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4일 개봉해 32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파묘>에서 무당 이화림을 연기한 김고은은 <파묘>를 통해 처음으로 천만 배우에 등극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김고은은 <파묘>를 만나기 전까지 327만 관객의 <영웅>이 커리어 최다관객이었을 정도로 영화흥행과는 크게 인연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도깨비>와 <유미의 세포들> <작은 아씨들> 등에 출연했던 스타배우 김고은을 모르는 대중은 그리 많지 않다.

1994년 영화 <구미호>로 데뷔한 정우성은 20년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수 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한 번도 천만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천만 영화와 인연이 없던 정우성은 2023년 11월에 개봉한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황정민 분)에게 끝까지 대항하는 이태신 장군을 연기하며 처음으로 천만 배우에 등극했다. 사실 정우성의 화려한 커리어와 높은 인지도를 고려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는 천만 배우 등극이었다.

2003년에 개봉한 <실미도>부터 올해 개봉한 <파묘>까지 한국영화에는 총 23편의 천만 영화가 탄생했지만 관객들에게 낯선 신인급 배우가 주연으로 이야기를 이끌며 천만을 돌파한 영화는 이 작품이 거의 유일했다. 2005년 12월에 개봉해 1230만 관객을 동원했고 전국에 '예쁜 남자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며 이준기라는 신인배우를 단숨에 스타로 급부상시켰던 이준익 감독의 3번째 장편영화 <왕의 남자>였다.
 
 <왕의 남자>는 단 300여개의 스크린 만으로도 12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왕의 남자>는 단 300여개의 스크린 만으로도 12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 (주)시네마서비스

 
연극-희곡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들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가장 보통의 연애> <나의 P.S. 파트너> <완벽한 타인> 등은 영화가 먼저 개봉한 후 이를 토대로 연극으로 각색돼 무대에 오른 작품들이다. 주로 스케일이 크지 않고 한정된 공간에서 스토리가 진행되는 영화들이 연극으로 각색돼 무대에 오르곤 했다. 반면에 연극으로 먼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들 중에서도 영화로 각색돼 더욱 커진 스케일과 풍부해진 이야기로 관객들을 만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연극원작 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역시 봉준호 감독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의 추억>은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든 연극 <날 보러 와요>를 원작으로 만든 작품으로 영화에서 두 번째 용의자를 연기했던 류태호가 연극에서는 3명의 용의자를 모두 연기하는 '1인 다역'을 선보였다. 또한 <살인의 추억>에서 백광호 역을 맡았던 박노식은 영화 출연을 계기로 연극 <날 보러 와요>에 합류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2005년에 개봉해 800만 관객을 돌파했던 박배종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도 2002년에 무대에 올랐던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판에서는 연극과 비교해 배우가 겹치기도 하고 배역이 바뀌기도 했는데 연극에서 해설을 맡았던 정재영이 북한군 장교 리수화를 연기했고 동구 역의 류덕환은 북한의 소년병 택기를 연기했다. 또한 연극에서 장영남이 연기했던 여일은 영화에서 강혜정으로 교체됐다.

<살인의 추억>에서 각본을 맡았던 심성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봉준호 감독이 기획, 각본, 제작에 참여하며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던 <해무>도 연극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해무>는 김윤석, 문성근 같은 연기파 배우들 뿐 아니라 인기 아이돌 가수 박유천이 캐스팅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해무>는 <명량>과 <해적>이 양분하던 2014년 여름 극장가에서 147만 관객을 모으며 손익분기점(약 300만)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화려한 휴가>와 < 7광구 > <타워> 등을 연출했던 김지훈 감독의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일본의 희곡을 원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우리말로 의역하면 영화 <친구>의 명대사(?)이기도 한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영화 분위기와 제목이 너무 이질적이라 현재의 제목으로 개봉했다. 2017년에 촬영을 마쳐 2022년에 개봉한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전국 41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2006년 전국을 강타했던 '이준기 신드롬'
 
 <왕의 남자>에서 감우성(왼쪽)과 이준기는 상반된 매력을 선보이며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왕의 남자>에서 감우성(왼쪽)과 이준기는 상반된 매력을 선보이며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 (주)시네마서비스

 
2003년 10년 만의 복귀작 <황산벌>을 통해 277만 관객을 동원하며 극적으로 부활했지만 사실 <왕의 남자> 개봉 당시만 해도 이준익 감독에 대한 관객들의 신뢰는 그리 높지 않았다. 게다가 주연을 맡은 공길 역의 이준기는 2004년에 개봉했던 <발레교습소>가 유일한 상업영화였고 감우성 역시 영화보다는 TV드라마에서 더 익숙한 배우였다. 연말개봉의 프리미엄을 제외하면 <왕의 남자>는 크게 주목 받는 영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왕의 남자>는 개봉 후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흥행속도를 올리더니 개봉 45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시 <왕의 남자>가 상영되던 스크린이 단 313개였다는 점이다. 물론 2000년대 중반은 지금보다 상영관이 적기도 했지만 2010년대 이후 소위 '대작'이라 불리는 영화들이 많게는 20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왕의 남자> 흥행기록은 더욱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왕의 남자> 돌풍의 일등공신은 역시 '예쁜 남자 신드롬'을 이끈 이준기였다. 3000: 1의 경쟁률을 뚫고 공길 역을 따내며 혜성처럼 등장한 이준기는 엄청난 열연으로 관객들의 극찬을 받으며 7개 영화제의 신인상을 휩쓸었다. 특히 지금은 이준기에게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된 전설의 석류CF는 공개와 동시에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고 실제 이준기가 광고한 석류음료는 최단기간에 매출 100억 원을 돌파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왕의 남자>에서 관객들에게 논란이 됐던 부분은 바로 연산군(정진영 분)과 장생(감우성 분), 그리고 공길의 동성애 코드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연산군과 공길의 키스장면이 나오고 장녹수(강성연 분)는 연산군과 공길의 사이를 질투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연산군이 공길에게 집착하는 것은 동성애라기 보다는 '애정결핍'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오히려 목숨을 걸 만큼 서로를 챙기는 장생과 공길의 행동과 감정이 동성애에 더 가까웠다.

<명량>의 김한민 감독이 차기작 <한산>을 만들기까지 8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천만 영화를 만든 감독들은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이상 긴 호흡을 두고 차기작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2005년 12월 <왕의 남자>가 개봉한 후 2006년 추석에 곧바로 차기작 <라디오스타>를 선보였다. <왕의 남자> 개봉부터 <라디오 스타> 개봉까지 걸린 시간은 단 9개월. 이준익 감독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지런한 감독'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정진영이 보여준 '폭군' 연산군의 이면
 
 정진영은 <왕의 남자>에서 관객들이 평소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연산군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정진영은 <왕의 남자>에서 관객들이 평소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연산군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 (주)시네마서비스

 
조선시대 최고의 폭군이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연산군은 유인촌과 유동근, 이민우, 정태우, 안재모, 김강우 등 여러 작품에서 많은 배우들이 연기했다. 하지만 정진영은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연산군의 광기 어린 모습만을 강조하지 않고 애정을 갈구하는 연산군의 입체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실제로 <왕의 남자>를 보고 연산군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낸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데뷔 초 귀여운 이미지의 청춘스타로 사랑 받았던 강성연은 2001년 보보라는 이름의 가수로 데뷔해 의외의 가창력을 뽐내더니 2005년 <왕의 남자>에서 '왕을 유혹한 기생' 장녹수 역으로 또 한 번 파격 변신했다. 연산군의 관심을 뺏어가는 공길을 경계하던 장녹수는 영화 후반 왕을 비방하는 벽서를 입수해 공길이 썼다고 모함한다. 하지만 공길의 필체를 정확하게 모사한 장생의 희생으로 공길은 누명을 벗게 된다.

지금은 <베테랑>과 <택시운전사> <파묘>까지 네 편의 천만 영화를 가지고 있는 유해진의 커리어 첫 번째 천만 영화가 바로 <왕의 남자>였다(물론 당시만 해도 유해진이 '1억 배우'로 성장할 거라 예상한 관객은 거의 없었다). 유해진은 <왕의 남자>에서 동생들과 함께 거리를 떠도는 광대패거리의 맏형 육갑을 연기했다. 육갑은 장생과 공길의 뛰어난 재주에 매료돼 함께 다니면서 정이 들었고 나중엔 진심으로 장생과 공길의 안위를 걱정한다.

푸근하고 선하게 생긴 외모로 주로 여리고 온화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 정석용은 <왕의 남자>에서 육갑이 이끄는 광대 패거리 중 둘째 칠득 역을 맡아 팔복 역의 이승훈과 콤비개그를 선보였다. 팔복을 연기한 이승훈은 매체 연기보다는 연극에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는데 <왕의 남자>의 원작연극 <이>에서는 감우성이 연기한 장생 역을 맡기도 했다. 이 밖에 윤주상과 최일화, 신정근 등이 연산군에게 반기를 드는 대신들을 연기했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왕의남자 이준익감독 이준기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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