 잡아다 일제가 독립운동가 잡아 고문하던 방식으로 고문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켰고, 경제개발조차 멀리 보지 않고 눈앞의 대통령 선거에 이용했던 사람이다. 인간적, 도덕적으로는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사람을 배우라고 가르친다면 이 나라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선산 출신 김재규는 해방 직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의 전신) 제2기를 박정희와 함께 졸업했고 평생 박정희와 가까이 지냈으나 유신독재의 죄악상을 직시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유신 헌법이 발표되던 날 아침 김재규는 누워서 신문을 읽다가 화가 나서 신문을 휙 집어던지며 고함질렀다. "이게 무슨 헌법이야, 혼자서 평생 해먹겠다는 거지." 김재규에게는 그런 정의감, 양심이 있었다. 전두환은 김재규를 패륜아로 몰았지만 언젠가 역사가 재평가하는 날이 올 것이다.

김재규는 거사 직전 붓글씨를 많이 썼는데, 그 중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 있다. 비리는 이치(理致)를 이길 수 없고, 이치는 법을 이길 수 없으며, 법은 권력을 이길 수 없고, 권력은 하늘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박정희의 무도한 권력도 하늘의 심판을 면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홍준표 시장은 본인의 권력만 믿고 말도 안 되는 역사 퇴행을 기도하고 있는데 법과 권력 위에는 하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최근 EBS에서 방영된 <위대한 수업>에서 런던대 정치학 교수 브라이언 클라스는 세계 각국의 권력자들을 분석한 뒤 이렇게 결론 내렸다. 권력을 싫어하는 겸손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최악의 선택은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우기는 독재자들인데 이런 악질 지도자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자아도취(나르시시즘), ▲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 ▲ 포악성(사이코패스). 어떤가. 이승만, 박정희는 바로 뒤의 유형이다.

여기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한국 보수파의 한계는 이승만, 박정희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존경, 숭배한다는 점이다. 이러니 진보와 보수 사이에 대화가 불가능하고 극단적 대립, 불신이 지속된다.

앞으로 한국 보수도 이성을 회복해서 존경스러운 보수 인사들(예를 들면 독립지사 김창숙, 김규식, 정구영 변호사)을 모델로 삼기 바란다. 이들에 대해서는 진보 쪽에서도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렇게 되면 진보와 보수 사이에 공통 분모가 생기고 대화와 타협의 선진적 정치가 가능해질 것이다.

박정희 동상은 한 마디로 언어도단이요, 천부당만부당하다. 대구는 안 그래도 지나친 재개발, 재건축 사업으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시멘트 도시화하고 미분양이 속출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데 여기에 박정희 동상마저 들어선다면 '고담 도시' 완결판이 될 것이다. 대구시는 보수의 온상이라고 국민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데 박정희 동상마저 선다면 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홍준표 대구시장과 대구 시의회 의원들은 이성을 되찾아 우민화, 역사 퇴행, 국민의힘 장기 집권 목적의 박정희 동상을 포기하고 민생 챙기기에 집중해 주기 바란다. 대구시의회는 5월 2일 이 졸속 안건을 결단코 부결시켜 시장의 독주를 막고, 시의회의 명예를 드높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건전한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민주시민들의 이성적 요구다. 이성적 요구를 무시하고 시대착오적 오류를 계속한다면 시장과 시의회는 전국적으로 업신여김을 받을 것이고, 엄청난 민심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고 하며 동상 건설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토론이나 공론화 없이 밀어붙여서야 되겠는가. 이 문제를 놓고 홍 시장과 나의 1:1 토론을 제안한다. 대구시민과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3시간 동안 박정희 동상에 대한 '개'와 시장의 토론회를 정식으로 제안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이정우는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전 참여정부 대통령 정책실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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